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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복음 묵상

[복음]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160628

작성자아구스리|작성시간16.06.28|조회수424 목록 댓글 5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23-27

그 무렵 23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그분을 따랐다. 24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25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26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 

27 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말하였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n aquel tiempo, Jesús subió a la barca y sus discípulos le siguieron. De pronto se levantó en el mar una tempestad tan grande que la barca quedaba tapada por las olas; pero Él estaba dormido. Acercándose ellos le despertaron diciendo: «¡Señor, sálvanos, que perecemos!». Díceles: «¿Por qué tenéis miedo, hombres de poca fe?». Entonces se levantó, increpó a los vientos y al mar, y sobrevino una gran bonanza. Y aquellos hombres, maravillados, decían: «¿Quién es éste, que hasta los vientos y el mar le obedecen?».


«Entonces se levantó, increpó a los vientos y al mar, y sobrevino una gran bonanza»

Fray Lluc TORCAL Monje del Monasterio de Sta. Mª de Poblet 

(Santa Maria de Poblet, Tarragona, España)

Hoy, Martes XIII del tiempo ordinario, la liturgia nos ofrece uno de los fragmentos más impresionantes de la vida pública del Señor. La escena presenta una gran vivacidad, contrastando radicalmente la actitud de los discípulos y la de Jesús. Podemos imaginarnos la agitación que reinó sobre la barca cuando «de pronto se levantó en el mar una tempestad tan grande que la barca quedaba tapada por las olas» (Mt 8,24), pero una agitación que no fue suficiente para despertar a Jesús, que dormía. ¡Tuvieron que ser los discípulos quienes en su desesperación despertaran al Maestro!: «¡Señor, sálvanos, que perecemos!» (Mt 8,25).


El evangelista se sirve de todo este dramatismo para revelarnos el auténtico ser de Jesús. La tormenta no había perdido su furia y los discípulos continuaban llenos de agitación cuando el Señor, simplemente y tranquilamente, «se levantó, increpó a los vientos y al mar, y sobrevino una gran bonanza» (Mt 8,26). De la Palabra increpatoria de Jesús siguió la calma, calma que no iba destinada sólo a realizarse en el agua agitada del cielo y del mar: la Palabra de Jesús se dirigía sobre todo a calmar los corazones temerosos de sus discípulos. «¿Por qué tenéis miedo, hombres de poca fe?» (Mt 8,26).


Los discípulos pasaron de la turbación y del miedo a la admiración propia de aquel que acaba de asistir a algo impensable hasta entonces. La sorpresa, la admiración, la maravilla de un cambio tan drástico en la situación que vivían despertó en ellos una pregunta central: «¿Quién es éste, que hasta los vientos y el mar le obedecen?» (Mt 8,27). ¿Quién es el que puede calmar las tormentas del cielo y de la tierra y, a la vez, las de los corazones de los hombres? Sólo quien «durmiendo como hombre en la barca, puede dar órdenes a los vientos y al mar como Dios» (Nicetas de Remesiana).


Cuando pensamos que la tierra se nos hunde, no olvidemos que nuestro Salvador es Dios mismo hecho hombre, el cual se nos acerca por la fe.



♣ 흔들리는 인생의 파도 속에서 ♣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의 요건(8,18-22)을 제시하신 다음, 오늘 복음에서는 그들 자신을 어떻게 삶으로 보여야 하는가를 알려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모스가 선포한 주님의 진노처럼 느끼는 그런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아모 3,1-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삼켜버릴 듯한 거센 파도가 배를 덮치는데도 주무시는 것만 같습니다. 


죽음의 상황에서 절망한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8,25)며 잠든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자 그분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8,26) 하고 말씀하시며 파도를 잠재우십니다. 하느님의 전권으로 악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를 본 제자들은 놀랍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지니신 주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언제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가라앉히시기에 앞서 떳떳한 신앙을 확고히 가지라고 호소하십니다(마태 8,26).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는 늘 어려움과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 삶에서도 가끔 우리를 통째로 삼켜버릴 듯한 풍랑, 곧 유혹과 시련은 닥쳐옵니다. 


아모스의 경고처럼 풍랑은 주님의 심판일 수 있으나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심판은 바로 구원을 향한 출발점이며 그분과의 만남은 심판이자 동시에 구원입니다. 일상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지요(28,20). 그러나 살면서 극한상황에 처하고 절망감에 휩싸이며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주님께서는 계시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고 침묵하시는 그분이 야속하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약한 이들의 눈에는 주님께서 주무시는 척하시는 것이 부재(不在)하시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우리는 늘 아무런 시련과 고통이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만큼 나약한 인간이고 세상의 유혹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자주 풍랑이 이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풍랑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미지근한 신앙이 늘 문제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더 나아가 어떤 시련과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주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지니기만 하면 주님 친히 내 안에 오시어 내 고통의 십자가를 함께 져주심을 믿어야만 합니다. 온갖 선의 원천이시오, 죽음을 이기신 바로 그 생명의 주님만이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불의, 심지어 죽음까지도 이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위험과 시련, 고통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바라보며 묵묵히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겪게 되는 어려움을 자신의 힘과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길임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오늘도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일상의 고통과 시련을 견뎌내고 유혹에 맞서며, 빛이요 희망이신 주님께 내 존재 전부를 맡겨드리며, 우리 함께 손을 맞잡고 힘을 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학과 영성
생선은 머리부터 썩어간다[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2
김근수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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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28  1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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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제자들도 뒤따라 올랐다. 그때 마침 바다에 큰 바람이 불어 배가 파도에 흔들리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를 깨우며 말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겁이 많습니까, 믿음이 적은 사람들이여.” 예수는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었다. 그러자 바람이 잔잔해졌다. 사람들이 놀라서 말했다.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 자는 어떤 사람인가.” (마태 8,23-27)

  
▲ ‘풍랑 속의 그리스도’, 렘브란트, 1633년
예수와 제자들만 있는 배 위에서 일어난 사건을 사람들이 알거나 감탄할 수는 없겠다. 예수 생전에 진짜 일어난 사건은 아니고 부활 이후 공동체에서 신자 교육에 쓰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데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공동성서(구약성서) 요나 이야기를 참고하여 꾸며낸 것 같다(요나 1,4-16). 마르코 복음 4,35-41을 마태오가 손질하였다. 베개 이야기는 사라지고, 제자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반응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적 사건 설명에서 예수와 제자와 대화로 중심을 바꾸었다.

‘흔들림’(seismos)은 세상 마지막 날을 연상시키기 좋은 단어다. “그날에 이스라엘 온 땅에 흔들림이 있으리라. 바다의 고기가 내 앞에 떨 것이다”(에제 38,19). 제자들의 정신적 흔들림을 보여주기에도 적당한 단어이다.

바람과 바다는 혼란의 힘을 상징한다(시편 107,25-). “배”는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도 교회를 상징하는 데 애용되는 단어다. 유다교에서 배보다 바람이 더 자주 비유에 쓰였다. 고대에 배는 주로 국가를 가리키는 비유다. 국가를 상징하는 정치적 비유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말로 초대교회가 바꾼 것이다. 순자(荀子) 왕제(王制)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뒤엎기도 한다”(君者舟 庶人者水 水則載舟 水則覆舟). 가난한 사람이 교회를 지탱하지만 가난한 사람이 교회를 뒤엎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이 두려운 줄 교회는 알아야 한다.

예수가 배에서 잠든 것은 방랑과 가르침에서 피곤한 탓일까. 그보다 예수의 위엄과 자신감을 나타내려는 표현 같다. 인간으로서 예수는 불안을 모르지 않는다(마태 26,37-). “주님”은 예수를 부르는 제자들에게 적절한 호칭이다(마태 28,18). 모든 인간적 불안의 바탕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바람을 가라앉히고 나서 제자들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예수는 먼저 제자들의 믿음 부족을 질책한다. 제자들이 불안했기에 혼난 것은 아니다. 곁에 예수가 있어도 제자들이 두려워한 그 자세가 비판받는 것이다. 믿음은 불안을 이긴다. 예수가 내 곁에 있어도 나는 예수가 그립다.

하느님이 바다와 바람을 다스리시듯(시편 107,29) 예수도 그렇게 한다. 사람들이 고통에서 울부짖자 하느님께서 건져주셨다(시편 107,28). 예수도 그렇게 한다. 그런 예수에게 사람들은 놀란다.

예수는 대체 누구인가. 그런 질문을 그리스도교 신자도 매일 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를 잘 모르고서도 예수를 설교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오늘 그리스도교의 아픈 현실이다. 예수에게 사람들은 호감을 갖지만(마태 9,33; 15,31; 21,20), 거리를 두기도 하고 적대심을 품기도 한다(마태 22,22).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존경하며 배우려 애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헐뜯고 미워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더 큰 것 같다.

오늘의 단락은 예수를 따름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를 가르쳐준다. 첫째, 예수를 따름은 신앙의 형제자매들과 공동운명을 지닌다. 우리는 같은 배에 탄 것이다.

둘째, 예수를 따름은 위험한 길이다. 예수를 믿으면 돈, 건강, 구원이 온다는 엉터리 가르침과 그리스도교는 전혀 관계없다. 예수가 먼저 배에 오르고 제자들이 뒤따른다. 예수가 먼저 희생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는 바로 예수다. 스테파노, 바울, 베드로가 예수의 뒤를 따라 순교했다. 교황, 추기경, 주교, 신부들이 신자보다 먼저 희생하려 애써야 곧 가톨릭교회다. 목사들이 맨 먼저 희생해야 참다운 개신교다.

희생은 제일 먼저 ‘가난한 교회’로 나타난다. 전임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저서 <나자렛 예수>에서 제자들의 가난 문제를 자세히 다루었다. 아쉽게도 ‘교회의 가난’과 ‘세상의 가난’ 문제를 그는 언급하진 않았다.

오늘 신자 개인뿐 아니라 교회가 가난의 의무를 잊고 자본주의식 성장 논리에 깊이 빠진 모습이 안타깝다. 가톨릭교회에서 ‘가난의 감각’이 크게 사라진 것 같다. 가난의 감각은 청빈에 대한 매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 대한 의로운 분노에서 온다. 진정한 가난의 감각은 사실 ‘정의의 감각’에서 오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감각 없이 가난에 대한 감각은 없다.

가톨릭교회에는 조직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문제도 성직자보다 주로 신자에게 화살을 향한다. 그러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인류 앞에 사죄한 가톨릭교회의 잘못 중 대부분은 조직과 성직자들의 탓이었다. 오늘 가톨릭교회의 위기―교황청 부패, 성추문, 신자 감소 등―는 곧 성직자의 위기다.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밤에 대리운전에 나서는 목사들이 많은 안타까운 현실을 골프장에 들락거리는 신부들은 알기나 할까.

“주님, 살려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하느님 앞에 지금 엎드려 호소해야 한다. ‘생선은 머리부터 썩어간다’는 터키 속담이 있다. 교회에서 돈, 권력, 결재권을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특히 명심할 말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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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해우천풍 | 작성시간 16.06.29 김근수 형제님...참 좋은 분이시긴 한데...자주 침소봉대 하는 것이 보여..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리고 비판은 많이 하시는데 자신을 비판하는 것은 또 용납을 못하시는 분이기도 하시구요...
  • 답댓글 작성자아구스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6.29 네 그렇죠. 한편 그런만큼 또 그 분의 쓰임이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어찌 됐든, 다른 목소리를 내는 소수자의 존재는 소중하니까요. 과한 부분이 있으면 신부님께서도 과감히 지적해 주시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원고 청탁임다. ㅋㅋㅋ
  • 답댓글 작성자해우천풍 | 작성시간 16.06.29 아구스리 원고 청탁..ㅎㅎ 저도 엄선(?)해서... 그럼..ㅎㅎ 옛날 제 강론이라도..ㅎㅎ
  • 답댓글 작성자해우천풍 | 작성시간 16.06.29 아구스리 사실 저도 그런 목소리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저분 페이스북에 저분 의견에 반대하는 글을 올리면 막 삭제하세요....몇명이 이미 당했구요..제가 아는 분들이..그래서 처음엔 좋게 생각했는데..자신은 다른 이들을 비판하면서 다른이들의 비판은 듣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에 약간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뭐... 또한편 반면교사로 삼기도 했구요..
  • 답댓글 작성자아구스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7.01 해우천풍 그렇군요. 저도 되도록이면 치우치지 않으려 다른 사제의 글과 함께 올리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인터넷의 특성상, 그렇게 삭제해야 할 정도로 얼마나 시달렸을까 하고 생각도 해봅니다. 무엇이 옳은지 가려내기는 쉽지 않으나, 성경 말씀처럼 '맺는 열매'가 무엇인지 보면 알겠지요. 일방적이고 부정적인 비판의식이라는 열매인지, 반성과 성찰의 열매인지는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이의 마음에 달려있기도 하네요. 무엇보다 자신 안의 환부를 도려내는 아픈 마음과 타인을 배척하는 나쁜 마음을 구별할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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