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En aquel tiempo, mientras Jesús estaba hablando a la muchedumbre, su madre y sus hermanos se presentaron fuera y trataban de hablar con Él. Alguien le dijo: «¡Oye! ahí fuera están tu madre y tus hermanos que desean hablarte». Pero Él respondió al que se lo decía: «¿Quién es mi madre y quiénes son mis hermanos?». Y, extendiendo su mano hacia sus discípulos, dijo: «Éstos son mi madre y mis hermanos. Pues todo el que cumpla la voluntad de mi Padre celestial, ése es mi hermano, mi hermana y mi madre».
«El que cumpla la voluntad de mi Padre celestial, ése es (...) mi madre»
P. Pere SUÑER i Puig SJ
(Barcelona, España)
Hoy, el Evangelio se nos presenta, de entrada, sorprendente: «¿Quién es mi madre?» (Mt 12,48), se pregunta Jesús. Parece que el Señor tenga una actitud despectiva hacia María. No es así. Lo que Jesús quiere dejar claro aquí es que ante sus ojos —¡ojos de Dios!— el valor decisivo de la persona no reside en el hecho de la carne y de la sangre, sino en la disposición espiritual de acogida de la voluntad de Dios: «Extendiendo su mano hacia sus discípulos, dijo: ‘Éstos son mi madre y mis hermanos. Pues todo el que cumpla la voluntad de mi Padre celestial, ése es mi hermano, mi hermana y mi madre’» (Mt 12,49-50). En aquel momento, la voluntad de Dios era que Él evangelizara a quienes le estaban escuchando y que éstos le escucharan. Eso pasaba por delante de cualquier otro valor, por entrañable que fuera. Para hacer la voluntad del Padre, Jesucristo había dejado a María y ahora estaba predicando lejos de casa.
Pero, ¿quién ha estado más dispuesto a realizar la voluntad de Dios que María? «He aquí la esclava del Señor; hágase en mí según tu palabra» (Lc 1,38). Por esto, san Agustín dice que María, primero acogió la palabra de Dios en el espíritu por la obediencia, y sólo después la concibió en el seno por la Encarnación.
Con otras palabras: Dios nos ama en la medida de nuestra santidad. María es santísima y, por tanto, es amadísima. Ahora bien, ser santos no es la causa de que Dios nos ame. Al revés, porque Él nos ama, nos hace santos. El primero en amar siempre es el Señor (cf. 1Jn 4,10). María nos lo enseña al decir: «Ha puesto los ojos en la humildad de su esclava» (Lc 1,48). A los ojos de Dios somos pequeños; pero Él quiere engrandecernos, santificarnos.
♣ 순례하는 사랑 덩어리 ♣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에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12,50)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최상의 법이며 이것이 바로 제자가 되고 예수님께 속하기 위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혈연관계, 가족이나 종족이라는 자연적 관계, 신분 등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일차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보다도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그분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특정한 계명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파견되신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니 좀더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것입니다(10,27). 그것은 또한 예수님에 의해서 해석된 사랑의 계명들이기도 합니다(5,18; 6,10; 12,50).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를 살아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사랑 덩어리가 되는 것, 곧 하느님의 자비가 이 세상과 이웃들 안에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행함으로써 종말론적인 가정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 순례의 호흡이자 목표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사랑의 순례자였습니다. 그는 한 인간에게서 형제를 발견하였고,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실 때 수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영혼이 녹아버렸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가난한 순례자가 되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가 페루지아에서 아씨시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속 눈물을 흘리자 같이 가던 순박한 사람이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그는 “형제여, 나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을 생각하면 이 세상 온 골짜기와 모든 거리를 나의 눈물로 채워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도 덩달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형제가 되신 주님의 육화의 겸손과 헤아릴 수 없는 수난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참을 수 없어 끝없는 순례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수난의 사랑이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고 해야겠지요. 사실 주님 친히 그를 사랑의 전달자로 쓰신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악기가 되어 죽을 때까지 영원한 사랑의 연주를 했던 그를 교회가 ‘제 2의 그리스도’(비오 11세)라 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은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과 정신과 혼을 다해 실행함으로써 진정한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그분의 어머니들이 됨을 상기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소명을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는 사랑 덩어리가 되어 끝없는 사랑의 순례를 시작할 때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형제자매가 되기 위하여...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예수님의 참 가족>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7-50)”
여기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밖에 와 있는 그 사람들은 내 어머니가 아니고, 내 형제들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참으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인지
이번 기회에 한 번 생각해 보자.” 라는 뜻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인지 한 번 생각해 보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은,
“(내 어머니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나의 참 가족이 된다.” 라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 가운데 첫 자리에 계신 분입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표현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가족이 될 수 없다.”가 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일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예수님의 가족이 된 사람입니다.
거꾸로 표현하면,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가족에 관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들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이런 말씀들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는 말씀을 합해서,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가족’에 관한 대원칙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태 19,6).”
이 말씀은 부부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한 몸이고,
자녀는 하느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육적인 가족’과 ‘영적인 가족’을 구분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또 ‘영적인 가족’만 중요하니까 ‘육적인 가족’은 버려도 된다는 것은
결코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가족이 함께 실행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족은 끝까지(하느님 나라까지) 함께 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나 어머니를(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가족’이 아니라 가족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가족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으로 가려고 할 때,
정말로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가르치고 설득하고 타일러서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는 가족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식구들이 가는 대로 따라간다면,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반대쪽으로 간다면, 즉 선을 버리고 악을 택한다면,
그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참 사랑은 함께 선을 추구합니다.
사랑의 열매는 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사랑의 열매가 악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집착일 뿐입니다.
(식구가 죄를 지을 때 그것을 막는 것이 사랑인가?
그 죄를 함께 짓는 것이 사랑인가? 를 생각하면, 답은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르반’이라는 전통을 핑계로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라는 계명을 안 지키는 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마르 7,9-13).
또 루카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순종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여기서 ‘순종’이라는 말은 단순히 ‘복종’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과 존경과 효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복음서 전체 내용을 볼 때, 예수님은 효자이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효도에 대해서 말할 때 자주 인용되는 예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제자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는 “내 어머니를 네가 어머니로 모셔다오.”입니다.
여기서 ‘그때부터’ 그 제자가 성모님을 모셨다는 말은,
‘그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직접 모셨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효도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에 포함됩니다.
불효를 하면서 참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당연히 효도를 잘할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
여러분이나 저나 할 것 없이 사람이면 누구나 부모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 가정에 속하게 된다.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하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터전이며,
가정 없이는 국가도 인류도 없다.
가정이 중요하고 소중한 이유는 그 가정을 이루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
즉 바로 나 자신을 포함한 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소중하면 너도 소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에
나의 가정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가정도 소중한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가정이 오늘날 소홀히 여겨지고, 사소한 이유로 쪼개지며,
서로 반목하고 불목하며, 경제적 파탄이나 병고나 사고로 말미암아
심적 물적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모든 가정이 오직 나의 가정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이기주의가
날로 팽배하고 있으며, 거치적거리고 빤하다거나 미래가 없다는 이유로
“가정 만들기”를 기피하는 개인주의나 독신주의가 증가일로에 있다는 현실 또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하고 모범적인 가정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성가정이 더욱 그리워지는가 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가정에 소속되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모두 함께 살아간다.
일찍 부모를 잃거나 피를 나눈 형제가 없는 혈혈단신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없어 봉양을 받지 못하는 독고의 노인이라 할지라도,
이 땅위에 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며,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누구나 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그 속에서 노인이 되어 간다.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람과 친분을 쌓으며, 이럴 줄 알았던 사람의 또 다른 저런 면을 체험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주며, 속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다가 삶의 실존과 진면목을 깨달을 때면 원하든 않든 하나씩 순서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뜻하지 않는 불의의 사고로 선뜻 가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은 실로 크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며, 다 똑같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재물이 좀 있고, 권력이 좀 있다하여,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하여 자신의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생명과 삶을 가볍게 여겨 무참히 짓밟고 앗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피붙이인 가족에게도 그럴 수 있을지 묻고 싶다.
사람의 기원을 따진다면 모든 사람은 다 같은 형제요 자매이며, 한 가족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즘은 ‘지구가족공동체’, 또는 ‘글로벌가족공동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때문에 건전한 재벌들이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고,
뜻있는 곳에 기부금을 내며, 재력이 없는 사람은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이루는 가정에서 태어나 30년 동안 가족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자기를 키워준 가족을 떠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린 것은 아니다.
그분은 더 큰 인류가족공동체를 원하셨으며,
나아가 하느님나라의 가족공동체를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우리들이 사는 이 땅위에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사방에 전하면서
그 나라의 가족이 될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모으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분은 특히 가난하고 아파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셨다.
어느 날 예수께서 카파르나움의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문 밖에 서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형제’라는 단어가 히브리 문화권에서 아주 폭넓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계혈족의 2촌만을 형제라 하지 않고
조부, 증조부, 고조부 등 아버지와 1촌의 관계를 갖는 모든 혈족을 관계상
‘형제’간이라 하는 경우와 같다.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와 보자고 하는 것일까?
오늘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 즉 공관복음 모두가
미소한 차이로 보도하고 있는 대목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루카 8,19-21)
마르코는 예수가 악령에 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아
예수를 붙잡기 위해서 왔다(마르 3,20-30)고 이유를 대고 있지만,
마태오와 루카는 그 이유를 의도적으로 삭제하였다.
찾아온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마태오와 루카는 이 대목을 두고
다른 목적을 가진 게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둘러 있던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절)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34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이 말씀이 허공을 가르며 외쳐지던 순간, 어머니와 형제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나마 문밖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했는데,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조상을 두고 함께 자란 형제들을 무시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어머니며 형제들이라니. 정말 예수는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수님의 본의(本意)는 그 다음 말씀에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5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셨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예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혈연적이고 세속적인 가족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족공동체를 택하신 것이다.
이 가족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듣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집합이 아니라,
예수님을 포함한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도 하느님을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점을 자주 강조하셨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자신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우리자신은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뜻을 좇아 행하신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을 뜻을 행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당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지적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피로 맺어지는 혈연은 한번으로 영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가족관계를 허물어버리시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설정하셨다.
그 소속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행하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인이 됩시다.
부제가 되면, 신학교에서 강론을 합니다.
저도 부제로 두 학기 살면서 4번 정도의 강론을 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강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에서는 나의 삶을 뻔히 알고 있는 동료 부제들과 후배 신학생들이 나의 강론을 듣고 있고,
46 예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와 말하고 싶어 했다. 47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말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 있고 선생님과 말하기를 원합니다.” 48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렇게 말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입니까? 그리고 누가 내 형제들입니까?” 49 그리고 예수께서는 당신 손을 제자들에게 내미시며 말씀하셨다. “보시오, 여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있습니다. 50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마태 12,46-50)
▲ <성가정>, 무리요(1660)
‘집’에 대해 전에 말하지 않았기에 어디서 일어난 사건인지 알기 어렵다. “밖”이란 단어는 예수의 가족과 예수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암시한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3,31-35에서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3,21)라는 난감한 부분을 마태오는 삭제해 버렸다. 가족의 행동에 대한 예수의 반응도 놀랍지만 제자들이 느닷없이 등장한 것이 특이하다. 제자들은 12,2 이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들과 함께 예수를 찾아다닌 것 같다. 마리아의 딸들, 즉 예수의 자매들은 당시 관습에 따라 집에 머문 듯하다. 예수의 부친 요셉은 일찍 사망했다는 전승이 있다. 만일 요셉이 살아있었다 하더라도 이 단락에 등장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세상 누구를 보고도 아버지라 부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한 분뿐이십니다”(마태 23,9)라는 말씀 때문이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이나 사제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여전히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 베드로나 바울도 그런 호칭을 누구에게 들어본 적 없다. 추기경, 주교, 몬시뇰, 더구나 신부(神父)라는 경망스런 호칭까지. 가톨릭교회에는 호칭이 많기도 하다.
손을 내미는 행동은 도움의 손길(마태 12,13), 축복(창세 48,14), 하느님의 심판(에제키엘서, 예레미야서) 등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낸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병자에게 향하는 예수(8,30),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내미는 예수의 손길(14,31) 같은 경우가 보인다.
제자들을 가리키는 예수의 손은 제자들이 예수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이다. 제자들은 세상 끝날까지 하느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다(마태 28,20). 제자는 유다교에서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를 믿는 공동체 구성원을 가리킨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가 제자들을 ‘형제, 자매, 어머니’라고 불렀다는 것이다(마태 25,40; 28,10). 신앙공동체는 한 가정이다.
누가 예수의 제자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50절에서 예수는 분명히 말한다. 하느님을 아는 것으로 부족하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부족하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교황도 신학자도 신자도 마찬가지다. 세례를 받거나 목사 안수를 받으면 마치 구원을 보장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천국행 티켓을 예약한 사람은 하늘 아래 아무도 없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자매들을 배려하여 예수는 자매라는 단어를 50절에 포함시켰다. 예수를 따라다닌 여자 제자들을 예수는 잊지 않은 것이다.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우리 시대 기준에서 그리 파격적으로 보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놀랄 만큼 개혁적이다. 당시 유다교에서 여성을 제자로 맞아들인 그룹은 오직 예수 운동뿐이다.
그러한 예수의 마음과 자세를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느끼고 있는가. 사회개혁에 앞장서는 일부 가톨릭 사제들이 신자를 대하는 태도나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서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미에서 해방신학에 적극 동조하는 사람이 아내에게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사례도 많다.
예수의 ‘육신의 가족’은 이스라엘이나 유다교 회당을 가리킨다는 잘못된 해설도 교회 역사에서 있었다. ‘예수와 제자는 한 가족’이라는 오늘 단락의 긍정적 의미보다 엉뚱하게도 부정적 해석에 치우치는 경우가 교회사에서 더 많았다. 영지주의자(그노시스주의), 마르치온 추종자 등은 오늘 단락을 근거로 예수는 육신의 부모 없이 탄생했다고 주장하였다. 가족 윤리를 무시하거나 마리아 신심을 비판하는 용도로 잘못 인용되기도 하였다. 오늘의 단락을 근거로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오늘 본문의 본래 의도와 거리가 먼 해석들이다. 가족 윤리를 강조하고 마리아 신심이 싹트기 시작한 초대교회에게 오늘의 단락은 적지 않게 당황스럽기는 하겠다.
내 대학 시절 수필가로 유명하던 모 교수는 어느 강연에서 47절 예수의 ‘형제’ 구절을 근거로 ‘마리아 평생 동정’을 반박하였다. 가톨릭교회의 마리아 동정 교리를 생물학적으로 그는 잘못 이해한 것이다. 48절 “누가 내 어머니입니까”라는 구절을 마리아에 대한 예수의 불손한 태도로 보고서 마리아 신심을 비난하던 사례도 개신교에 적지 않다. 오늘의 단락은 마리아 신심을 논하는 자리가 전혀 아니다. 예수의 가족에게 모욕을 주려는 단락도 아니다. (예수의 형제, 자매 문제는 마태오 복음서 13,53-58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예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의 가족이라는 말씀이 오늘 단락의 유일한 주제다. 우리는 예수의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가 될 기회와 가능성을 지닌 위대한 존재다. “여러분은 스승 소리를 듣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마태 23,8). 이 구절은 아쉽게도 가톨릭 교회론에서 외면당해 왔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세례 여부, 종교에 관계없이―은 모두 예수의 제자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