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5.10.12-14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3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한 삶의 태도 ♣
제자들 사이의 서열 다툼 문제는 공관복음에서 다섯 번 나옵니다. 오늘 복음은 단순히 서열시비를 언급하기보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누구인지를 다룹니다. 오늘 복음은 큰 사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작은 자는 쫓겨난다는 결론에 따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말해줍니다.
제자들이 누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18,3)고 하십니다. 당시 어린이들은 가난한 이들처럼 대접을 잘 받지 못했고 주장할 권리도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첫째 조건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어린이의 순진함과 천진난만함, 그리고 겸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써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곧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고쳐 가난한 자 되어, 새로운 눈으로 모든 사건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하늘 나라에서는 어린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 하십니다(18,4). ‘낮춘다’는 것은 비굴하고 수동적인 복종이나 거짓 겸손이 아니라, 하느님을 주인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을 그분의 피조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을 비워 낮추지 않고 하느님을 뵐 수 없고 영적 성숙에 이를 도리는 없지요.
자신을 낮추는 것은 내적 만족을 위한 폐쇄적인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낮추는 까닭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과 피조물들과의 거룩한 관계를 더 깊이 더 폭넓게 맺기 위해서입니다. 서둘러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장 보잘것없는 미소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다운 모습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써(18,5) 자신 전체를 하느님으로 채우고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한 사람이 곧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그런 자세와 마음의 지향을 지님으로써 모든 피조물을 동등한 존엄성을 지닌 형제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겠지요.
우리가 속한 다양한 공동체는 하늘 나라를 지향하고 하느님의 선을 추구하며 그분의 자비를 주고받으며 살아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특히 신앙공동체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고 오히려 우선선택해야 합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8,14).
하늘 나라를 반영해야 할 신앙 공동체에서도 가장 큰 사람의 기준은 신분이나 지위, 재물 등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보잘것없고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 사회적으로 힘없는 이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로 받아들이는 소명을 충실히 사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 하십니다. 사랑과 겸손이 많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인 셈입니다.
우리도 더불어 행복해지기 위해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먼저 남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부터 회개하고 새로워져야겠지요. 그리고 부유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아는 것이 많을수록 자신을 낮추어, 그 누구도 멸시하지 말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여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이요 우리가 지니고 살아가야 할 복음의 지침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옵션(option)이 아니라 기본(Basics)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업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설교"(18장),
"종말설교"(25장)로 엮었다는 것은 이미 누차 밝혀두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공동체설교의 첫 부분이다.
공동체설교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간에 지켜져야 할 규범을 담고 있어 "교회규범"이라고도 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작은 교회로 통하는 가정교회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으로 시작되는 공동체설교는 당장 예수님 주위의 제자들에게 향하기보다는
마태오복음공동체를 포함한 초대교회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태오의 편집의도가 많이 첨가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의 공동체설교는 세 가지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는 것"(1-5절)이고,
둘째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10절)이며,
셋째는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는 것이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제외된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는 규범도 있다.
첫 번째 규범의 도입부에 마태오는 제자들이 예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 하고 물었다고 하지만,
마르코는 제자들이 도상(途上)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고,
루카는 제자들이 서열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마르 9,33-34; 루카 9,46)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는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온정과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예수 어록집에서 따온 것이다.
루카는 이 비유와 함께 다른 비유들을 한데 모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루카 15장)
마태오복음 공동체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 교회공동체 안에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성직자와 수도자들 사이에 권위주의와 서열다툼이 팽배하고,
형제적 사랑이 부족하여 후임자가 전임자를 마구 흠집 내는 일도 많다.
"미사예물 단가가 비싸서 미사봉헌 한번 제대로 못하는" 가난하고 보잘것 없는 신자들은
소외 받고, 혼인법상 조당(阻 )에 처한 신자들을 마치 중죄인 취급하며,
조그만 잘못도 부풀려 입에 담아 회자하고, 나서서 단죄하기를 즐겨하는 신자들도 종종 있다.
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 만들고, 스스로도 죄지을 기회를 피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일도 있다.
오늘 예수께서 내리시는 공동체 내규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여러 개를 놓고 여건을 고려하여 마음가는 대로 고르는 선택사향이 아니라,
기본(basics)에 속한다는 것이다.
기본은 곧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신학과 영성 | 좋은 주교를 기억하는 것으론 부족하다[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 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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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하고 물었다. 2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이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입니다. 5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오 18,1-5) ‘그때에’는 앞뒤 단락을 매끄럽게 연결하여 설명할 때 마태오가 즐겨 쓰는 표현이다. 마태오 13,36; 24,3처럼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에게 질문한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9,33-37과 달리 마태오는 제자들 사이의 다툼을 삭제하였다. 메가스(megas, 큰, 위대한)는 서열과 지위에 대한 생각을 가리킨다. 한 나라에서 메가스는 임금과 신하를 가리킨다.(마카베오상 7,8) 마태오복음에서 제자들의 질문은 현재의 서열을 의식하는 마르코와 루가와 달리 다가오는 하늘나라에서 서열을 따지는 것 같다.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는 “여러분이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이란 응답을 내놓는다. ‘하늘나라에서’라는 일반적인 질문에 갑자기 질문하는 사람의 ‘현재’ 삶이 주제로 등장한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 권력서열을 물었는데 예수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을 먼저 제시하고 그 다음에 권력서열에 대해 답한다. 하늘나라에 들어갈지 여부도 모르는 판국에 어찌 하늘나라에서 서열을 묻느냐는 질책도 담겨 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선 애쓰라는 경고다. 어린이가 예수의 답변에 등장한다. ‘어린이’의 특징이 무엇인지 마태오가 밝히지 않아서 각종 해설이 역사에 나타났다. 어린이에 대한 해설자 개인과 시대의 생각이 해설에 투영되었다. 어린이에 대한 가부장사회의 교육이념이 해설자 자신도 모르게 해설에 드러났다. 어린이의 사실적 모습보다 어린이는 어떠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논의에 끼어들었다. 어린이에 대해 크게 보면 세 가지 시각의 해설이 보인다. 1. 어린이의 순진무구함 2. 하느님에 대한 신뢰 3, 권력을 버림 | |  | | | ▲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 15~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네(Giorgione)의 작품 | 순진함, 단순함, 죄없음 등이 어린이의 특징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괴테(Goethe)에게 어린이는 모든 미덕의 씨앗이다. 톨스토이(Tolstoi)는 소설 <부활>에서 마태오 18장을 인용하며 어린이를 이웃사랑의 인간적 근원이라고 칭송한다. 많은 해설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자녀를 길러본 적 없는 예수는 어린이의 실상을 제대로 모른 것 같다. 이 대목에서 나는 예수가 결혼하지 않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어린이가 부모를 믿고 의지하는 특징이 또한 언급되었다. 어린이가 부모를 믿듯이 제자들은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뜻이다.파이스(pais), 파이디온(paidion)이라는 단어는 어린이뿐 아니라 노예를 가리킨다. 유다 사회에서 어린이는 대부분 부정적인 뜻으로 인용되었다. 오늘 단락에서 어린이를 이해하는 열쇠는 4절의 타페이노스(tapeinos)라는 단어다. ‘작은, 낮은’을 뜻하는 이 단어는 권력 없음, 무의미함, 약함을 뜻한다. 유다교와 그리스 문화에서 그 단어가 겸손을 가리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 단어는 겸손을 뜻하기보다 낮은 지위를 가리킨다. 오늘 단락에서 어린이는 순진함이라는 윤리적 시각이나 하느님에 대한 신뢰라는 신앙적 시각보다 권력을 비움이란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성서해설이나 설교에서는 그런 점을 제대로 강조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어린이처럼 작고 돋보이지 않으며 힘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4절에서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권력을 비우라는 뜻이다. 어린이를 맞아들이듯 친절하게(마태오 18,5), 작은 자를 형제자매적으로 사랑하고(마태오 18,10-14), 무한한 용서(마태오 18,21-), 이웃사랑을 위한 재산포기(19,16-21)도 제시된다. 무엇보다도 상하관계의 권력의지를 포기하고(마태오 23,8-10) 봉사(마태오 20,26-28; 23,11)하라는 뜻이다. 어린이를 도우라는 말이 아니라 어린이처럼 되라는 말씀이다. 낮은 자를 도우라는 말이 아니라 낮은 자가 되라는 뜻이다. 오늘 단락을 읽고 가장 부끄러울 사람들이 누구일까. 가톨릭 주교들과 대형교회 목사들이다. 그들의 현재 모습은 오늘 단락의 어린이와 정면으로 어긋난다. 가톨릭 주교는 가톨릭교회에서 유일한 ‘갑‘이다. 주교는 예수의 가르침을 전하고 지키는 긍정적인 역할을 맡고 있지만, 모든 권력을 한손에 움켜쥐는 현재 주교제도는 성서정신과 거리가 멀다. 예수는 오늘 가톨릭의 주교제도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주교제도를 시대정신에 굴복시키자는 뜻이 아니라 성서정신에 비추어 보자는 뜻이다. 가톨릭교회 개혁의 핵심은 주교제도 개혁이다. 주교선출, 임기, 권한 분배 등에서 혁명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로메로 대주교, 김수환 추기경, 교황 프란치스코 등 훌륭한 주교를 기억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모범적인 개인의 사례로 제도의 어두움을 덮을 수는 없다. 엉터리 주교들 때문에 교회와 신자들과 국민들이 겪는 고통도 만만치 않다. 주교제도 자체를 성서정신에 맞추어 개혁해야 한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결단과 희생이 기대된다. ‘어린이’는 겸손이 아니라 권력포기를 상징한다. 개인적 차원에서 ‘갑’ 행세를 중단하는 것 뿐 아니라 구조적 차원에서 권력에 대한 가치전환을 뜻한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권력은 전혀 무의미하다. 가난한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이자 우리의 꿈이다. 가난에는 돈 뿐 아니라 권력의 포기도 포함된다. 그리스도교의 회개는 하느님에게 다가섬,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섬 을 동시에 포함한다. 하느님에게 다가서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서지 않았다면 아직 제대로 회개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서지 않았다면 아직 하느님에게 다가선 것도 아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다가서지만 아직 하느님에게 다가서지 않았다면 훌륭한 맑시스트이지만 아직 예수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권력을 움켜쥔 사람은 개인적 회개뿐 아니라 구조적 회개를 진지하게 고뇌해야 한다. 모두 낮추면 결국 서로 존중받게 되지만, 일부를 높이고 대부분을 낮추면 남는 것은 불신과 독재뿐이다. ‘교회안에 민주주의는 없다’라는 잘못된 생각에 의지하면 안 된다. 예수는 민주주위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하느님나라’라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이미 주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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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과 영성 | 교황도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다[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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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여러분은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오.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12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습니까? 13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입니다. 14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마태오 18,10-14) 10절과 14절의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앞뒤에서 병풍처럼 12-13절의 잃어버린 양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다. 잃어버린 양 이야기는 루가 15,4-7과 도마복음 107에도 전승되어 있다. 루가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을 강조한다면 마태오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모습을 강조한다. 양과 착한 목자 또는 악한 목자 이야기는 공동성서에 자주 보인다. 양은 이스라엘 백성(열왕기상 22,17; 이사야 13,14), 목자는 정치 지도자와 종교 지도자(이사야 44,28; 미가 5,4) 또는 하느님을 가리킨다.(창세기 48,15; 에제키엘 34,12; 시편 23,1-3) 양을 골짜기에 방치하고 자기 자신만 돌보는 악한 목자 이야기가 나오는 에제키엘 34,1-6이 오늘 단락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10절의 그리스어 카타프로네인(katapronein)은 ‘업신여기다, 돌보지 않다’는 뜻이다. 업신여기지 말라는 경고 뿐 아니라 돌보아야 한다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 악행을 저지른 것이 죄라면 선행을 게을리 하는 것도 죄다. 10절은 독자들을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입장에 놓고 말한다. 10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본다는 표현은 원래 왕궁에서 신하들이 임금을 알현하는 것을 종교적 언어로 도입한 것이다. 업신여기는 가해자에게 경고를, 피해자에게 위로를 전하는 10절 말씀이다. | |  | | | ▲ The Synaxis of the Twelve Apostles. Russian, 14th century, Moscow Museum | 사람마다 자신의 삶을 보호하는 수호천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유다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고대 페르샤, 로마, 그리스 문화에도 그런 민간 신앙은 이미 있었다. 특별한 개인에게 수호천사가 있다는 생각은 유다교에서 비교적 오래 되었다(창세기 24,7.20; 48,16; 시편 91,11-13) 모든 사람에게 수호천사가 하나씩 있다는 생각은 랍비 유다교에서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천사는 하느님을 직접 뵐 수 있는 고급 천사계급에 속하지 않고 지상에만 머문다고 여겨졌다. 10절의 천사는 이와 달리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고 소개되었다.10절은 그리스도교 천사학(天使學)의 고전적인 구절에 속하며 사람들이 개인적 수호천사를 믿게 만든 구절이다. 수호천사에 대한 믿음은 초대교회에 널리 퍼졌다. 그 믿음이 마태오 18,10, 사도행전 12,15에 의해 생긴 것은 아니고 그 구절들이 그 믿음을 재확인한 것이다. 수호천사는 세례 받은 후가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따라다닌다고 여겨졌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랍비들처럼 수호천사를 낮은 계급의 천사로 보았다. 루터(Luther)는 수호천사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지만 캘빈(Calvin)은 10절에서 수호천사의 존재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가톨릭 교리서는 천사의 존재, 수호천사의 존재를 믿을 교리로 가르치고 있다.(가톨릭 교리서 328, 336) 수호천사에 대한 설명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 역사의 희생자 곁에 가까이 계신다는 그 본래 메시지는 중요하다. 12절에 소개된 목자의 행동은 실제 목자들의 처신을 반영한 것이 아니다. 그 목자는 99마리 양을 먼저 우리에 모아두거나 다른 목자에게 부탁한 후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설 수도 있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보다 99마리 양이 덜 중요하지도 않다. 그러나 마태오는 그런 상세한 설명에 관심이 없다. 목자의 모습에서 신자들의 올바른 태도를 제시하고 목자 뒤에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기억하도록 촉구하려는 게 마태오의 의도다. 심판에서 어느 누구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신도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양과 착한 목자 이야기는 초대교회에 특히 풍부한 영향을 끼쳤다. 착한 목자는 구세주, 양은 전체 피조물, 99마리 양은 천사,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은 죄에 빠진 인간이라고 오리게네스(Origenes)는 해설하였다. 오늘 단락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대목(마태오18,21-22)을 마태오는 곧 소개한다. 그런데 오늘 단락에 이어질 마태오 18,17에는 형제들의 말을 듣지 않는 신자를 마치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대목이 나온다. 성서 구절 사이의 이런 긴장 관계를 마태오는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목자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흔히 성직자로 비유되고 있다. 성직자가 자동적으로 착한 목자라는 뜻은 아니다. 악한 성직자가 적지 않음을 역사와 현실이 보여준다. 또한 목자의 비유를 성직자에게 제한하여 사용할 필요도 없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곧 목자다. 그리스도교 안에 착한 목자도 있고 악한 목자도 있다. 착한 목자에게 교만함은 이미 없다. 남을 돕고도 우월감에 빠지지 않기는 어렵고, 나를 도와 준 사람을 남몰래 미워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래도 착한 목자가 되도록 애써야 하겠다. ‘나는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고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교황도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고 대형교회 목사나 가톨릭 주교도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있다. 잃어버린 양 처지에 착한 목자로 행세하는 종교인도 많다. 나를 구출해줄 목자가 내게 필요할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양은 신앙의 형제자매들에게 겸손되이 도움을 청해야 하겠다. 내가 내 인생의 스승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착한 목자인지 잃어버린 양인지 언제나 살펴야 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착한 목자이고 동시에 어느 정도 잃어버린 양이다. 그러니 10절 말씀 “보잘 것 없는 사람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을 매일 살펴야 한다. ‘을’을 무시하고 ‘감정 노동자’를 무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안타깝다. 교회 안에 그런 모습은 없는지 반성할 일이다. 교황이 ‘종들의 종’이듯, 성직자는 ‘을중의 을’이다. 그런데 마치 ‘갑중의 갑’으로 행세하는 철없는 성직자도 있나 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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