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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꼬마각시와 꼬마신랑

작성자박봉환|작성시간15.07.29|조회수42 목록 댓글 2

단편소설 / 꼬마각시와 꼬마신랑

 

(광복 70년사를 회상하며 이 글을 게시합니다)

삼복더위가 지난 지 10여 일, 장마가 끝났다는 기상청 발표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일 많은 비가 내리더니 모처럼 뜨거운 햇살이 이글거리며 온 산하(山河)에 찜통더위가 이어진다.

이 무더운 한여름 더위에도 등산복 차림을 한 고희(古稀)의 박 노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그가 즐겨 찾는 불곡산 정상을 향하여 황소걸음인 양 가파른 오솔길을 한 발, 한발 내디디며 올라가고 있었다. 해발 312.9m의 불곡산은 경기도 성남시, 용인시, 광주시의 삼각 경계지점에 자리 잡은 나지막한 산으로 항상 많은 등산객으로 북적거린다. 우거진 수목 사이로 등산로와 쉼터가 잘 갖추어져 있고, 각종 운동시설이 적재적소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과히 도심 속의 현대판 뒷동산이라 부를 만한 친절한 산이다.

산행을 나선 지 한 시간여, 박 노인은 정상 부근 가까이에 있는 마지막 쉼터에 도착했다. 소쩍새가 천연기념물 제324호라는 안내를 포함하여 뻐꾸기, 올빼미, 종다리 등 이 산에서 서식하는 날짐승 20여 종의 사진과 설명서가 질서 정연하게 진열된 이곳은 그가 으레 쉬어가는 쉼터다. 이 쉼터로부터 산 정상 전망대로 올라가는 왼쪽 길과 약수터로 내려가는 오른쪽 길이 갈린다. 박 노인은 늘 하던 대로 이곳에서 잠시 쉬며 산 정상으로 올라갈까, 계곡 쪽의 약수터로 내려갈까를 정하고자 손가락셈으로 점(占)을 치는 중이었다.

“어! 어! 보옹 더 억이! 아, 아니! 보옹 더억 씨?”

더듬더듬 떨리는 음성으로 누군가가 박 노인의 이름을 불렀다.

‘이 산중에서 누가 내 이름을 부르고 있지? 그것도 씨(氏)자를 붙여서?’

분명히 여자의 목소리였다.

‘아, 아냐. 내가 잘못 들었겠지. 지금 여기서 씨자를 붙여서 나를 부를 여자가 어디 있담!’

박 노인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도 혹시나 하여 이리저리 주변을 살폈다. 저쪽 편 의자에 앉아 있는 한 여자가 박 노인이 서 있는 쪽을 향하여 손짓해댄다. 언뜻 보아 자기 나이 또래였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왕방울만한 하얀 눈동자를 빙글빙글 굴려대고 있었다.

마치 놀란 토끼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녀는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을 날름거리고 있었지만, 너무도 뜻밖의 일에 당황하여서인지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순이! 순이를 여기서! 너 분명히 순이지? 순이 맞지?”

박 노인은 반가운 마음에 어린애 대하듯 그녀의 이름을 마구 불러댔다.

순이는 충청도 첩첩산중의 박자포실(朴自浦室)이라는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박자포실은 전형적인 오지(奧地)의 가난한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박자포실은 밤만 되면 언제나 칠흑 같은 암흑으로 빠져들었다. 석유가 귀하여 등잔불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밝혔다. 학생들은 해가 지기 전에 모든 숙제를 마쳐야만 했다. 농산물의 운반수단은 지게가 고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한복판에 파놓은 조그마한 우물에서 두레박 한두 개에 의지하여 식수를 해결해야 했다. 사람들 대부분이 구멍이 뻥뻥 뚫린 너덜 가지 옷을 입고 다녔고, 신발은 하나같이 다 해진 짚신을 신고 있었다.

30여 가구의 박자포실은 전형적인 박씨 일가의 씨족 마을로 박씨가 아닌 성을 가진 사람은 순이네와 용미 댁이라는 택호(宅號)를 가진 김 씨 집뿐이었다.

순이 아버지는 산지기(지방에 따라 도지기, 문지기 또는 능지기라 부르기도 한다)로 농사를 위한 약간의 전답(田畓)과 그의 가족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대여 받는 조건으로, 한식(寒食) 등 각종 종친회 행사의 준비는 물론 박 씨 일가의 모든 애·경사를 거드는 일종의 문중(門中) 머슴이었다.

순이 아범과 어멈은 마을 어귀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마님, 서방님, 또는 도련님이라 부르면서 허리를 연방 굽실거렸다. 순이 아범보다 10여 년 이상이나 나이가 적은 젊은이들이“어이, 동만이. 이리 좀 와봐”하고 부르면 그는“예, 서방님”또는“예, 도련님”하며 냉큼 그 젊은이에게 달려갔다. 어린아이들이 어른들의 흉내를 내느라 하릴없이“동만이, 동만이”하면서 그를 놀려댈 때면 그는 그저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며 자기가 하고 있던 일에만 열중했다.

이미 나라에서는 반상(양반과 상놈)제도가 없어진 지 오래지만, 보수적인 시골 농촌 씨족 마을에까지 미치진 못하였다. 순이 아범이 마을에서 쫓겨나지 않고 산지기로 생계를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순이 또한 산지기의 딸이라는 이유로 또래들로부터 많은 따돌림을 받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그녀는 또래들의 따돌림을 괘의치 않고 구김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산골 마을의 겨울은 어디나 할 것 없이 매섭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 내내 열심히 가꾸어 가을에 수확하고 나면, 어김없이 산과 들에는 눈보라가 내리치며 황량한 들판 위로 매서운 겨울이 찾아든다.

해방 전 1943년 겨울도 그랬다.

하얀 눈이 수북이 쌓인 어느 날, 마을 어귀의 한 모퉁이에서 순이는 두 손으로 눈물을 연방 닦아내며 훌쩍거리고 있었다. 평소의 밝고 명랑한 모습이 아니었다. 텃논 저쪽 논두렁에서 순이 아범이 다른 몇몇 사람들과 함께 양손을 눈 속에 처박고 엎드려서 벌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윗몸이 발가벗겨진 채 눈보라 속의 허허벌판에서 얼차려를 받는 남자들 앞에는 주재소에서 나온 순사 한 명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 들려 있는 묵직한 곤봉은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내려칠 기세였다.

면사무소 직원인 듯한 한 젊은이가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며 구장(里長)과 무엇인가를 귓속말로 속삭이다가 심사가 뒤틀린 듯 갑자기 허리를 꼿꼿이 세우면서 마을 사람들을 향하여 호통을 쳤다.

“어찌하여 당신들은 대 일본제국을 위한 공출(供出)을 지연시키고 있습니까?”

‘공출!’

매서운 한겨울을 굶주리며 근근이 버티어가는 시골 농민들에게는 겨울바람보다도 더 잔인한 단어였다. 글 한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무지렁이 산골 농민들에게는 우리나라를 강제 점령한 왜놈들이 통치자금과 태평양 전쟁을 위해 세금을 징수한다는 데에 대한 민족주의적 반감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다만, 가뜩이나 없는 살림에 해마다 나라에서 이런저런 명목으로 자꾸 뜯어가니, 어떻게든 안 뺏기려고 필사적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농민들은 가을걷이가 끝나면 보릿고개를 넘기면서 빌린 장례 빚(꾸어 온 곡식의 원리와 이자)을 무엇보다 먼저 갚아야 한다. 빚을 청산한 농민들은 먹을거리마저 부족한 곡식으로 닥쳐올 춘궁기(春窮期)를 걱정하며 어렵게 지내야 한다. 어려운 줄 빤히 알면서 공출이 며칠 늦어졌다고 처자식이 눈을 멀뚱멀뚱 뜨고 지켜보는 가운데 벌을 받고 있다는 현실이 차가운 눈보다도 더 시렸다. 그러나 그들이 가슴 가득 울분을 지니고 있어도 이에 저항 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농민들은 겨우내 쌓인 눈 무게에 꺾어지는 나뭇가지보다도 더 무기력한 존재였다.

“마님! 어떻게 힘 좀 써 주세요.”

옆에서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순이 어멈이 구장에게 달려들어 애원하자 벌을 받고 있던 남자들의 가족 모두가 종종걸음을 하며 우르르 구장 옆으로 모여들었다. 구장은 순사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에게 낮게 일러준다.

“계란 꾸러미하고 씨암탉 말고, 뭐 딴 방법이 있겠어?”

구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족들은 각자의 집으로 달려가 곱게 기른 씨암탉과 계란 꾸러미를 들고 왔다. 하얀 쌀밥에 닭고기 국으로 푸짐한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구장의 말에 일본 순사는 그제야 못 이긴 척 남자들을 얼차려에서 풀어주었다. 그는 한참 거드름을 피우더니 가을 수확 공출을 조속히 이행하라는 말을 남기고는 구장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버렸다.

안쓰럽게 지켜보고 있던 봉덕이가 냉큼 순이에게 다가서서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우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순이야, 울지 마. 이제 괜찮아.”

봉덕이와 순이는 싸리나무를 듬성듬성 얽어놓은 나지막한 담장 사이의 이웃으로 틈만 나면 서로 만나서 소꿉장난하는 단짝 친구였다.

어른들은 매일같이 동트기가 무섭게 일터로 나갔다. 어른들이 일터에서 돌아와서 저녁 밥상을 차려줄 때까지 온종일 함께 지냈다. 봉덕이와 순이에게 점심은 사치였다. 그저 부엌에 있는 누룽지나 꺼내 먹는 정도였다. 어른들이 없는 시골집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온종일을 버텨야 하는 이들에게는 서로의 존재가 너무나 소중했다.

순이 어멈은 마을의 각종 행사에 불려 다니면서 온갖 궂은일을 해준 후 조금씩 얻어온 부스러기 떡이나 과일 등 먹을거리가 있을 때면 항상 봉덕이를 먼저 챙겼다. 봉덕 어멈은 그러는 순이 어멈을 고맙게 생각하며 반상 관계를 따지지 않고 순이 어멈을 살갑게 대했다.

사실 봉덕이와 순이가 싸우지 않고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들의 이런 관계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어느덧 한 해가 지나고 여름이 왔다.

“오늘이 중복이라지?”

일터로 나가려고 연장을 챙기던 봉덕 어멈이 나지막한 싸리담장 너머로 순이 어멈을 보고 말을 건넸다.

“마님, 그러네요. 오늘이 중복이네요. 오늘은 좀 일찍 집으로 돌아와 개떡이라도 부쳐서 마님네 도련님도 드리고 우리 순이도 좀 먹여야 하겠네요.”

순이가 봉덕이를 격의 없이 대하는 것과는 달리 순이 어멈은 봉덕이를 도련님이라 부르며 항상 깍듯이 대했다. 봉덕 어멈과 순이 어멈은 일터로 나갔다.

중복 날답게 아침부터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며 온 산하(山河)를 지글지글 달구고 있었다. 이런 날씨면 봉덕이와 순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집 옆에 있는 도랑으로 달려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물속에 들어가 텀벙거리고 노는 것이 통상적인 하루의 일과였다. 나이 여섯 살이면 이제 어느 정도의 부끄러움도 있을 법하지만, 갓난아기 시절부터 항상 마주하며 허물없이 자라난 터라 그들은 거리낌 없이 옷을 훌훌 벗어 재꼈다.

“어! 뭐가 달렸네?”

“으응! 순이 너는 아무것도 없잖아!”

아무 생각 없이 주고받은 간단한 대화였지만, 그래도 둘은 이내 무엇인가 좀 겸연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여름 이맘때 멱(목욕)을 감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내 잊고, 물장구치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우리 엄마놀이 할까?”

“어떻게 하는 거야?”

“나는 엄마하고 너는 아빠하면 되지?”

“그래 그럼 한번 해보자!”

“이리 와, 엄마 아빠는 잘 때 서로 꼭 껴안고 자는 거야.”

순이가 봉덕이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봉덕이와 순이는 도랑 언덕에서 알몸인 채 서로 팔을 내밀어 팔베개 자세로 반듯하게 드러누워 잠자는 시늉을 했다.

“너와 나는 이제 엄마와 아빠가 된 거야. 어른들처럼 말이야. 알았지?”

“자, 그럼 약속해. 우리는 꼬마신랑 꼬마각시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서로 싸우지 않고 잘 살기로 말이야.”

순이는 봉덕이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오른손을 내밀어 새끼손가락을 쫑긋 폈다.

“그래!”

봉덕이도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펴서 순이의 손가락과 깍지를 꼈다. 그렇게 그들은 꼬마신랑과 꼬마각시로서 부부(夫婦)의 연(緣)을 맺었다.

시냇가 저쪽 풀숲으로 해가 기운다. 이 시간이면 부모가 밭에서 일어나 손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며 연장을 챙기고 있을 시간이다. 소꿉놀이도 하고, 노래도 부르다 지쳐 깜빡 잠들었던 봉덕이와 순이는 옷을 챙겨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길게 드리워진 둘의 그림자 사이로 뻐꾹새가 뻐꾹뻐꾹 사랑놀이를 하자며 쉴 새 없이 짝을 불러댔다.

집으로 돌아온 봉덕이와 순이는 누룽지를 야금야금 우물거리며 허기진 배를 채웠다. 마당에 펼쳐놓은 멍석에 누웠다. 봉덕이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쳐다보며 개울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우리가 맺은 인연(因緣)을 어른들이 알면 어쩌지?’

윗마을 모과나무에서‘서쪽서쪽’서쪽 새가 울어댔다.

해방된 지 반년쯤 지났을 무렵 봉덕이와 순이는 집으로부터 오 리쯤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나란히 입학했다. 봉덕이와 순이는‘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하면서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목이 터지라 하고 신나게 후창을 했다. 선생님은 한 손으로 더듬더듬 오르간을 치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건반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선생님의 손가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르간의 건반을 잘못 눌러 음정이 틀릴 때마다 선생님은 처음부터 다시 하기를 반복했다. 국어 시간에는 ‘가’ ‘갸’ ‘거’ ‘겨’ 하면서 한글을 열심히 읽고 썼다. 봉덕이와 순이는 방과 후에도 선배들의 교실에서 들려오는 오르간 소리에 매료되어 넋을 잃은 채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곤 했다.

수업이 끝난 후 어떤 선배 학생이 흥얼흥얼 일본 노래를 부르다가 선생님에게 불려가 벌을 받기도 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학생들은 일본노래와 일본말을 부르며 배웠었다. 둘은 6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함께 학교에 다녔다.

6학년 중순 무렵 봉덕이 부모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중학교로 진학시키고자 없는 살림에도 읍내에 나가 입시에 필요한 몇 권의 책을 사왔다. 봉덕이와 순이는 그 책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초등학교 졸업생 25명 전체에서 그 둘만이 중학교 입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순이 아범은 순이의 중학교 입학을 맘대로 허락할 수 없었다. 순이가 중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을 박 씨 종친회에서 알면 벼락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반인 자 신 들의 아이들도 중학교 시험에 떨어진 마당에 산지기의 자식이, 그것도 여자가 중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딱한 사정을 알게 된 학교 선생님 여섯 명 모두가 총동원되어 박 씨네 종친들의 허락을 받은 뒤에야 순이 아범은 순이의 중학교 입학을 허락했다.

봉덕이와 순이는 30리 길을 걸어서 통학했다.

그들이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여름이었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토요일이라 일찍 공부를 마친 봉덕이와 순이는 시내에서 만나 함께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서낭당 고갯마루를 지날 무렵 갑작스럽게 소나기가 내렸다. 순이의 옷이 흠뻑 젖었다. 하얀색 엷은 모시로 만든 순이의 교복 상의가 비에 젖으면서, 순이의 툭 불거진 젖가슴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순이의 아담한 젖가슴은 이미 여섯 살 때 본 그것이 아니었다. 봉덕이는 자신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고 있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순이도 순간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이내 당황해 하는 봉덕이를 바라보면서 묘한 장난기가 발동됐다.

‘볼 테면 보라지. 나의 꼬마신랑 봉덕이 아니던가!’

순이는 자신이 여자로서 성숙해가고 있다는 것을 봉덕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순진한 봉덕이는 못 볼 것을 본 것이 미안하고 부끄러운지 순이의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갑자기 부모님과 종친 어르신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얼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지금 이 상황을 어른들이 본다면 뭐라고 하실까?’

다행히 소나기가 이내 그쳤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따가운 햇볕이 다시 내리쬐면서 순이의 저고리가 금세 말랐다.

다음해 봉덕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순이는 가난한 가정형편에 더해 마을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순이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다. 어렸을 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부모와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을 애써 외면하면서 명랑하게 살아왔지만, 이제는‘상놈’집에서 태어난 자신이 싫어졌고, 마을 사람들에게 비굴하기만한 부모의 태도가 부끄러웠다.

순이는 부모와 일상생활에서 사사건건 대립 각을 세우며 잦은 말싸움을 벌였다. 아마도 중등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배웠던 신사상(新思想)과 자신이 처한 현실과의 괴리가 사춘기 과정의 열여섯 살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짐이었을 것이다. 가난했지만 평화로웠던 순이의 집이 분란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순이 아범은 순이의 마음을 달래려고 이웃마을 신자포실(申自浦室) 산지기였던 순자 네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순자 아범은 열심히 일해 모은 재산 쌀 다섯 섬(열 가마)을 읍내부근에 있는 김 씨 일가의 종친회에 주고 그 가문의 족보에 입적할 수 있었다 하더라. 말하자면 돈을 주고 양반 반열에 오른 것인데, 우리도 열심히 일해 재산을 모으면 비슷한 방법으로 상놈의 탈을 벗을 것이니 조금만 참고 견뎌보아라.”

하지만 이미 순이는 아버지가 불가능한 말을 한탄조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남을 나이였다.

몇 년 뒤 순이 아범이 뜻밖의 사고로 몸이 부실해져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산에서 그만 낙상을 하고 만 것이다. 순이네 는 박 씨 일가의 산지기 임무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를 당한 순이 네는 자포실(自浦室)을 떠나게 됐고, 서운한 감정에 다시는 그곳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순이는 그때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순이는 봉덕이가 입학했다는 대학을 찾아가 보았지만, 첫 학기가 지난 후 학비 조달이 어려워지자 휴학계를 내고 군대)에 입대한 봉덕이를 만날 수는 없었다.

‘봉덕아!’

‘나의 꼬마신랑 봉덕아!’

순이는 봉덕이가 다녔던 대학교 정문 앞에서 그리움에 젖어 그렇게 그의 이름을 불렀었다.

“어! 어! 보옹 더 억이! 아, 아니! 보옹 더억 씨?”

눈 깜작할 사이에 지나간 지난 55년을 뒤로하고 순이는 가슴 한구석에 간직해 두었던 그 이름을 지금 이곳 불곡산에서 부르는 것이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살 만은 하고?”

“나야 뭐, 그래 그쪽은 어떻게 지냈어? 정말로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

박 노인과 그녀는 두 손을 정답게 마주 잡고 반갑게 간단한 안부부터 주고받았다. 안부 인사를 마친 순이는 봉덕이와 뜻밖의 만남에 들떠 있던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 시키고 나서는 자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와 힘겨웠던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포실을 떠난 순이 네는 경상도 일대를 떠돌다가 어느 낯선 시골 마을에 정착했다. 순이 아범은 그 마을의 어느 지주 댁에서 머슴살이로 농사일을 했고, 순이 어멈도 그 집에 빌붙어 함께 기거하면서 식모살이 겸 농사일을 거들며 근근이 삶을 이어갔다. 밤낮없이 일한 그들 부부의 노동에 대한 대가는 한 해에 쌀 두 가마였다. 그들은 몇 년을 그렇게 고생스레 살았다. 그런데 한 불행은 다른 불행의 등에 올라타고 온다고 했던가? 그들에게 불행은 겹쳐서 찾아왔다. 순이 어멈이 허리를 다쳐 앓다가 장질부사에 걸려 죽은 것이다. 젊었을 때부터의 힘든 노동으로 망가진 몸이 전염병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서로 의지하고 살았던 순이 아범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서울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돼가고 있던 순이는 홀로 남은 아버지를 서울로 모시고 왔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연민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였다.

그러나 순이 아범은 낯선 도시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노인정에 다니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딱히 갈 곳이 없는 그는 동네 노인정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도 못 쓴다며 노인들로부터 놀림을 받곤 했다. 살아온 배경이 달라서인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순조롭지 못했다. 항상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해야 했던 그는 어느 날 억하심정으로 노인들에게 그가 산지기 시절에 경험했던 소 잡는 이야기를 했다. 소를 잡는다며 도끼로 소의 머리통을 내리쳤는데 그만 소의 급소를 잘못 맞추었고, 밧줄을 끊고 도망가는 놈을 붙잡아 오느라고 힘깨나 썼다고 다소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노인들이 자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리라 생각했던 것이 실수였다. 그들은 소백정(白丁)이라며 순이 아범을 더욱 놀리며 괴롭혔다. “ 예끼 이 백정 놈!”, “예끼 이 상 놈!”하며 여기저기에서 소리 소리를 지르는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손가락질을 해대면서 그의 머리를 쿡쿡 찔러대는 노인도 있었다.

순이 아범은 가슴속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었다. 순진하기 이를 데 없던 그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백정 놈이라고? 니들이 지게나 져봤어? 니들이‘깔(땔감)’이 무엇인지‘꼴(소먹이 풀)’이 무엇인지 알기나 해? 부모 잘 만나 빈둥빈둥 놀면서 배가 터지게 처먹고 산 놈들! 예끼, 이 몹쓸 놈들아! 다시 내가 여기에 오나 보아라!”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면서 노인정을 박차고 나온 순이 아범은 그 후 다시는 그 노인정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십자매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서울 에는 온돌방에서 새어 나오는 연탄가스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사람이 종종 발생하여 사회적으로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탄가스를 사전에 탐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십자매를 사들여 밤에는 방에서, 낮에는 마루에서 길렀다. 십자매는 사람보다 연탄가스에 더 예민하기 때문에 십자매가 죽지 않을 정도면 사람들은 안전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십자매가 종종 죽어나가곤 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는 것이 아니라 십자매의 먹이인 좁쌀을 빼앗으러 온 비둘기가 십자매의 목을 사정없이 쪼아 잔인스럽게 죽이는 것이었다.

누가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이라 했는가?

순이 아범은 강하게 태어난 비둘기가 연약한 십자매의 목을 물어뜯어서 죽이는 것처럼 부모 잘 만나 잘 먹고 잘사는 자들이 자신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생각에 더욱 분통을 삭일 수 없었다. 그의 착잡한 가슴은 날이 갈수록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마음을 달래는 길은 오직 술뿐이었다. 그는 담벼락에 기대어 반쯤 비어 있는 막걸리 병을 부둥켜안고 꾸벅꾸벅 졸곤 했다. 갈 곳이 없었다. 공원이나 시장 같은 곳을 나다니고 싶어도 집으로 오는 길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한 한을 새삼 되짚어 보며 답답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순이는 그런 아버지가 안타까웠다. 그녀는 아버지가 공허함을 달래길 바라며 아버지의 조끼 주머니에 항상 여유 있게 용돈을 넣어 드렸다. 그러나 그는 돈 쓰는 요령에 익숙하지 못했다. 오직 막걸리를 사서 주야장천 길가에 앉아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돈도 쓸 줄 모른다는 순이의 성화가 심해졌다.

그는 지나가는 엿장수를 따라다니며 술값은 얼마든지 있으니 함께 마시면서 놀자고 꼬여 댔다. 그러나 얼마 후 엿장수마저도 장사를 핑계로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군고구마 장수도,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면서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채소를 파는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그는 깔이나 꼴을 베면서 하루하루 지내던 시절의 농촌생활을 떠올려보았다. 외양간에 던져준 꼴을 우물거리며 씹어 먹는 누렁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갔다. 잔칫집에서 떡판을 칠 때 목을 축이라며 막걸리 한 사발과 시커먼 갓김치 한쪽을 손에 들려주시던 안방마님의 인정 어린 모습이 그의 뇌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고 했던가? 그는 서울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 서울은 더없이 외로운 곳이었다. 그는 서울의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막연한 외로움에 찌든 채 원인 미상의 병고를 치르다 죽고 말았다. 순이가 그를 서울에 모셔온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불쌍한 양반!”

순이의 눈시울이 붉어져 가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불쌍한 양반!”

순이는 소리 내어 흐느꼈다.

순이 아범의 죽음을 안타깝게 전해 듣고 있던 봉덕이도 착잡한 심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먼 산을 바라보고 있던 봉덕이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사람 좋기만 했던 순이 아범의 생전 모습이 영화 속의 필름처럼 스치며 지나갔다.

어린 시절, 들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마다 그는 “도련님, 오늘도 별일 없이 잘 놀았는지요? 우리 순이가 혹시라도 잘못하지는 않았는지요?”하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모습과, 학창시절 하교 중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마다 논에서 김을 매다가 언제나 상냥하고 친절한 말씨로 “도련님, 학교 갔다 오세요?” 하면서 반갑게 인사하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런 그의 외로운 죽음을 그의 딸 순이로 부터 전해 듣는 봉덕이의 가슴은 미어질 것만 같았다.

그의 삶 앞에는 언제나 매서운 비바람이 몰아치고 지나갔다. 그는 언제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고 있었다. 봉덕이와 순이가 헤어져 있던 한 갑자(甲子) 가까이의 세월 사이에 4·19혁명, 5·16혁명, 민주화과정 등을 거치면서 이제는 양반과 상놈이라는 관습은 사라졌다. 어찌 보면 순이 아범은 이 시대의 마지막 천민(賤民)이었던 셈이다.

“불쌍한 양반! 시대를 잘못 타고 나시어…….”

순이 아범의 죽음 앞에 그를 애도하는 사람은 오직 순이 한 사람뿐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하며 박 노인의 가슴은 더욱 아려왔다.

‘누가 사람 차이를 백지 한 장이라 했는가?’

조선왕조 마지막 임금이 죽었다며 거리마다 애도의 물결이 넘쳐났었다. 마지막 옹주가 죽었다며, 마지막 상궁이 죽었다며 온 나라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천민 관습의 마지막 역사인 순이 아범의 죽음은 그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순이 아범이 본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으리라.

“우리 자리를 좀 옮겨볼까?”

어색한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박 노인이 제안하였다.

“어디로?”

그녀가 눈물을 닦으며 반문했다.

“글쎄, 정상 전망대로 갈까? 계곡 약수터로 갈까?”

“아냐! 저어 쪽으로.”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왼쪽 길도 오른쪽 길도, 그리고 내려가는 길도 아닌 이상한 방향으로 손가락질을 해댔다.

박 노인은 의아한 마음에 되묻는다.

“그쪽은 길이 없잖아?”

“아냐, 그래도 그냥.”

그녀가 고집을 피웠다.

‘아무렴 어떤가? 가면 길인 것을!’

박 노인은 그녀를 따라 걸었다.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이라는 공자(公子)님 말씀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 똑같은 자리에 계속 머물러 묵상만 하는 석가모니는 또 무슨 길을 걷는 것일까? 공자, 석가, 예수의 길 말고 또 다른 길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제4의 길을 걸을 수만 있다면 그를 세계 4대 성현이라 부를 것인가? 55년 동안 순이와 나는 어째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일까?

박 노인이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박 노인의 손을 잡아당기며 잠깐 쉬어가기를 청했다. 저쪽 숲속에서 종달새가 지지배배 지저귄다. 박 자포실 개울에서 봉덕이와 순이가 꼬마신랑과 신부의 연을 맺으며 새끼손가락으로 깍지 낄 때 들었던 그 종달새의 지저귐 그대로다.

언제나 이맘때면 들판의 어른들이 손에 묻은 흙을 툭 툭 털어내고 연장을 챙겨서 마을로 돌아오는 때 아니던가. 저 멀리 등산객들이 서둘러 산에서 내려가고 있었다. 이 산에서 뻐꾹, 저 산에서 뻐꾹, 뻐꾹새가 장단을 맞춘다.

그녀는 봉덕이와 함께 자포실 초가집 멍석에서 누룽지로 허기진 배를 달래던 추억을 더듬으며 박 노인의 팔을 잡아당겨 팔베개한다. 예나 지금이나 더 적극적인 사람은 역시 순이, 그녀였다.

“아, 이러면…….”

봉덕이가 겸연쩍은 듯이 말을 건넸다.

“아무렴 어때, 고희(古稀)의 나를 지금 여자로 본다고? 아냐, 나는 지금 무쪽인 것을.”

박 노인의 팔을 베고 누운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봉제공장에 취직한 그녀는 쪽방 생활을 하며 죽기 살기로 일하고 알뜰하게 살았다. 월급을 저축해 어느 정도의 현금을 확보한 그녀는 그것을 잘 굴려 재산을 불려갔다.

당시 그녀가 살고 있었던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주변인 청량리 1동 61번지 일대의 나지막한 뒷동산에서는 많은 사람이 임자 없는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겠다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이에 뒤질세라 그녀도 삽을 들고 힘이 닿는 데까지 평탄(平坦)작업을 한 후, 말목을 박고 새끼줄을 늘여 놓고‘여기는 내 땅이니 아무도 손대지 말라’는 경계 표시를 했다.

그렇게 땅을 마련한 그녀는 매일 일과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곳으로 달려가 집을 짓고자 억척을 떨었다. 진흙을 뭉쳐서 벽을 쌓고, 평평한 돌을 구해다 온돌을 만들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의 집 짓는 모습을 살펴가며 수수깡을 얼기설기 엮어 진흙과 함께 지붕을 덮었다. 마분지나 신문지로 세 개의 방 모두를 깔끔하게 싸 발랐다. 직접 지은 흙집에 이사한 그녀는 두 개의 방은 월세를 주어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순이는 집을 짓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한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됐고 아이까지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사람의 본처가 그녀를 찾아온 것이다.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한바탕 난리를 겪은 후 그녀는 손도 못 쓰고 본처에게 남편과 자식을 뺏기고 말았다. 순이는 이웃 보기가 부끄러웠다. 창피한 생각에 집을 팔았다. 나라 땅(國有地)에 지은 집이기에 지상권(地上權)만 주장할 수 있었다. 순이의 집은 주변 시세의 반값 정도에 팔렸다. 순이는 다니던 봉제공장을 그만뒀다. 집의 매매 대금과 퇴직금 그리고 그동안 저축했던 돈을 모두 합쳐 동대문구 신설동에 기와집 한 채를 샀다.

그 당시 신설동은 막걸리 거리로 유명했다. 순이는 전국을 돌며 가장 값싼 싸라기 쌀을 사왔다. 약간의 누룩과 찐쌀을 섞고 이름 모를 술 약을 섞어 넣었다. 그리고 약간의 독한 소주를 붓고, 카바이드를 그 속에 집어넣었다. 카바이드 작용에 의해 술이 금방 부글부글 끓었다. 하룻밤 사이에 막걸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날이 밝으면 밤새 만든 술을 소매상에 팔았다. 당시 신설동 막걸리 집들은 모두 그런 방법으로 장사했다. 신설동 막걸리 밀거래 골목에서 술을 사다 먹은 사람들이 배탈이 나거나 머리가 아프다며 호소를 했지만, 신설동 밀주 제조업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바이드 술을 먹으면 뱃속에 있는 회충이 죽어 나온다는 솔깃한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술장사로 그녀는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정부의 일제 단속에 적발되어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를 서울로 모셔 오던 해에 그녀는 모든 장사를 접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등산객들이 모두 하산했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서쪽 새가‘서쪽서쪽’하며 서글프게 울어댔다. 팔베개를 하고 있던 그녀가 박 노인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우리가 헤어져 있던 55년 세월, 나는 줄곧 꿈을 꾸었지. 나의 꼬마신랑 봉덕이, 우리가 연을 맺던 자포실 개울가.”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박 노인도 그녀를 따라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앞 가득 고향 풍경이 피어올랐다.

“미안해, 순이. 정말로 미안해.”

“…….”

“…….”

“그런데 말이야, 중학교 때 그 서낭당 고갯마루 터에서 왜 나를…….”

그녀는 말을 얼버무리며 힐끗 웃었다.

“…….”

한동안 또 한 번의 침묵이 이어졌다.

“어머, 여태껏 내 말만 했네. 이제 그쪽 차례야. 그동안 어떻게 살았어?”

“으응, 나는 말이야. 근데 날이 캄캄해지고 있네. 우리 내려가면서 이야기하지.”

박 노인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컴컴한 밤길을 가르며 산에서 내려왔다. 어린 시절 꼬마였던 두 사람이 함께 부르던 노래가 입가에 맴돌았다. 왜정 말기 학교에 다니는 선배들이 가르쳐주던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뇌리에 아련히 떠올랐다. 해방 직후 한 손가락으로 오르간의 건반을 두들기며 애국가를 열심히 가르쳐주던 선생님이 느닷없이 빨간 완장을 팔에 두르고 마을 어귀에 나타나 ‘장백산 줄기줄기’하며 북한 공산당의 노래를 가르쳐 줄 때에도 봉덕이와 순이는 함께 노래를 배우면서 6·25 동란을 겪어야 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 일장기, 그리고 북한 공산당의 깃발이 번갈아가며 나부낄 때마다 봉덕이와 순이는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그것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었다. 어린 시절 그들은 언제나 함께였었다.

이제 꼬마신랑 봉덕이는 꼬마각시 순이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줄줄 풀어놓을 것이다.

“…….”

우리나라 마지막 천민(賤民)인 순이 아범의 명복을 빌어 드린다.

아울러 꼬마신랑과 꼬마각시의 여생에 만복(萬福)이 깃들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2007년 여름 牛步 / 朴鳳煥(한국문학방송 “태풍 불던 날 나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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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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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버들 | 작성시간 15.08.06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가슴아팠던 우리 조상들이 걸어온길을 훤히 들여다 본 것 같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를 본 듯 한 말이지요.
    세상은 늘~해피앤딩이 아닌 건가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박봉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8.06 답글 고맙습니다.
    특별히 이 소설의 진원지인 충북 일보 카페 회원님의 고운 답글이기에 더욱 고마운 마음 금치 못합니다.
    재삼 감사드립니다. 버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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