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전 대통령은 전봉준의 가까운 일가이다, 그리고 전두환 부친은 당대의 노름꾼이었다.”
(증언)
김천수 옹(1929년생, 현역 법무사)-거창 검사국 서기보, 대검찰청 과장 역임, 전두환 정권때 퇴임. 거창 중동(전두환 조부가 피신했던 곳)에 살던 부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김천수 옹에게 증언해준 2차 증언자)
유봉순 전 국회의원-일제시대 합천경찰서 순사, 거창경찰서 사찰주임(정보과장), 초대 거창 읍장, 합천 국회의원 역임
(고 유봉순의원의 증언-김천수 옹의 전언)
-전두환 조부 전영수는 전봉준과 일가이다. 촌수가 멀지 않는 일가다. 전두환 조부는 동학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령이 내려졌을 때 고향 정주에서 두 아들(전두환 큰아버지와 아버지) 등 15명을 데리고 탈출을 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장수와 함양 서상면의 육십령을 넘어 전(田)씨 집성촌으로 몸을 숨겼다. 이때 전씨 조부는 “원래 밭전자를 쓰는데 윗대에서 전라도로 가면서 완전전씨를 썼다”면서 둘러댔다고 한다. 그러다 그 이후에 들이닥친 다른 전씨들에 의해 온전전씨라는 사실을 밝혀져 이곳에 5개월정도 살다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지리산을 넘어 거창 중동(김천수 옹의 고향)에 두 번째 정착했다.
그러나 이때 동학잔당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개시돼 숨기는 사람은 처형한다는 말이 퍼지면서 함양과 거창일대에 숨어있던 전씨 일족 100여명은 불에 태워져 죽었다. 석유를 뿌려 죽였다다고 한다. 이는 거창 중동에 산 김천수옹의 부친이 자신에게 들려준 이야기라고 한다.
전두환 조부는 황급히 도주길에 올랐는데, 그때 도착한 곳이 합천 율곡면이다. 율곡은 지리산 자락이 끝난 지점으로 더 이상 관군이 추격할 수 없는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잇다.
-그런데 전두환 아버지 전상우의 그의 별명은 ‘전가노인’이다. 그는 합천과 거창 등 서부경남에서는 유명한 도박꾼이었다. 전가노인이 떴다하면 도박판이 벌어졌다. 풍채가 좋고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반면 전두환 큰아버지는 유학자로 이름을 얻을 정도로 점잖았다.
전상우가 도박판을 벌여 늘 순사가 따라다녔다. 한번은 하도 성가시게 구는 바람에 전상우가 순사를 구타해 이가 흔들렸다. 전상우는 아들 전두환(1931년생)을 데리고 황급하게 만주로 피신했다. 그때가 초등학교 3학년때였는데 5학년때 다시 돌아와 합천에서 5,6학년을 마쳤다. 그해 해방이 됐고 전두환아버지는 대구로 이사를 했다. 전두환은 만주로 간 것에 대해 너무 가난해 먹고살기 위해 만주로 갔다고 전한다. 그 뒤처리는 전두환 큰아버지가 수습 했다고 한다.
(지관 김광제의 추적 취재)
-전두환 일가가 전라도 태생이고 전봉준 후손이라는 것은 김광제가 지은 <이런 곳이 명당이다>에도 나온다. 김광제는 전두환 아버지의 묘소를 둘러보고 풍수적으로 쓴 지관이다. 그는 전두환의 출생이 부안이나 정읍출생이라는 말이 있어 부안공무원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고 한다.
전두환이 집권후 부안군청에 지시가 내려와 담당 공무원이 동원돼 전두환 증조부 전석주의 묘소를 찾은 적이 있다고 한다. 증조부 묘는 봉분이 있는 묘가 아니라 평장을 해서 봉분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묏자리를 잡은 사람이 문중의 한 사람인 전봉준(본관이 천안)이며 전봉준은 한학과 풍수에 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에 대해 아직 입을 다물고 있고 전두환과 사촌간인 전맹환은 이를 부인했다. 증조부 묘소는 합천에 있고 전씨 족보에도 전봉준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의 전봉준 성역화 사업)
-그러나 전두환측의 주장에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다.
전두환은 집권후 1983년에 동학혁명을 기리는 황토현기념관을 현충사 규모로 확장하라는 성역화 지시를 내렸다. 이는 전봉준장군 유적 정화사업이다. 전봉준의 동상을 5.6미터로 세웠다.
이것은 전두환이 전봉준의 후손이 아니면 과연 성역화 사업에 나설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갖게 한다.
전봉준은 아버지 전창혁은 잔반출신인데 학정에 항거해 민소를 제기하다 매질을 당해 결국 죽었다. 이를 계기로 동학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김천수옹의 증언)
-김천수옹의 증언을 보면 전두환은 처음부터 정치군인이었다. 처세에 밝았다. 그는 소위 임관 후인 1960년대에 합천 국회의원인 유봉순의원을 찾았다. 김천수옹이 당시 서울의 유의원 집에 갔다 거기서 전두환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군인이 있길래 유의원에게 저 군인이 누구냐고 묻자 “전가노인의 아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가노인이 바로 노름꾼으로 악명을 떨친 전두환의 아버지다. 승진을 위해 고향인 합천 국회의원을 찾은 것이다. 그 정도로 전두환은 정치적인 감각이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전두환이 전봉준의 후손이고 전라도 출신이 사실이라면 이야말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보듯이 광주를 피로 물들게 했다. 전봉준이 학정에 분기탱천해 반란을 일으켰다면 전두환은 권력야욕에 눈이 멀어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봉준과 전두환이 둘 다 전복의 피를 가졌지만 그 정신은 전혀 달랐다.
당시 전두환의 할아버지가 합천으로 피신하지 않았다면 이들 역시 동학잔당들의 처형때 화를 면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가문의 위기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전두환 일가는 멸문지화의 위기를 극적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고, 결국에는 비록 쿠데타이기는 하지만 최고권력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전두환 전대통령의 가족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족사와 너무 닮아있다. 박정희의 부친 박성빈은 1892년 경북 성주의 동학 접주로 활동했고 이 때문에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2007년 초에 공표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에 따라 혁명 참여자 신청과 유족회 가입을 했다고 한다.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나 더 흥미로운 사실은 김재규의 경북 선산의 조부가 천석꾼이었는데 박정희의 조부는 김재규 조부의 소작농이었다고 한다. 이때 신세 때문에 박정희가 김재규를 가까이 뒀다고 한다. 결국 신세를 못갚았던지 김재규는 박정희를 쐈다. 이 역시 김모씨의 전언이다.
그러고보면 전두환은 박정희의 가족사와 걸어간 길이 너무나 닮아있다. 백범 김구가 동학접주였다는 사실은 그의 정체성을 더해주지만 박정희나 전두환의 경우는 무엇이 정체성인가 혼란스럽다. 이들의 유전자에서는 대대로 ‘전복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 번 반복한다고 했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소극(笑劇)으로....” 예컨대 박정희가 비극이라면 전두환은 소극이 아닐 수 없다....
글쓰는 내친구가 쓴글을 퍼온 것인데 역사의 아이러니 같기도 하고 내고향도
합천이라서.... 그냥 올려봤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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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동원짱 작성시간 07.08.13 세상을 뒤엎을 수 있는 기백과 기질은 유전이 되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은 후천적으로 교육되거나 배워지는 것이겠지요. 전두환, 박정희.. 그들의 핏속에 열정과 기백은 있었지만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배워지고, 자신들의 선택의 몫이 아니었겠습니까.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은 나타나는 현상은 다를지라도 극의 본질은 같다는 것이겠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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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동원짱 작성시간 07.08.13 화려한휴가 봤는데 20년전 감동이랑 좀 틀리긴 합디다. 울분과 격정은 이제 사라진듯합니다.^^ 세월이 변한건지 제가 변한건지. 작품성의 측면에서만 봤을 때 잘 만든 영화같지는 않았습니다. 한편 다큐멘타리같은 영화라고나 할까...근데 이준기 고등학생 머리가 왜그리 긴지, 그리고 군데 군데 좀 어색한 장면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쨋든 이 한편의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시청되어 역사에 대한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던져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