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海城) 욕살(褥薩) 서우여(徐于餘)와 상장(上將) 서여(西余)와 은(殷) 기자(箕子) 서여(胥餘)
1. 해성 욕살 서우여(徐于餘)
서기전1286년에 21대 소태단군은 해성의 욕살 서우여에게 단군자리를 선양하려 하였으며, 이에 서우여를 살수(薩水)에 봉하여 섭주(攝主)로 하여 기수(奇首)라 불렀다.
우현왕 색불루가 소태단군에게 간하여 중지케 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또한 마한 아라사도 불가함을 주장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서기전1286년에 색불루가 부여에서 단군에 즉위하였으며, 이때 마한 아라사는 군사를 정돈하여 색불루의 군사와 해성에서 싸웠으나 패전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다. 소태단군은 어쩔 수 없이 옥책과 국보를 색불루에게 전하고 서우여를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다. 이에 서우여는 몰래 좌원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개천령이 토벌하러 갔으나 개천련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서기전1285년 색불루단군은 몸소 토벌하러 갔다가 서우여를 회유하는데 성공하여 번한으로 봉하였다.
서우여는 서기전1286년 이전에는 해성 욕살이었으며, 소태단군에 의하여 살수에 봉해져 섭주가 되어 기수라 불리었다. 서기전1286년에 색불루가 군사력으로 단군으로부터 강제로 선양받았고, 소태단군이 서우여를 기수에서 폐하였으며, 이에 서우여가 군사를 일으켜 색불루단군의 무리인 개천령과 싸워 개천령을 전사시켰는데, 색불루단군이 몸소 토벌하러 갔다가 회유하여 번한으로 삼은 것이다(서기전1285년).
2. 상장(上將) 서여(西余)
서기전1333년에 고등이 우사 소정을 소태단군에게 권하여 번한에 삼게 하였다. 서기전1291년에 은나라 무정이 군사를 일으키니 고등이 상장 서여와 함께 이를 격파하여 추격하여 색도에 이르러 병사를 보내어 불지르고 약탈한 뒤 돌아왔으며, 서여는 북박을 습격하여 격파하고 병사들을 탕지산(안시성)에 주둔케 하고서, 자객을 보내어 소정(小丁. 번한. 서기전1333~서기전1291?)을 죽이게 한 후, 무기와 갑옷들을 싣고 돌아왔다. 서기전1289년에 고등이 우현왕이 되었고 서기전1286년에 고등의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번한 소정이 서기전1291년에 서여의 자객에게 시해당한 후 서기전1286년까지 번한은 빈자리가 되었다.
*상장 서여(西余)는 곧 서우여(徐于餘)로서 서기전1291년경 해성 욕살이 된 후, 서기전1286년에 소태단군으로부터 살수에 봉해져 기수로 불리었으며, 서기전1286년에 색불루단군이 즉위한 후 서기전1285년에 번한에 봉해진 인물이 되는 것으로 강력히 추정된다. 이후 번한(번조선)을 기자조선(奇子朝鮮)이라고도 한다. 서기전323년 기자(箕子)의 먼 후손이 되는 기후(箕 言羽)가 번조선왕이 된 후에는 소위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할 수 있다.
*번한에 봉해진 소정은 고등이 권하여 소태단군이 아마도 못내 이기지 못하고 봉한 것이 되며, 이에 종실이 되는 상장 서여가 은나라를 정벌한 뒤 돌아오면서 번한 소정을 암살한 것이 된다.
*결국 빈자리가 되는 번한에 서여 자신이 봉해진 것이 된다.
3. 은나라 태사 기자(箕子) 서여(胥餘)
서기전1122년에 은나라가 망하였다, 3년 뒤 서기전1119년에 자서여(子胥餘)가 거처를 태항산맥의 서북 땅으로 피하였다.
서기전1114년에 기자(箕子)가 서화(西華)에 옮겨가 있으면서 인사를 받는 일도 사절하였다.
기자의 후손을 수유족이라고 하는데, 동쪽의 번한으로 이동하여 살게 되었으며, 기자의 일부 후손은 연나라와 조나라 땅 사이에 있었던 선우중산국(鮮于中山國)을 세웠던 것이 된다.
서기전323년 기자(箕子)의 먼 후손이 되는 기후(箕 言羽)가 번조선왕이 되어 서기전194년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길 때까지 존속하였다. 소위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할 수 있다.
===================================================================================
지금의 요동반도에 있던 해성(海城)의 욕살이었던 서우여(徐于餘)와 번한(番韓) 소정(小丁)을 자객을 보내 살해한 상장(上將) 서여(西余)는 동일인물이 된다. 단군세기와 마한세가에서는 서우여(徐于餘)라 적고 번한세가에서는 서여(西余)라고 적고 있다. 둘다 아마도 당시 소리나는 데로 적은 이두식 표기가 된다. 한편, 서여(胥餘)는 은나라 왕족의 태사(太師) 기자(箕子)이다. 기자(箕子)란 기 땅에 봉해진 자작이라는 말이며, 성씨가 자(子)씨로 자서여(子西餘)라 한다. 서우여(西余)와 서여(胥餘)는 다른 인물이다. 서우여는 서기전1291년에 상장(上將)으로서 은나라를 정벌하러 간 단군조선 진한 땅의 장수이며, 돌아오는 길에 번한이었던 소정(小丁)을 암살하였던 인물이고, 서기전1286년 당시에는 해성 욕살이었다. 해성은 살수 부근으로 장당경(지금의 심양)의 남쪽에 있는 성(城)이다. 살수는 지금의 요동반도 남해안으로 흐르는 강이며,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이 실제로 있었던 곳이다. 단군조선 시대에 이 살수의 상류에 배를 만들던 조선소를 설치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이상으로 종합하면,
서기전1333년에 개사원(개성, 개원, 장당경 일대) 욕살 고등은 소태단군에게 우사(雨師)였던 소정(小丁)을 번한(番韓) 에 봉할 것을 권하였고, 이때 소태단군은 마지못해 소정을 봉하였던 것이 된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단군 종실(宗室)의 상장(上將) 서여(西余)가 서기전1291년에 고등과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던 길에 탕지산에서 머물면서 자객을 보내 번한 소정을 암살하였던 것이고, 이후 서기전1286년까지 번한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이 된다.
서기전1289년에 개사원 욕살 고등은 소태단군에게 자신을 우현왕(右賢王)으로 봉해 줄 것을 청하였고, 소태단군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고등은 서기전1287년에 모반하여 개성(개사원, 개사성, 장당경 일대)에 웅거하여 항거하니 이에 마한 아라사가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러 갔다가 소태단군이 고등을 우현왕에 봉했다는 소문을 듣고 토벌을 멈추었다. 즉 소태단군은 서기전1287년에 고등을 우현왕에 봉했던 것이다.
서기전1286년에 우현왕 고등이 죽자 손자 색불루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다. 이해에 소태단군이 해성 욕살 서우여에게 선양하려 살수(薩水)의 땅에 봉하고 기수(奇首)라 불렀다. 그러나 우현왕 색불루가 이를 말렸으며, 마한 아라사도 이를 말렸으나, 소태단군은 듣지 않았다(이때 번한 자리는 비어 있었음). 이에 우현왕 색불루가 북부여의 땅 백악산아사달(녹산, 상춘)에서 즉위하니, 소태단군이 서우여를 폐하여 일반인이 되게 하였고, 옥책과 국보를 색불루에게 전하고는 아사달산에 은퇴하였다가 돌아가셨다. 이때 욕살들은 아무도 승복하지 않았고, 여원흥과 개천령이 색불루단군의 명을 받아 설득작업에 들어가 이에 따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마한 아라사는 군사를 이끌고 해성(海城)에서 색불루의 군사와 싸웠으나 패전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아마도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해성 욕살이었다가 살수의 기수가 되어 다시 일반인으로 폐하여졌던 서우여는 몰래 좌원(坐原)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개천령(蓋天齡)과 싸워 개천령을 전사시켰으며, 이에 색불루단군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러 갔다가 서우여를 번한에 봉한다 설득하여 이에 전쟁이 그치게 되었다.
이리하여 번한에는 서우여가 봉해졌고, 마한에는 여원흥이 봉해졌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