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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논쟁

폭력의 세기를 주먹으로 살다 간 깡패 김두한(1918~1972)

작성자天風道人|작성시간14.07.18|조회수2,620 목록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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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광장] 폭력의 세기를 주먹으로 살다 간 깡패 김두한(1918~1972)
http://www.gunchinews.com/news/userArticleView.html?idxno=1652

이후 일제 말기 조선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가는 위기 속에서 그는 주로 전과자들로 조직된 경성특별지원청년단을 결성한다. 그는 총독부 경무국장에게 자신이 김좌진의 아들임을 밝히고는 “청년들을 내게 맡겨주면 군사 훈련뿐 아니라 정신 훈련도 잘 시키겠다”고 언약했다.

 

   

이를 두고 김두한이 “거짓으로 경무국장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동아방송 대담에서 얘기한 바 있지만, 이를 읽는 독자는 감쪽같이 속아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총독부는 김두한이 조직한 1만여 명의 청년단원들에게 건물뿐만 아니라 피복, 교재, 음식물을 제공했고, 총독부 관리들과 일본인 장교들이 나와 군사교육을 시켜가며 성전(聖戰)에 대비했다. 얼마 뒤 ‘반도의용정신대’로 개칭한 이 단체는 일제에 몸바치기를 결의한 청년들의 폭력정치조직이었다.

 

김두한의 주장처럼 과연 이 정신대가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였을까?

 

만약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면, 조선 청년들에게 징병을 권유한 김성수, 이광수도 참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왜 나를 독립운동가로 대우해주지 않느냐고….

 

하야시는 한국건설업회 이사를 지내다가 1960년에는 대한건설협회 부회장을 지냈는데, 이른바 주먹과 건설업계의 고리는 이미 1948년 모든 청년단을 통합한 대한청년단 창설 때부터 시작되었다.

 

 

 

 

해방 후엔 백색 테러리스트로
해방 후 김두한은 좌익을 때려잡는 우익의 ‘백색 테러리스트’로 등장했다. 김두한은 대한민주청년동맹의 행동대 격인 감찰부장을 맡았는데, 대한민청은 서북청년단과 더불어 타공(打共) 전선의 제일선에 선 청년 전위대였다.

 

미군정과 경찰이 직접 나서지 못하고 은밀히 해야만 하는 일에는 꼭 청년단이 나섰고, 그 뒤에는 조병옥 경무부장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이 있었다. 청년단의 운영자금은 한민당 계열의 실업계 인사들이 후원했으며, 때로 강도와 강탈로 보충하기도 했다.

 

김두한의 타공(打共)활동 중에서도 가장 눈부신 활약은 1946년 9월에 일어난 총파업을 진압한 일이었다.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하자, 대한민청은 경찰과 함께 장총과 수류탄을 들고 현장인 용산공작창을 습격했다. 대한민청은 8시간에 걸친 ‘작전’ 끝에 2천 여명을 ‘포로’로 잡아 창고에다 쳐 넣은 다음, 전평 간부 8명을 생매장시켰다.

 

한국전쟁 뒤인 1954년 김두한은 대한노동총연합회 최고위원을 맡았다. 노동자 파업을 깨는데 살인도 마다하지 않던 자칭 ‘백색 테러리스트’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한다며 최고위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에 등을 돌리면서 김두한은 여당의 주먹패였던 이정재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의식 때문에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김두한이 이정재 패와 격돌한 것도 영역에 대한 패싸움일 뿐이었다.

 

1957년 야당의 장충단 집회에서 충돌,

 사건은 김종필이 김두한과 가까워지자, 그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김두한은 무죄 판결을 받고 출소했다.

 

정치인들은 김두한 같은 주먹패를 거느리면서 이들을 하나의 도구로 취급하고 주먹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산이다.

 

또한 폭력의 세계가 어찌 눈앞에 보이는 ‘주먹’에만 한정되겠는가?

 

국가는 경찰과 군대라는 폭력조직을 홀로 배타적으로 소유하면서, 구조적, 법적, 상징적 폭력을 우리 생활 곳곳에 뿌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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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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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天風道人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7.18 김두한은 항일 투사였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암흑가 두목 쌍칼은 만주로 떠나겠다는 김두한을 이렇게 설득하며 만류한다.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독립 운동이지만 종로의 상권을 지키는 것도 독립 운동이야. 우리는 거리의 독립군이 될 수 있어.” 신주백 성균관대 연구교수(한국사)는, 그러나 이같은 대의 명분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김두한은 조직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조선 상인들에게 기생했던 깡패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명동 상권을 장악했던 하야시패와의 대립 또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과장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 작성자天風道人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7.18 실제로 1963년 김두한이 펴낸 회고록 <피로 물든 건국전야>를 보면 조선인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야쿠자패와 맞섰다거나 하는 대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광복 이후 공산주의자를 섬멸하기 위해 자신이 어떻게 활약했는지를 상세하게 기술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김두한이 힘깨나 쓴다는 일본인을 주먹으로 제압한 것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이 대리 만족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야시와는 대립하기보다 공생하는 관계였다는 것이, 하야시패의 중간 보스였으며 훗날 김두한과도 절친한 사이였던 김동회씨의 증언이다.
  • 작성자天風道人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7.18 1999년 MBC가 방영한 <깡패와 건달로 본 한국 100년>에 출연한 김씨는, 이른바 장충단 대혈투 사건 이후 하야시가 김두한에게 자전거보관소 운영권을 넘겼고 그 뒤 두 사람이 호형호제하는 관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김두한 또한 회고록에서 하야시가 자신에게 매달 용돈 삼아 천 원씩 보내주었다고 기술했다. 측근의 회고에 따르면, 광복 직후 하야시는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김두한에게 남은 한국 돈 일체와 일본도 및 권총 한 자루를 선물로 주고 갔다고 한다. 이 시기 박헌영에게 설득당해 조선공산당 전위대장을 맡았던 김두한은 하야시가 준 이 무기들로 무장하고 박흥식·백낙성 등 조선인 유지들의 집을 털러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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