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병사나 포졸들이 항상 들고 있는 무기는 창입니다. 그 중 당파로 알려진 삼지창류의 창은 방송국을 가리지 않고-영화도 마찬가지- 반드시 등장하는 친근한(?)한 무기입니다.
(조선 시대 대표(?) 창 당파)
하지만 이 설정은 대표적인 고증 오류의 하나로 지적 받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당파의 도입시기는 임진왜란 중 명군으로부터입니다. 당파라는 무기 자체의 기원은 불분명하나 당파가 조선에 도입된 계기는 항왜명장인 척계광의 '절강병법'이 도입되면서부터입니다. 절강병법 원앙진에서 당파수는 2인으로 당파를 이용하여 화전을 발사하거나 후미에서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물론 조선 전기에도 당파와 유사한 형태의 삼지창 혹은 극이 존재했습니다.
(세종 실록 오례의 군례서례에 등장하는 극)
세종실록 오례 군례서례에 나오는 조선 초기 극의 모습입니다. 극은 삼국연의에서 여포의 창인 '방천화극'처럼 일반 창에 좌우로 가지가 있는 창을 뜻합니다. 가지가 하나인 경우도 있고(방천화극) 삼지창과 당파처럼 두 개인 경우도 있습니다. 당파가 이 극에서 유래된 무기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습니다. 극은 고대 전차전 때부터 이용되었으나 후대로 올수록 실전용이라기 보다는 크기를 대형화시키고 깃발을 달아서 의장용의 성격이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실록 등을 보면 삼지창과 당파가 따로 언급되는 것으로 봐서 당파 외에 삼지창이 따로 존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조선 전기에 병사들이 당파를 들고 쫄래쫄래 뛰어다니는 모습은 '일반적'이라고 보기는 힘든 상황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당파가 정식으로 수입된 임진왜란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조선 후기에도 당파의 보유량이 극히 미미하다라는 점입니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군영 중 하나였던 훈련도감의 군기물 중 당파는 고작 28자루 밖에 없는 걸로 나옵니다. 다른 무기와 비교하면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조총은 8,239자루, 환도(環刀) 7,219자루, 활 10,558장(張)을 보유하고 있던 훈련도감에서 당파는 고작 28자루였으니 그 비율이 얼마나 형편 없었던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훈련도감 뿐만 아니라 다른 군영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에 그려진 궁중행사 그림이라던가 각종 행사 그림에서 당파를 든 병사는 찾기 힘들 정도로 당파는 보편적인 무기로 보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니 조선군 = 당파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상인 것이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조선 시대 극이나 당파 외에 다른 창은 없었을까? 물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전기 창 유물이나 관련 기록이 극히 드물어서 정확히 어떤 종류의 창이 있었고 그 중 실전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창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려져 있지 못한 상황입니다.
(세종실록 오례의 군례서례에 나오는 창)
그 중 실록에 등장하는 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창의 모습과 거의 동일합니다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창)
이 외에도 이 외에도 국조오례의에 나오는 창 그림을 통해 조선 전기 창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작년 동래성 발굴 현장에서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군 창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어 조선 전기 창 유물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적이 있었습니다.
(동래성에서 발굴된 창 유물)
창자루의 길이가 3m 정도의 창으로 조선 전기 창 규격과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원형이 거의 그대로 발굴되어 깜짝 놀라게 한 유물입니다. 일반적으로 조선 전기 창에 대한 선입관 중 하나가 창이 매우 짧았다라는 것인데 이러한 견해는 임진왜란 직전 조선을 방문한 일본 사신 귤강광의 발언 때문에 더욱 굳어진 것인데... 사실 당시 일본의 창이 너무 길었던 탓(약 6m정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외에도 기병용 기창(騎槍)이 있었으며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 절강병법의 도입으로 인해 장창, 낭선, 죽장창, 기창(旗槍), 삼지창, 요구창, 왜장창 등 다양한 창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조선군은 조총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져 상대적으로 창의 중요성이 덜하게 되었습니다.
주화 속에 나타나는 인물은 1648년 폴란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시작한 우크라이나 카자흐의 흐멜니츠키(1595~1657)이다. 1654년에 우크라이나 카자흐는 신흥 정교국 모스크바와 페레야슬라프협정을 체결하여 폴란드에 대항했다. 그러나 1667년에 폴란드와 모스크바는 안드르소보강화조약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그 결과 드네프르 강 오른편은 폴란드령, 왼편(단, 키예프를 포함)은 러시아령이 되었다.
뒷면에서는 삼지창 문양이 매우 인상적인데, 다른 우크라이나 주화는 물론 우크라이나의 국가 문장으로도 사용되는 문양이라고 한다.
ТРИЗУБ [뜨르이주프: trident(삼지창)]라고 불리는 삼지창 문양은 우크라이나의 국가 상징이다. 상징의 역사는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키예프 볼로드이므이르(블라지미르) 대공 시대에 사용한 처음 슬라브 동전의 일부에 ТРИЗУБ가 새겨져 있으며, 또한 귀족들의 무덤과 건물의 입구 조각등 그 당시 이후의 다른 고고학적 유물들에도 그려져 있다고 한다.
상징의 정확한 기원은 알려진 바 없지만, 몇몇 이론이 존재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바다의 신 '넵튠'(그리스 신화의 포세이돈)의 삼지창에서 전통적 신화상징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의 삼지창디자인은 끼릴 문자 В, Я와 О에 기초했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글자는 고대 키예프 루시의 세명의 유명한 통치자, - 즉 볼로드이므이르(Volodymyr Володимир) 대공, 야로슬라브(Yaroslav Ярослав) 왕과 올가(Olha Олга) 여왕을 상징한다.
이 이론의 다른 이론(異論)은 '자유'를 의미하는 Volya, ВОЛЯ를 디자인한 것이라고 한다. 또는 단순히 988년 기독교로 개종한 키예프 루시의 지배자 볼로드이므이르(Володимир) 대공의 머릿글자인 В와 В를 뒤집은 이미지에서 나왔다고 한다.
뭐, 학자들의 주장이니 정확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바다의 신 넵튠의 삼지창과 관련지어 이야기를 이끌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넵튠의 삼지창일 필요는 없다. 다만 문자의 조합으로서의 삼지창이 아닌 순수한 의미의 삼지창 문양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 생각이다.
사실 이러한 삼지창 문양은 반드시 우크라이나 주화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와 같이 세련되지는 않았다 해도, 영국 근대 주화 속의 여신의 손에 들린 삼지창에서부터 시작하여 고대인도 주화와 간혹 옥션 등에서 볼 수 있는 티벳의 주화 속에서도 삼지창 문양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만약 우크라이나의 삼지창을 이러한 삼지창들의 두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인물들 이름 또는 슬로건의 이니셜 조합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진다.
반드시 지리적으로 먼 곳의 삼지창 문양과의 연관성을 염두에지 않는다 해도 우크라이나에서 삼지창 문양이 그 자체로서 오랜 세월 의미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있다.
다음에 나오는 고대 유물에서 발견되는 삼지창 문양들이다.
1. 청동기 시대 그리스 토기의 그림
2. 히타이트
3. 바빌로니아
4. 러시아의 류리코비치 문장
5. 기원전 1000년 경 북카프카스 문양
6. 기원전 2000년 경 중앙 카프카스
여기서 카프카스는 러시아 남부의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지역으로 우크라이나와 매우 인접지역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우크라이나의 문장에서 나타나는 이 문양이 기원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데도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제 이 문양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할 텐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론이 있다. 첫 번째는 오래된 여신의 기호에 나타나는 비 기호로 ‘물, 비, 생명나무’와 같은 여신의 삼위일체 관념과 결부된 기호라는 것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순히 삼지창 기호가 새의 발자국 모양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새를 숭배하는 지역에서는 샤먼들을 나타내는 그림에서 새의 부리와 같은 뾰족한 모자를 쓰거나 세 갈래로 된 새 모양의 발을 묘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좀 더 설득력 있는 가설은 여신의 삼위일체 관념과 결부된 기호라는 것이다. 남슬라브족의 신화에 등장하는 빌라 Vila라 불리는 신화적 여성은 동슬라브족의 루살카 Rusalka (인어)와 동일시되던 신화적 인물이다.
그런데 세 잎 클로버와 같은 세 잎 기호는 ‘Vila의 기호’ 또는 곧바로 빌라라고 불리는데, 이 기호는 후에 러시아의 vily ‘갈퀴’ 및 vilka '포크‘와 닮았다.
이미 영국 주화 속에서 나타나는 여신의 손에 들린 삼지창에 대해 언급했듯이, 영어의 포크 Fork도 그 기원이 신화적 관념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포크는 하늘여신이 아니라 지신의 형상과 관련된다. 뇌신에게 포르쿠스 Forcus라는 이름이 있었고, 라틴어의 Furca는 두개의 뿔을 연상시키는 ‘두 갈래의 포크’를 의미했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부조화는 애초에 여신의 상징물이었던 삼지창이 뇌신의 상징으로 바뀌어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삼지창 사람들에게 중요한 기호로 자리하는데 큰 역할을 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초기 농경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그리스의 페르세포네의 신화에 따르면 지옥에 잡혀간 그녀는 1년의 1/3은 지하에서 2/3은 지상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것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초기 농경 시대인들이 있어 1년의 절기를 셋으로 나누었다는 것이다.
후에 기독교가 들어선 후에도 삼위일체의 의미가 주목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기독교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성삼위일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관념에도 역시 삼지창 기호가 발생하게 된 모티브가 영향을 줬겠지만 말이다.
답댓글작성자홍진영
작성자 본인 여부작성자|작성시간08.09.05
돈이 전무하니...사업을 쪼그만 준비할 사전답사 겸...여행입니다...네.외몽골은 러시아 알파벳을 빌려...철저히 몽골어만 쓰며...위그루문자도 십여년 전부터 가르칩니다...사실 내몽골인들도 몽골어를 애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내몽골방송이 더 몽골전통홍보에 난리더군여,,,문자는 한자와 위그루문자(옛 몽골어)를 병행하나...내몽골도 말은 철저히 몽골어를 쓰며...오히려 외몽골 말보다...우리말과 더 어감이 통합니다...현 지나족 정부는...이를 죽일까 달랠까 고심중일 겁니다...현 한국인들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라 하겠습니다.
답댓글작성자홍진영
작성자 본인 여부작성자|작성시간08.09.05
현 외몽골인들은...원래 내몽골이 진짜 몽골인들이며...지나족들이 자꾸 쑤시고 들어 오면서 혈통과 문화가 섞여 내몽골인들이 변질된다고 걱정들입니다...사실 외몽골도 위정자들의 비리로...지나인들이 작전적인 투자를 엄청나게 하여서...지나에게 몽골이 넘어가니...차라리 미국이나 한국에게 줘라"는...농담까지 있습니다.
작성자지명선
|작성시간08.09.05
잘 알겠읍니다. 몽골은 한국같습니다. 왠지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왜 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