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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제4편 - 자금쇄술(紫禁瑣述)

작성자김홍필|작성시간11.02.18|조회수244 목록 댓글 5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4

 

자금쇄술(紫禁瑣述)

 

1855(철종 6) 1222

 

 

<번역문(飜譯文)>

 

전략(前略)

 

() 주부(主簿)가 또 묻기를,

“영고탑(寧古塔)은 만주(滿洲)에 소속(所屬)됐는데 폐사군(廢四郡)과 서로 연접(連接)되었습니까?”하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對答)하였다.

 

“그렇다. 영고탑(寧古塔)은 바로 옛날 숙신씨(蕭愼氏)의 유허(遺墟)인데, () 나라와 당() 나라 때 와서는 동북(東北) 지방(地方)에 강국(强國)과 웅부(雄部)가 없고, 오직 우리나라 한 지역(地域)만이 동()쪽 땅의 형승(形勝)을 독차지하게 되니 이것이 수()ㆍ당() 때에 와서 조선(朝鮮)을 공격(攻擊)할 때마다()을 치는 큰 역사[征東大役]’라 하게 된 원인(原因)이다.

 

그때에는 요동(遼東)의 동()ㆍ서(西)가 태반(太半)이 우리 땅이었고, () 안팎의 여러 종족(種族)이 우리에게 복속(服屬)하는 자가 많았더니, 한번 여진(女眞)의 만() ()이나 되는 종족(種族)이 경박호[鏡泊湖: 경파호(鏡波湖)로 영고탑(寧古塔)에 있음]를 중심(中心)으로 일어나면서부터 점점(漸漸) 번성(繁盛)하고 커져서 송() 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중하(中夏)에 들어가 임금이 되니, 이를 금() 나라라 한다.

 

그들이 원() 나라 사람들에게 쫓겨 동()쪽으로 오게 되자, 그 부락(部落)이 두만(豆滿)ㆍ압록(鴨綠) 두 강()의 서(西)쪽과 북()쪽에 흩어져 살았는데, 그들을 혹은 야인(野人)이라 하고 혹은 번호(藩胡)라고도 하였으며 우리나라를 침범(侵犯)하던 중에 북()쪽은 이탕개(梨湯介, 다른 기록에는로 되어 있음), (西)쪽은 이만주(李滿住)가 그 큰 자였고, 이때부터는 우리나라 국경(國境)이 편안(便安)하지 못하였다.

 

대저(大抵) 여진(女眞)의 나머지 부족(部族) 중에 숙여진(熟女眞)ㆍ생여진(生女眞)의 구별이 있었는데, () 나라 만력(萬曆) 이후에 와서는 생여진(生女眞) 동산(董山) 일파(一派)가 갑자기 건주위(建州衛)에서 커져서 모린위(毛麟衛)ㆍ좌위(左衛)ㆍ우위(右衛) 등의 종족(種族)을 통속(統屬)하였다.

 

그런데 폐사군(廢四郡)이 그들과 아주 가까웠으므로 그의 폐해(弊害)를 가장 많이 받았으니, 이것이 4(四郡)이 폐()하게 된 원인(原因)이었다.

 

홍타시() 이후(以後)에 와서는 병력(兵力)이 더욱 날로 강성(强盛)하여져서 그 세력(勢力)으로 북상(北上)하여서 개원(開元)으로부터 심양(瀋陽)을 평정(平定)하고 동()쪽으로 내려와 요양(遼陽)을 차지하였다.

그러자 심양(瀋陽)을 성경(盛京)이라 하고, 요양(遼陽)을 동경(東京)이라 하고 건주(建州)를 흥경(興京)이라 하여 영고탑(寧古塔) (西)쪽을 모두 점령(占領)하여 소유(所有)로 하였다.

그리고 크고 작은 여러 성책(城柵)들 사이에는 싸움을 거듭하더니, 숭정(崇禎) 말년(末年)에는 연경(燕京)에 들어가 임금이 되었다.

 

건주(建州)는 곧 능묘(陵墓)가 있는 곳이고, 노성(老城)은 곧 도읍(都邑)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제도(制度)와 설치(設置)가 성경(盛京)과 다를 것이 없다.

 

황도주(黃道周)<박물전휘(博物典彙)> ‘건주고(建州攷)’를 상고(詳考)해 보니, “건주(建州)는 즉() () 나라의 별부(別部)였는데 원() 나라는 만호부(萬戶府)를 설치(設置)했었고, () 나라는 나누어 셋을 만들어 건주(建州)ㆍ해서(海西)ㆍ야인(野人)이라 했다.

 

건주(建州)가 그 중에 으뜸으로 땅이 가장 요해처(要害處)였는데, 영락(永樂) 원년(元年)에 건주위(建州衛)를 설치(設置)하여 해마다 10월에 입공(入貢)케 하니, 이것이 건주(建州)가 크게 된 시초(始初)였다.

 

그리고 요야(遼野) ()쪽에 3장군(三將軍)을 열치(列置)하였는데, 그 하나는 봉천(奉天) 등처(等處)의 지방(地方)을 진수(鎭守)하되 본부(本部)를 심양(瀋陽)에 두었고, 하나는 영고탑(寧古塔) 등처(等處) 지방(地方)을 진수(鎭守)하되 본부(本部)를 항창(航艙)에 두었으며, 하나는 흑룡강(黑龍江) 등처(等處)의 지방(地方)을 진수(鎭守)하되 본부(本部)를 애호성(艾滸城)에 두니 그 관질(官秩)은 모두 1품직(品職)으로 각각(各各) 만주(滿洲)를 통치(統治)하게 하였다.  

 

강희() 말년(末年)에는 가장 큰 걱정거리가 흑룡강(黑龍江) 이북(以北)의 몽고(蒙古)였기 때문에 백도납장군(白度納將軍)을 더 설치(設置)했다고 하나, 그 본부(本部)가 있었던 지방(地方)은 자세(仔細)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흑룡(黑龍)ㆍ혼동(混同) 사이에 있었을 듯하다.

 

그리고 몽고(蒙古) 48() 중에 동북방(東北方)의 여러 종족(種族)이 가장 강성(强盛)하였다.

대비달자(大鼻獺子)도 역시(亦是) 흑룡강(黑龍江) ()쪽에 있어서()으로 흑룡강(黑龍江)으로부터 개원(開元) 이북(以北)까지 이르렀고, 연변(沿邊)이 진() 나라 장성(長城) 밖에 와서는 북()으로, (西)로 꾸불꾸불 뻗쳐서 한() 나라 서역(西域) 우진() 지방(地方)에까지 이르러 이것이 모두 몽고(蒙古)의 경계(境界)여서 그 넓이가 중원(中原)에 비()하여 여러 배()나 되었다.

 

상고(上古) 시대(時代)에는 판도(版圖)상에 실리지도 않았으며 황막(荒邈)한 사막(砂漠)일 뿐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는 없었는데, ()ㆍ송() 이후(以後)에 와서야 땅이 더욱 넓혀지고 사람이 더욱 번창(繁昌)하여 지금은 46()나 된다.

그들은 서로 웅장(雄長)이라 하여 각각 한 모퉁이의 임금이 되어 동()ㆍ서(西)ㆍ남()ㆍ북() 황제(皇帝)라 호칭(呼稱)하니, 하나는 황태극(皇太極), 하나는 청태극(靑太極)인데, 이들은 중국(中國) 서남(西南) 지방(地方)에 있어서 하나는 액라사(厄羅斯), 곧 대비(大鼻)이며, 하나는 탑이객(爾喀)이니, 이들은 중국(中國)의 동북(東北) 지방(地方)에 있었다.

 

영고탑(寧古塔)은 동()쪽은 동해(東海)까지 3000() (), (西)쪽은 개원(開元)ㆍ위원보(威遠堡)까지 590() (), ()쪽은 장백산(長白山)까지 1200() (), ()쪽은 특합변(忒哈邊)까지 600()나 되었다 한다.

 

대개(大槪) 우리나라는 지형(地形)이 북()은 높고 남()은 낮으며, 중간(中間)은 잘록하고 아래는 퍼졌는데, 백산(白山)을 머리라 하고, 대령(大嶺)을 등마루라 하면, 사람이 옆으로 등을 구부리고 서 있는 것과 같으며, 영남(嶺南)의 대마도(對馬島)와 호남(湖南)의 탐라도(耽羅島)는 두 발로 괸 것과 같아, 서북(西北)쪽에 앉아 동남(東南)쪽을 바라보는 형상(形象)이라는 것이 감여가(堪輿家)들의 정론(正論)이다.

 

그래서 경도(京都)를 중심(中心)으로 사방(四方)의 방위(方位)를 정한다면 온성(穩城)이 정북(正北)쪽이 되고 해남(海南)이 정남(正南)쪽이 되며, 정서(正西)쪽은 풍천()이요, 정동(正東)쪽은 강릉(江陵)이니, 이에 의거(依據)하여 본다면 강역(壃域)의 향배(向背)ㆍ편정(偏正)을 알기란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데, 지금(只今)의 지도(地圖)라 하는 것은 틀리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지도(地圖)마다 모두 폭()을 따라 위치(位置)를 정하고, 위치(位置)에 따라 그림을 그렸으므로, 어떤 것은 장광(長廣)이 틀리고 어떤 것은 활협(闊狹)이 맞지 않아, (西)의 의주(義州)와 북()의 장흥(長興)으로 살펴보면 이 동() (西) 양계(兩界)의 기준(基準)인 것 같다.

 

그러나 마주 펴놓은 양각(兩角)이 부채를 편 것과 같아서, 압록강(鴨綠江)이 바다에 들어간 것을 극서(極西)로 하고, 두만강(豆滿江)이 바다에 들어간 것을 극동(極東)이라 한 뒤에 8(八道) 360()를 바둑판 위에 바둑알을 뒤죽박죽 펴놓듯이 벌여 놓고 억지로 지점(指點)하며 산천(山川)ㆍ정로(程路)를 의논(議論)하는 것이 거의 거울을 엎어 놓고 비춰지기를 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어서 직방씨(職方氏)의 웃음소리가 되지 않을 것이 드물다.

 

지도(地圖)가 이렇게 된 것은 다만 백두산(白頭山)의 두 줄기 물이 서(西)쪽으로 흘러서 압록(鴨綠)이 되고, ()쪽으로 흘러서 두만(豆滿)이 된다는 옛말만을 가지고 고집(固執)부린 데 불과(不過)하다.

두 물이 동서(東西)로 나누어졌다 한 것은 특별(特別)히 최초(最初)에 발원(發源)한 곳을 가지고 말한 것이요, 그 말류(末流)가 흘러간 곳까지는 의논(議論)하지 아니했음을 알지 못함이다.

 

시험(試驗)해 보면 두만강(豆滿江)이 온성(穩城)으로 향()한 것은 혹은 동()으로 혹은 북()으로 흘러서 미철보(美鐵堡)에 다다른 뒤에, 곧 남()쪽으로 쏟아져 서수라(西水羅)에 가고, 압록강(鴨綠江)은 그 흐름이 점점 길어져서 삼수(三水)ㆍ갑산(甲山)과 폐사군(廢四郡)을 지날 즈음에는 허다(許多)한 굴곡(屈曲)이 강계(江界)ㆍ위원(渭原)을 엇갈려서 오히려 서남(西南)쪽을 향하다가 창성(昌城) 아래에 와서는 곧바로 남()쪽으로 쏟아져 통군정(統軍亭)의 서(西)쪽을 싸고 돌아 대총강(大總江)으로 들어간다.

때문에 우정(郵亭)들이 6(六鎭)에 나가는 자를 모두들북상(北上)한다하고, 연경(燕京)을 향()하여 가는 사신(使臣)을 모두서도(西渡)한다하니, 이로 본다면 나의 말이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후략(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夢經堂日史 編四  

 

紫禁瑣述 [七年乙卯十二月] 

 

二十二日 [庚戌]

 

 

<원문(原文)>

 

전략(前略)

 

韓又問曰寧古塔屬於滿洲而與廢四郡相接乎寧古塔卽古肅愼氏之遺墟也漢唐以來東北無强國雄部惟我靑邱一域擅東土之形勝此所以隋唐以來每以擊朝鮮爲征東大役其時則遼東西太半爲我土而山內外諸種落多服屬於我一自女眞滿萬之種起於鏡泊之中駸駸盛大至于宋而入主中夏是爲金國及夫被元人之逐東歸則其部落散處于豆滿鴨綠二江之西北或稱野人或稱蕃胡侵軼我二境北則梨湯介西則李滿住卽其大者也自玆以還我國邊界不靖大抵女眞餘部有熟女眞生女眞之別至於皇明萬曆以後生女眞董山之一派忽大於建州衛而統屬毛麟衛左衛右衛等種落而廢四郡密邇之故最受其弊此所以四郡之廢而及弘時以後兵力日强盛仍以北上而自開元定瀋陽東下而拔遼陽以瀋陽稱盛京以遼陽稱東京以建州稱興京而寧古塔以西並據而有之遂百戰於大小諸柵之間崇禎末入主燕京而建州卽陵廟之所在老城卽都邑之所居故其所制置與盛京無異云矣按黃道周博物典彙建州攷云建州卽金別部元置萬戶府淸分爲三曰建州曰海西曰野人而建州居中雄長地最要害永樂元年設建州衛每歲十月入貢此建州之始大也遼野以東列置三將軍其一鎭守奉天等處地方而坐瀋陽其一鎭守寧古塔等地方坐船艙其一鎭守黑龍江等地方而坐艾滸城秩皆一品各統滿洲末年最憂黑龍江以北蒙古故加設白度納將軍云而其坐地不能詳知然似在黑龍混同之間蒙古四十八部中東北諸種最强盛大鼻獺子亦在黑龍之北東自黑龍江至開元以北及沿秦長城之外逶北逶西至于漢西域于地方皆是蒙古之界其廣比中原不啻屢倍上古則不載於版圖荒漠無人居唐宋以後地益廣人益繁今爲四十六部互相雄長各帝一隅號稱東西南北皇帝一曰皇太極一曰靑太極此在中國之西南一曰厄羅斯卽大鼻也一曰爾喀此在東北寧古塔東至東海三千餘里西至開元威遠堡五百九十餘里南至長白山一千二百餘里北至忒哈邊六百餘里蓋我國地形北高而南低中殺而下贏以白山爲頭大嶺爲脊若人之側腦僂背而立者嶺南之對馬島湖南之耽羅島又如兩趾之支焉坐亥面巳卽堪輿家之正論而以京都定四方之方位則穩城爲子海南爲午其酉其卯江陵依此而覘之壃域之向背偏正如指諸掌而凡今之所謂地圖者無一非舛錯也類皆因幅而排位因位而成圖或長廣乖勢或闊狹失宜輒以西之義州北之長興視之若東西兩界之準而對布兩角如扇子之撒開以鴨綠之入于海者謂之極西豆滿之入于海者謂之極東然後列置八道三百六十州如亂布棊子於一局之上而强自指點議其山川程路則殆無異於反鏡索照而其不見笑於職方氏者稀矣其所以爲此者亦不過只擧白頭山兩派水西流爲鴨綠東流爲豆滿之古語硬執以爲膠固之論殊不知所謂二水之分東西者特取最初發源處爲之說未嘗並論其末流歸趣矣試看豆滿之向穩城者或東或北而流到美鐵堡然後卽南注而入于西水羅鴨江則其流稍長過三甲廢四郡之際許多屈曲江界渭原猶向西南而及昌城以下則直爲南瀉包統軍亭之西而入于大總江故郵亭之出六鎭者皆曰北上使价之向燕界者皆曰西渡卽此見之則吾之說非無稽矣

 

후략(後略)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참고(參考) 자료(資料)>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다섯 편()은 조선(朝鮮) 철종(哲宗) 6(1855) 연행사신(燕行使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수행(隨行)했던 서경순(徐慶淳, 1804년~?)의 사적(私的)인 기록(記錄)이다.

 

본서(本書)는 등록(謄錄)이 아닌 개인적(個人的)인 기록(記錄)으로 유람(遊覽), 교우(交友) 관계(關係)의 기술(記述)이 대부분(大部分)으로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전형적(典型的)인 사대(事大) 관계(關係)에서 형식적(形式的)인 조공(朝貢) 관계(關係)로 변해 가는 과정(過程)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그런대로 조청(朝淸) 관계(關係)의 일면(一面)을 볼 수 있다.

 

이 무렵 청() 나라는 밖으로 아편전쟁(阿片戰爭)을 겪어 그 결과(結果) 남경조약(南京條約)이 체결(締結)되었고, 안으로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 일어나 다사(多事) 다난(多難)한 기간(期間)이었다.

 

이 사행(使行)이 있은 지 불과(不過) 40여 년 뒤에 우리나라는 청() 나라와의 주종(主從) 관계(關係)에서 벗어난 것을 감안(勘案)하면 이 무렵의 사행(使行)은 하나의 과도기(過渡期)였다는 점에 착안(着眼)하여 읽어야 할 것 같다.

 

저자(著者)는 청()의 발달(發達)된 문물(文物)과 문화(文化)에 대한 동경(憧憬), 특히 이용후생(利用厚生) 문제(問題)에 깊은 관심(關心)을 갖고 선망(羨望)도 하지만 맹목적(盲目的)인 찬미자(讚美者)는 아니었다.

 

() 나라의 문란(紊亂)한 정치(政治)와 궁핍(窮乏)한 경제(經濟)는 그를 실망(失望)시켜, 중국(中國)의 걱정거리는 외환(外患)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정(稅政)의 문란(紊亂), 관리(官吏)의 부패(腐敗)에 있다고 통탄(痛歎)한다.

 

[출처=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itkcdb/mainIndexIframe.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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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필유니버최남석 | 작성시간 11.02.19 김홍필님 진짜로 중요한 자료 입니다 어떻게 찾아 왔습니까? 수고 하셨습니다 / 이 글을 완전 해석하면 논난이 어느정도 해결 될거 같습니다
  • 작성자필유니버최남석 | 작성시간 11.02.19 번역문 12행 의 [송나라라 때 에 이르러] 는 - 송나라에 이르러- 로 번역해야 합니다 13행 에[그 부락이 두만 압록 두강의 서쪽과 북쪽은 ] -서북쪽 -으로 번역 해야합니다 서쪽과 북쪽은 西與北 이라고 써야 합니다 원문에 與는 접속사 가 없으므로 그냥 서북으로 보는것이 마땅 합니다 이글이 말하는 두만 압록 두 강은 한반도 의 장백산 두만 압록이군요 이 글의 시대보다 더 앞의 시대에는 음산산맥 의 좌우로 흐르는 강을 서는 압록 동은 두만 이라고 하였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홍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2.19 則其部落散處于豆滿,鴨綠二江之西北。或稱野人。或稱蕃胡。侵軼我二境。北則梨湯介。西則李滿住。卽其大者也。
    ----------------------------------------------------------------------------------
    "북(北)쪽은 이탕개(梨湯介), 서(西)쪽은 이만주(李滿住)가 그 큰 자였다"고 나오므로....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두만(豆滿), 압록(鴨綠) 두 강(江)의 서(西)쪽과 북(北)쪽"이라고 번역한 것 같습니다.
    "我二境"은 곧 "두 강(江)의 서(西)쪽과 북(北)쪽"을 가리킵니다.
  • 작성자필유니버최남석 | 작성시간 11.02.19 요야 동쪽에 봉천 심양 항창 흑룡강 이 있다는 말로 보아 요동은 지금의 요동반도 는 아니군요
  • 작성자필유니버최남석 | 작성시간 11.02.19 금나라 에서 후금 후금에서 청 청 ? 의 홍타시 이후에 청은 국력이 강해 개원에서 북으로 심양을 공격했고 이어서 동쪽으로 내려와 요양을 빼았았다 합니다 여기서 홍타시는 청의 홍타시 맞는가요? 그렇다면 이조 는 언제 양자강의 강화도(강도)에서 남한산성의 치욕을 받은 건가요 ? 청의 홍타시가 개원을 쳤을 때 이조는 이곳을 내주고 요동의 동쪽 만 가지고 있었다고 사료되는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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