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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五服)은 조선(朝鮮)의 제도(制度)이었나?

작성자김홍필|작성시간11.03.18|조회수423 목록 댓글 8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成宗) 10(1479) 8 23번째 기사(記事)

 

박숙진(朴叔蓁)·성현(成俔) ()이 성절사(聖節使) 개차(改差)와 상공물(常貢)의 수()를 감()하는 것 등()에 관()해 상소(上疏)하다

 

 

<번역문(飜譯文)>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박숙진(朴叔蓁) ()과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성현(成俔) ()이 교장(交章)하여 상소(上疏)하기를,

 

“신() ()이 그윽이 듣건대 선왕(先王)의 제도(制度)는 방내(邦內)를 전복(甸服)이라 하고 방외(邦外)를 후복(侯服)이라 하며 후위(侯衛)를 빈복(賓服)이라 하고 만이(蠻夷)를 요복(要服)이라 하며 융적(戎狄)을 황복(荒服)이라 하였으니, 이는 지방(地方)의 원근(遠近)에 따라서 구역(區域)을 정()하고, 형세(形勢)의 친소(親疏)에 따라서 제도(制度)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섬김에 예()가 있고 그 바침[]에 절도(節度)가 있으므로, ()히 상공(常貢)하는 외()의 사헌(私獻)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멀리 해외(海外)에 있어 내방(內邦)의 제후(諸侯)와 비유(比喩)할 수가 없으니, 비록 천자(天子)가 유사(有司)에게 명()하고 유사(有司)가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었다 하더라도 분별(分別) 없이 요구(要求)함이 더욱 더하여 끝을 알지 못하면, 진실(眞實)로 마땅히 폐단(弊端)을 진술(陳述)하여서 애절(哀切)하게 호소(呼訴)하여 은미(隱微)한 정성(精誠)을 만()에 하나라도 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조서(詔書)에도 있지 않고 외정(外庭)에서 알지 못하며 중간(中間)에서 말을 전()하는 자()는 단지(但只) 정동(鄭同)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정동(鄭同)이 이리[]와 같이 탐()하고 원숭이와 같이 사특(邪慝)하여, 중궁(中宮)에게 사사(私私)로운 총애(寵愛)를 사고자 하여 한씨(韓氏)의 세도(勢道)를 빙자(憑藉)해서 천자(天子)의 말이라고 핑계함에 의심(疑心) 없습니다.

 

또 그 내서(來書)에 단지(但只) 물폐(物幣)의 수()만을 나열(羅列)하고 부새(符璽)를 찍지 않았으니, 어찌 반드시 천자(天子)의 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에 하나 천자(天子)가 알고 있다 하더라도 한씨(韓氏)는 본국(本國)의 구실[]을 받아 자기(自己)의 물건(物件)이라고 일컫고서 이를 사헌(私獻)하되, 반드시 전하(殿下)의 정성(精誠)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천자(天子)도 이국(異國)에서 생산(生産)되는 귀()한 것에 지나지 않는 미물(微物)이라고 생각하여 물리치지 않을 것이니, 어찌 우리 나라의 소산(所産)임을 알아 일일이 써서 징구(徵求)하겠습니까?

 

정유년(丁酉年) 이후(以後)로부터 해마다 징구(徵求)하지 않음이 없어, 금년(今年)은 지난해보다 심()하고 명년(明年)은 금년(今年)보다 심()하여 해마다 더 요구(要求)하면서 만족(滿足)함이 없으니, 어찌 한 가닥의 작은 흐름으로써 큰 바다의 그칠 사이 없이 새는 것을 공급(供給)할 수 있겠습니까?

 

정동(鄭同)의 뜻을 보건대 비록 온 나라의 것을 몽땅 주더라도 만족(滿足)해 하지 않을 것이니, 처음에 이를 감당(勘當)하지 못하게 되면 마침내 동고지환(童羖之患)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땅이 협소(狹小)하여 물산(物産)에 한도(限度)가 있는데, 진헌(進獻)하는 물건(物件)이라고 이름하면, 중외(中外)가 분주(奔走)하게 한 치[]의 저장도 한 자[]로 모아야 겨우 그 액수(額數)를 충당(充當)하니, 한갓 탕장(帑藏)만이 장차(將次) 허갈(虛竭)하게 될 뿐 아니라, 팔도(八道)가 끊임없이 소란(騷亂)하여 편안(便安)히 쉴 수가 없을 것입니다.”

 

후략(後略)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원문(原文)>

 

司憲府大司憲朴叔蓁等司諫院大司諫成俔等, 交章上疏曰:

 

臣等, 竊聞先王之制, 邦內甸服, 邦外侯服, 侯衛賓服, 蠻夷要服, 戎狄荒服, 因地之遠近, 而爲之域焉, 因勢之親疏, 而爲之制焉 其事之有禮其享之有節, 不敢有私獻於常貢之外也 我國, 邈在海外, 不得比內邦諸侯, 雖天子命有司, 有司承天子之命, 而求之紛紜增益, 不知紀極, 則固當陳弊, 而哀籲之, 以伸微懇於萬一 況未有詔書, 而外庭不知中間傳語者, 只一鄭同乎? 是必同之狼貪狙詐, 欲市私寵於宮中, 憑韓氏之勢, 矯天子之言, 無疑矣 且其來書, 只列物幣之數, 未有符璽之驗, 則豈可必以爲天子之命? 萬一以爲, 天子有知, 韓氏受本國之賦, 稱爲己物, 而私獻之, 必不道殿下之誠, 天子亦不過貴異國之産, 以爲微物, 而不能却, 豈知我國所産, 一一書而徵之乎? 自丁酉以後, 無歲不徵, 今年甚於去年, 明年又甚於今年, 年年而加, 求索無厭, 則豈可以一派之涓流, 以供尾閭之無盡乎? 觀鄭同之意, 則雖傾國與之, 不以爲厭, 將不勝權輿, 而未免童羖之患矣 我國, 壤地褊少, 物産有限, 而名曰進獻之物, 則中外奔走, 寸儲而尺聚之, 僅備其額, 非徒帑藏, 將至虛竭, 八道繹騷, 不得寧息矣

 

후략(後略)

 

[출처=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위에 인용(引用)된 성종(成宗) 10(1479) 8 23번째 기사(記事)에는 선왕(先王)의 제도(制度)는 방내(邦內)전복(甸服)이라 하고, 방외(邦外)후복(侯服)이라 하며, 후위(侯衛)빈복(賓服)이라 하고, 만이(蠻夷)요복(要服)이라 하며, 융적(戎狄)황복(荒服)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혹자(或者)는 이러한 문구(文句)를 근거(根據)로 하여, ‘선왕’(先王)은 조선(朝鮮) 성종(成宗)의 선대(先代) ()을 가리키고, ‘오복’(五服)은 조선(朝鮮)의 제도(制度)라고 주장(主張)합니다.

 

과연(果然) 그럴까요?

 

필자(筆者)는 여기서 의문(疑問)을 제기(提起)합니다.

 

결론(結論)을 얻기 위해서는, 위에 인용(引用)<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기사(記事)를 꼼꼼히 검토(檢討)할 필요(必要)가 있습니다.  

 

()를 들면, “한씨(韓氏)는 본국(本國)의 구실[]을 받아 자기(自己)의 물건(物件)이라고 일컫고서 이를 사헌(私獻)하되, 반드시 전하(殿下)의 정성(精誠)을 말하지 않을 것이고 천자(天子)이국(異國)에서 생산(生産)되는 귀()한 것에 지나지 않는 미물(微物)이라고 생각하여 물리치지 않을 것이라는 문구(文句)가 나옵니다.

 

여기서 전하’(殿下)는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조선(朝鮮)성종’(成宗)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천자’(天子)는 누구입니까?

그는 성종(成宗)과 분명(分明)히 다른 주체(主體)입니다.  

 

또한 여기서 이국’(異國)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나라’[我國] 조선’(朝鮮)입니다.  

 

한편 오복’(五服)이라는 제도(制度) 때문에, “그 섬김에 예()가 있고 그 바침[]에 절도(節度)가 있으므로, ()히 상공(常貢)하는 외()의 사헌(私獻)은 있을 수 없다고 박숙진(朴叔蓁)·성현(成俔) ()이 상소(上疏)합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我國]는 멀리 해외(海外)에 있어 내방(內邦)의 제후(諸侯)와 비유(比喩)할 수가 없다고 하며, “우리 나라[我國]는 땅이 협소(狹小)하여 물산(物産)에 한도(限度)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복’(五服)은 광활(廣闊)한 대륙(大陸)에서 천자(天子)를 중심(中心)으로 만들어진 제도(制度)입니다.

 

방내(邦內)-방외(邦外), 후위(侯衛), 만이(蠻夷)-융적(戎狄) 곧 사이(四夷)는 대륙(大陸)고전’(古典)에 나오는 어휘(語彙)들입니다.  

 

좌구명(左丘明)이 중국(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 8(八國)의 역사(歷史)를 나라별()로 적은 <국어(國語)>라는 책()이 있습니다  

<국어(國語)>는 주어(周語) 3, 노어(魯語) 2, 제어(齊語) 1, 진어(晋語) 9, 정어(鄭語) 1, 초어(楚語) 2, 오어(吳語) 1, 월어(越語) 2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국어(國語)>주어’(周語)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內容)이 나옵니다.

 

부선왕지제(夫先王之制)에 방내(邦內) 전복(甸服)이요 방외(邦外) 후복(侯服)이요 후()-() 빈복(賓服)이요 만()-() 요복(要服)이요 융()-() 황복(荒服)이라

 

선왕(先王)의 제도(制度)에 방내(邦內)는 전복(甸服)이고, 방기(邦畿) 밖은 후복(侯服)이며, 후복(侯服)과 위() 사이는 빈복(賓服)이며, 만이족(蠻夷族)이 사는 곳은 요복(要服)이며, 서융(西戎)과 북적(北翟)이 사는 곳은 황복(荒服)이라 하였습니다

 

[출처=http://www.cyberseodang.or.kr/mboard.asp?Action=view&strBoardID=db_kooker&intSeq=2600]

 

 

위에 인용(引用)<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성종(成宗) 10(1479) 8 23번째 기사(記事)에는, “() ()이 그윽이 듣건대”[臣等, 竊聞]라고 하면서, 이러한 고전’(古典)의 문구(文句)가 인용(引用)되었습니다.  

 

하여간(何如間) 기사(記事)의 문맥상(文脈上), 성종(成宗)은 천자(天子)가 아니므로, 맨 앞에서 언급(言及)선왕’(先王)은 조선(朝鮮) 성종(成宗)의 선대(先代) ()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복’(五服)은 조선(朝鮮)의 제도(制度)가 아닙니다.

 

<대륙사관(大陸史觀)>에 따르면, 위에 인용(引用)<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내용(內容)은 왜곡(歪曲)/날조(捏造)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具體的)으로 어느 부분(部分)이 그러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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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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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자우 | 작성시간 11.03.19 앞으로 우주조선설도 나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산해경이나 포박자 등에서 하늘을 나는 비행체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한민족의 칠성신앙에는 위대한 인물들은 북두칠성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고 합니다 . 아마 플레이데스성단에서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수로왕은 하늘에서 원형비행선을 타고 내려온, 키가 9척이나 되는 외계인이라고 볼수도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홍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3.21 네~, 앞으로 "우주조선설"까지 등장한다면 갈데까지 간거라고 보이네요... 이른바 "막장 드라마"를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초고대(超古代)보다는 이성계(李成桂) 조선(朝鮮)과 토쿠가와(德川) 일본(日本)의 강역(疆域)이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재만 | 작성시간 11.03.21 김수로왕이 키가 9척이나 된다라는 신비한 부분에 촛점을 맞추기 보다는 '김수로'왕은 '대가락국'의 왕이었으며, 가야연맹(9가야)를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았던 인물이라는 부분이 더 중요하겠죠. 즉, 우리가 중심의 역사를 찾아 올라갈 때, 단지 삼국과 중국, 한국과 왜의 관계를 고찰하지만, 삼국의 중심에 당시 가야라는 신비한 국가 또는 공동체 연맹이 존재하였으며, 이는 왜국(일본)의 근본과도 분명한 연결성이 있었다라는 점에서 함께 탐구하며 고찰해 보아야 하겠죠...
  • 답댓글 작성자김재만 | 작성시간 11.03.21 초기 제가 본 카페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카스피해와 흑해사이에 Khazaria라는 고대의 왕국이 존재했다라는 내용을 올린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들의 흔적이 유대의 중심이었으며 동쪽으로 이동한 중심의 세력일 수 있다라는 놀라운 가설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현재에 그것을 돌이켜 회고해보면 우리의 역사서를 통해서 그것에 대한 가능성을 접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재만 | 작성시간 11.03.21 어떻게 보면, 우리만의 역사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의 공통적 근원이 될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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