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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무`가 태조 리성계의 년호가 되는 리유

작성자김홍필|작성시간11.09.17|조회수1,389 목록 댓글 28

조선과 중국!
중국과 명나라!
다들 알고 있는 낱말이다. 유치원생들까지 다 알고 있을 말일 것 같다.
그런데 이 세 낱말이 정말로 어렵다. 글쎄 평소의 상식으로 본다면 조선과 중국이야 한반도와 대륙으로 구분할 것이다. 그러나 <대륙조선사연구회>의 사관으로 보면, 그것은 거의 동일한 개념이되, 조선은 중앙과 지방을 포함한 나라 전체이고, 중국은 조선의 중앙정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국과 명나라는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설명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전혀 뚱딴지 같은 소리이지만,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맞는 말일 수밖에 없는데,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중국'이란 무엇인지, 명확히 따져봐야 하는 문제가 있다. 일단 '국명'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른 말로 통용이 되는 보통명사일 뿐이다. 중원·중토·신주·중주·관내도 등등이 그렇다. 이런 말은 결코 '국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바꿔놓고 보면 상식이다.
그렇다면 '명나라'란 무엇인가? 과연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그토록 많이도 써온 력사의 국명임에도 이처럼 아리송한 말이 되어버린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력사적 흔적에서 찾아진다.

(1) 특진관(特進官) 송세형(宋世珩)이 아뢰었다. … 대체로 우리 조정[我朝: 조선]이 이곳에 도읍을 창건한 지가 거의 200년이나 되었다.
[特進官宋世珩曰:… 蓋我朝建都于此, 幾二百年.][명종실록 11권, 6년(1551) 4월 29일(정해)]
(2) 사간원이 아뢰기를, … 개국(開國)하여 200년 동안에 서울과 팔도의 초시(初試)·회시(會試) 및 유생의 사사로운 작품은 천억뿐만이 아니다.
[諫院啓曰:… 而開國將至二百年矣. 京中八道初試會試及儒生私作, 不 千億.][명종실록 14권, 8년(1553) 6월 9일(갑신)]
(3) 조종께서 덕을 쌓아 기업을 열어 주셨고, 열성(列聖)께서 부지런히 왕가를 빛내신 지 200년이 되었는데, 하루 사이에 이 지경이 되었다.
[祖宗積德以開基, 列聖克勤以光宅. 二百年于玆, 一二日於斯.][명종 15권, 8년(1553) 9월 14일(정사)]
(4) 성균관 생원 유도(柳濤) 등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자꾸 일어나서 하늘의 경계가 이미 지극한데, 지금 또 200년 동안 태조때부터[조종조에서] 전해 오던 정궐(正闕)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타버렸습니다.
[成均館生員柳濤等上疏曰: 殿下臨御以來, 天災時變, 層見疊出, 天之見戒, 旣已極矣。 而今又祖宗二百年相傳之正闕, 一夜焚蕩.][명종실록 15권, 8년(1553) 9월 20일(계해)]
(5) 우리 나라가 태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200년도 채 못되고 겨우 160년 남짓 된다.
[我朝自太祖, 至于今, 未滿二百年, 而僅百六十餘年也.][명종실록 15권, 8년(1553) 10월 11일(갑신)]
(6) 유학(幼學) 서엄(徐 )이 상소하였는데, … 요즘 또 큰 화재가 있어, 태조때부터[조종조로부터] 200년간이나 전래된 궁궐이 하루밤 사이에 모두 잿더미로 변한 것은 실로 천고에 없었던 재변입니다.
[幼學徐 上疏, … 今又有大火之變, 祖宗朝二百年相傳之宮闕, 一夜盡爲灰燼, 實千古未有之災也.][명종실록 15권, 8년(1553) 10월 23일(병신)]
(7) 예조가 회계(回啓)하기를, 영암 향교는 개국한 이래 200년 동안 봉향(奉享)하던 곳인데, 선성 위판이 하루아침에 모두 적병에게 오욕(汚辱)을 당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禮曹回啓曰: 靈巖鄕校, 開國以來, 至於二百年奉享先聖位板, 一朝竝遭汚辱於賊兵, 事甚驚愕.][명종실록 19권, 10년(1555) 7월 3일(을미)]
(8) 사간원이 아뢰기를, 태조때부터[조종조에서] 왜인(倭人)을 맞아들인 것이 지금까지 200년이 되었으나, 수령들이 결탁하여 매매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諫院啓曰: 祖宗朝接待倭人, 二百年于玆, 未聞守令交手買賣者.][명종실록 30권, 19년(1564) 10월 23일(임진)]

명종 임금 때 1551∼1564년까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조정[我朝]'는 분명 '조선'일 뿐이고, '開國·開基·建都'이런 낱말이 '조선'을 건국했다는 말이며, '祖宗朝'란 말도 '임금의 조상', 즉 '태조때부터'라는 말인데, 그것이 200년이 된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조 리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것은 공식적으로 1392년이다. 그런데 명종 때에 말하는 이 '건국·개국·개기·건도'니, '태조때부터'라는 말은 1551년에서 200년 전이면 1351이 되며, 1564년이면 1364년이 된다.
그저 어림잡아서 '200'이라는 말을 썼을 수가 있지만, 그것은 1551∼1555년까지의 말로써도 충분하다. 그러나 위의 (8)에까지 1564년에도 그랬던 것은 태조 리성계의 조선 건국이 이 시점을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했다는 년도가 '1368년'이며, 그의 년호가 '홍무(洪武: 1368∼1398)'이므로, 이 시기와 가장 가까운 것이기도 한 것은 우연하다거나, 어림잡아 한 말로 볼 수 없으며, 1398년까지는 너무 멀다.
그렇다면 '태조때부터[祖宗朝]'라는 말의 '태조'는 1368년이 조선의 시작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그 년호 홍무가 조선의 년호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례에서 '200년'이란 말을 보자.

(9) 신[류성룡]이 써서 대답하기를, 중앙조정[天朝]의 은혜를 200년 동안 입어 와서 백성이 전쟁을 모르다가 갑자기 흉적(兇賊)을 만났으므로 장졸(將卒)이 다 취약하여 싸우는 자는 패하여 죽고 소문을 들은 자는 달아나서 여지없이 패하여 삼도(三都)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천자의 군사[天兵]에 의지하지 않았으면 이 적이 어찌 바닷가로 물러갈 리가 있었겠는가. 머물러 지키는 천자의 군사[天兵]은 결코 철수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臣書對曰: 蒙被天朝之恩, 二百年來, 民不知兵, 猝遇兇賊, 將卒皆脆弱, 交鋒者敗死, 望風者奔潰, 一敗塗地, 三都失守, 非仗天兵, 此賊豈有却退海邊之理乎. 天兵之留防者, 決不可撤回也.][선조실록 45권, 26년(1593) 윤11월 17일(정유)]
(10) 비변사가 아뢰기를, … 우리 나라와 일본은 200년 동안 서로 좋게 교류하며 틈이 없었는데 뜻밖에 흉패한 사람이 하늘의 뜻을 거슬리고 순리를 범하여 멀리서 전쟁을 일으켜 살상을 자행함으로써 두 나라의 죄없는 백성을 이와 같이 도탄(塗炭)에 빠지게 하였으니, 사람들의 마음만 분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 귀신에게도 용납을 얻지 못할 것이다.
[我國與日本, 二百年交好無間, 不意兇悖之人, 逆天犯順, 遠起兵端, 干戈 爛, 使兩國無辜生靈, 塗炭至此, 非徒人心所共憤疾, 於天地鬼神, 有所不容][선조 54권, 27년(1594) 8월 16일(신유)]

이 사료 (9)(10)은, 물론 더 많은 사례가 있지만, 임진왜란이 있었던 시기로서 1593∼1594년의 글이다. 이 년도에서 200년 전은 당연히 '1392'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래서 조선의 시작은 이 때가 맞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위의 (1)∼(8)까지의 년도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거야말로 (1)∼(7)까지의 것과 어울리는 언어법이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200년'이란 범위로 본 조선의 시작 시기는 1351∼1394년까지가 되어 43년의 오차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어떤 해가 근사치일까? 1368로 보았을 때, 1351년은 차이가 18년, 1392년과는 24년의 차이로서 오히려 1351년이 더 가까운 조선건국 시기가 되므로, 말투에서 어림잡는 말의 부정확성을 고려해 보면, 이 사료『조선왕조실록』에서 본 조선의 건국은 결국 1368년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이 될 것이다.
조종조, 즉 태조때부터 시작이 200년이 되었다는 명종 때의 말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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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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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이순주 | 작성시간 11.09.19 프랑스어는 골족(고려족)의 말에서 온 단어가 상당합니다. 특히 페르시아어,러시아어,이란어와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티무르 제국의 언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크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홍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9.19 언어학의 전문가(?)이시군요...
  • 작성자이순주 | 작성시간 11.09.18 러시아의 모스크와 비슷한 첨탐을 에미르타쥬( e+ mir+ tage)의 의미는 역시 세상을 향한 탑 정도가 됩니다.
    탑은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을 동시에 감시합니다. 그 지배자가 내외의 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죠.
    러시아의 상황과 중앙아의 상황은 똑같습니다. 그 지배집단이 토착인이 아니라는 얘기일 겁니다.
  • 작성자이순주 | 작성시간 11.09.19 그러니까 티무르의 정복활동은 국가대 국가의 전쟁이라기 보단 고려내 군벌간의 영지다툼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쿠빌라이 자손과 홀라구 자손파벌(당시 완완부 고려 朝 중심귀족)과 오고타이가와 킵차크 가문세력 사이에서
    티무르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그걸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
    고려와 명(明)사이에서 줄타기를 했다는 것이고요. 쿠빌라이의 자손이나 오고타이나 주치의 자손들 전부가 고려의
    대군벌일 뿐 황족은 아니기 때문에 티무르 이성계가 쿠빌라이를 배반한 것과 오고타이의 무굴리스탄(明)을 배반한 것이 전부 고려를 배반한 것과는 무관한 것이 됩니다.
  • 작성자이순주 | 작성시간 11.09.19 1392년에 명(무굴리스탄)에 나라이름을 책봉받으러 물어 본 것만 봐도 이성계가 고려를 배반했다는 것이 생거짓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고려조정은 무굴리스탄이 아니라, 쿠빌라이의 영지내에 있었습니다. 대도(大都)이건
    카이평(開平)이건 간에 말이지요.

    명(明)에 책봉을 받으러 간 것은 고려의 일개 몰락한 군벌의 눈치를 봤던지,눈치를 보는 척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 행동이 고려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시늉일 수도 있지만요.
    당시 정황을 잘 살피지 않고,1392년에 나라이름을 책봉받으러 명(무굴리스탄)에 사신을 보낸것이 역성혁명(易性革命)을 한 것이라 함은 웃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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