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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조르다노 브루노 의 진실

작성자유토피아|작성시간18.05.13|조회수415 목록 댓글 2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1002/e2010021617281597490.htm

 

철학자 부르노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290&yy=2006

 

 

 

 

 

1600년 2월17일, 로마 캄포디피오리(꽃의 들판) 광장.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지오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가 입에 재갈을 문 채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 죽었다.

향년 52세. 지동설과 무한우주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체포해 화형대에 올리기까지 교회는 타협을 시도했으나 브루노는 끝내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사형이 선고됐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두려움보다 판결문을 읽는 당신들의 두려움이 더 클 것이오.'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브루노는 과학의 진리(지동설)를 탐구하다 종교의 핍박을 받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가운데 유일한 순교자로 남아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종교재판이 열리기 전에 자연사했고 갈릴레이는 법정에서 지동설을 저주한다고 맹세한 끝에 풀려났으나 브루노만큼은 목숨을 버리고 학문적 양심을 지켰다.

나폴리의 가난한 군인 가문에서 1548년 태어난 그는 18세에 도미니크수도회에 들어가 사제교육을 받은 후 제네바ㆍ리옹ㆍ파리ㆍ런던ㆍ프랑크푸르트ㆍ뷔르템베르크ㆍ프라하ㆍ취리히 등을 떠돌며 대학 강단에 섰다. 천문학에서 범신론까지 그의 강의는 인기를 끌었으나 '요주의 인물'이라는 딱지 때문에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

파도바대 수학교수 자리도 갈릴레이에게 간발의 차이로 밀렸다. 교수직 대신 찾아온 운명은 체포. 투옥에서 화형까지 7년9개월간의 수감생활에 지친 브루노는 밤이면 촛불에 손가락을 댔다 뗐다를 반복하며 삶과 죽음을 고민했다고 전해진다.

학문의 자유를 편협으로 압살한 브루노 화형은 유럽의 학문과 문화ㆍ경제의 주도권이 지중해에서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이었다. 억압은 유한해도 자유를 향한 의지의 생명력은 무한하다. 브루노는 자신을 태웠던 로마의 광장에 동상으로 우뚝 서 있다.

 

 

 

 

브루노[ Giordano Bruno ]

본명은 Filippo Bruno. 별칭은 Il Nolano.

 

1548 나폴리 근처 놀라~1600. 2. 17 로마.

이탈리아의 철학자·천문학자·수학자·신비주의자.

 

개요

현대 과학을 예상하는 이론들을 제시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무한한 우주에 관한 이론과 다양한 세계에 관한 이론이다. 브루노는 이 이론들을 통해 지구 중심의 전통 천문학을 거부했으며, 나아가 여전히 항성 천구를 가진 유한한 우주를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 이론을 직관으로 넘어섰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혁 교회가 모두 유럽의 복음화를 위한 투쟁 속에서 엄격한 아리스토텔레스적·스콜라적 원리들을 재확인하던 시기에 비정통 사상을 집요하게 고수하다가 화형대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

직업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필리포였고, 나중에는 태어난 곳의 지명을 따서 '일 놀라노'라고 불렸다. 1562년 나폴리로 가서 그리스·라틴의 고전문학, 논리학, 변증론(논증법)을 연구했다. 아베로에스주의

 

파리에서 브루노는 마침내 마음 편하게 일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리를 발견했다. 가톨릭과 위그노(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당시 앙리 3세의 궁정은 '

1583년 봄 브루노는 앙리 3세의 소개장을 가지고 런던의 주영대사 미셸 드 카스텔노를 찾아갔다. 그는 곧 옥스퍼드로 불려가 그해 여름에 연속 강의를 시작했고, 이 강의에서 지구가 운동한다고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설명했다. 그러나 옥스퍼드 출신자들의 적대적인 태도 때문에 프랑스 대사의 초청을 받아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을 자주 드나들면서 필립 시드니 경과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같은 영향력있는 인물들과 교분을 맺었다.

 

저작

1584년 2월 시드니 모임의 회원인 폴크 그레빌의 초대를 받아 옥스퍼드대학의 몇몇 박사와 함께 지구의 운동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토론은 말다툼으로 끝나고 말았다. 며칠 뒤 그는 이탈리아어로 대화편을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이 대화편은 6편으로 3편은 우주론

 

1585년 10월 파리로 돌아온 브루노는 정치적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앙리 3세는 이미 프로테스탄트와의 평화조약을 폐기했고 엔리케 3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상태였다. 그러나 브루노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가톨릭 분파의 하수인인 수학자 파브리치오 모르덴테와 논쟁을 시작했다. 브루노는 4개의 〈대화편 Dialogi〉에서 모르덴테를 비웃었고, 1586년 5월에는 〈소요학파에 반대하는 자연과 세계에 관한 120편의 글 Centum et viginti articuli de natura et mundo adversus Peripateticos〉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공개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격했다. 정치가들은 그와의 관계를 부인했고, 그는 파리를 떠났다.

 

브루노는 독일로 갔다. 독일에서는 대학 도시들을 떠돌아 다니면서 강연을 했고 여러 소규모 저작들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당대의 수학자와 철학자를 비판한

 

말년

1591년 8월 베네치아의 귀족 조반니 (→ 종교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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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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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유토피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5.13 우주는 무한하다는 부르노의 주장은 신은 없다는 주장과 동일한 의미이다.
    우주는 무한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유한한 그 무엇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을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천부경은 일석삼극 무진본이라고 하였다. 즉 무한속에서는 반드시 본이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다만 그 본이란 무엇인가하는 점에서 하나님일 수도 있고 빛일 수도 있고 생멸인 경우에는 유전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는 무한을 가다보면 결국에는 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 작성자유토피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5.13
    편협스러운 종교인이 더 악한 일을 하는 군요!
    종교적인 권위를 세우기위하여 악을 행하다니!
    예수님처럼 '길잃은 양'이라고 너그럽게 보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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