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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를 위하여 _ 요엘3:9~13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6.01.03|조회수230 목록 댓글 2

시간은 흐르는 것이어서, 현재라고 인지하는 순간 현재는 지나가버립니다. 흘러 지나가 버리는 현재를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어거스틴은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기대’하며 현재를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억’을 통해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야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또, 다가오는 시간을 ‘기대’하며 흐름을 앞서 가야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가 100억 원의 돈을 들여 위안부를 위한 재단을 설립하겠답니다. 더 이상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말 것과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요청했다지요. 100억으로 ‘기억’을 지우라는 겁니다. 할머니가 된 소녀의 몸과 마음에 둔탁한 칼로 새겨진 기억을 100억으로 지우라는 겁니다. 과거를 기억함으로 현재가 존재한다면, 일본 전쟁 범죄자들은 위안부였던 할머니들에게 프로야구  선수 계약금에 ‘기억’을 팔아 현재를 살지 말라고 하는 격입니다. 또, 다시는 위안부 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건 사죄와 배상 받을 ‘기대’를 접고 살라는 것입니다. ‘기억’과 ‘기대’가 없는 현재는 없습니다. ‘기억’과 ‘기대’ 없이 현재를 살 순 없습니다. 죽으라는 겁니다.





‘아베와 박근혜의 날’입니다.  화대를 치르듯 던져 놓는 돈으로 와 배상을 대신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의 지도자와 가해자를 대변하는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통치하는 ‘아베와 박근혜의 날’입니다. 소녀였던 할머니들이 견뎌야 하는 ‘아베와 박근혜의 날’은 할머니들에게 참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여성을 짓밟히던 끔찍한 시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바라는 이유입니다.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욜2:1) 옛날 ‘유다와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도 ‘그들’에게 침략을 당했고 땅을 빼앗겼고 징용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나라들 가운데에 흩어 버리고 나의 땅을 나누었음이며 또 제비 뽑아 내 백성을 끌고 가서 소년을 기생과 소녀를 술과 바꾸어 마셨음이니라”(욜3:2~3)


바빌로니아의 날이 아니라, 이집트의 날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이 와야 합니다. 왕들의 날이 아니라 ‘여호와의 날’이 있어서,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세상을 주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는 날이 와야 합니다.


역법과 달력을 만드는 것은 세상의 권력자들, 제국의 왕들이 시간마저 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정확한 역법을 따라, 농사를 짓고 전쟁의 시기를 가늠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도 있습니다만, 역법과 달력을 만드는 건 최고통치자가 백성들의 시간까지 통치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확정하는 장치였습니다.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지존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은 패망했지만, 일본 제국에게 짓밟혔던 위안부 소녀들은 아직 해방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한반도와 태평양에서 일으킨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군대와 군대의 전쟁은 끝났지만, 외교와 역사의 전선은 여전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되어야, ‘불가역적’으로 전쟁은 끝날 것입니다.


전쟁을 끝내려면 여호와의 날에도 전쟁을 해야합니다. “너희는 전쟁을 준비하고 용사를 격려하고 병사로 더 가까니 나아와서 올라오게 할지어다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켜서 창을 만들지어다”(욜3:9~10) 무기를 갖춰 전쟁을 준비하라 하십니다.



알브레시트 뒤러, '악의 용과 싸우는 성미가엘', 1497년



‘여호와의 날’이 있고 ‘여호와의 날’엔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왕들의 날에서 ‘여호와의 날’로 시간이 바뀌는 것은 옛 왕이 망하고 새 왕이 등극하는 것이라, 도전 세력과 응전 세력이 부딪힐 수밖에 없지요. ‘여호와의 날’엔 전쟁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기도 갖춰야 합니다만,


여호와의 날에 치러질 전쟁은, 일반적인 전쟁과 사뭇 다릅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욜3:13)


‘여호와의 날’에 있을 전쟁은, 무기를 휘두르는 전쟁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날’에 있을 전쟁은 ‘미디안의 날과 같이’ 악한 왕과 세력들이 ‘친구끼리 칼로 치’며 자멸하는 전쟁입니다.(삿7:22;사9:4) 기드온이 미디안을 제압할 때 삼백 군사들은 ‘양식과 나팔’과 ‘횃불’만으로 무장했습니다.(삿7:8,16) 여호와의 날을 기대하며 일어서는 군사들은 하루를 위한 일용할 ‘양식’(마6:11)과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는 ‘나팔’(계8:6~9:21)과 뭇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횃불’(마5:14)로 무장합니다.


지니고 있던 살상 무기는 곡식을 거두는 농구가 될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앉아서 사면의 민족들을 다 심판하리로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욜3:13) ‘여호와의 날’엔 하나님께서 싸우십니다. 소녀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싸우시고, 하나님은 이기십니다.


일용할 양식과 정의의 나팔과 빛나는 횃불로 무장하라 하십니다. 소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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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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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용감하게 명랑해 | 작성시간 16.01.06 안중근의사와 본회퍼의 번뇌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시대의 양심을 실천한 그들

    안중근의사는 이제서야 천주교에서 복권된걸로 아는데 너무 어렵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1.09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건, 참 느리네요.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발견은 문장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진보주의자들의 편에 있었다." 류대영,<한국 근현대사와 기독교>,315쪽,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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