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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미제라블 _ 창19:1~25

작성자김영준|작성시간13.01.12|조회수112 목록 댓글 7

‘주님의 수세 주일’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음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눅3:21~22)”

 

성령이 임하신 후 예수님께서 이사야를 인용해 말씀하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여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성령이 임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포로된 자’와 ‘눈 먼 자’를 찾아가십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오십니다. 성령임재의 증거는 종교적 엑스타시가 아닙니다. 성령임재의 증거는 방언이나 신비한 은사를 갖게 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 ‘포로된 사람’, ‘눈 먼 사람’들을 찾아 만나는 것이 성령임재의 증거입니다. 가난한 사람, 포로된 사람, 눈 먼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을 내 시간과 공간 속으로 초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전체’요 사람이 ‘부분’이라면, ‘전체’가 ‘부분’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부분이 전체 속으로, 즉 사람이 하나님에게로 귀의할 순 있지만, 전체가 부분 속으로, 즉 하나님께서 사람 속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터무니없고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임하신다는 것은, 신비라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임하는 신비로운 사건을 통해, 사람은 거듭납니다. ‘이기적인 유전자’에 변형이 일어나서 ‘이타적인 유전자’로 바뀝니다. 동생을 죽이고 성벽을 세운 ‘가인의 후예’였던 우리가 성벽 때문에 드리운 차가운 응달을 살피게 됩니다. 성령께서 내게 오신 것처럼, 내가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를 찾아가게 됩니다. 나에게 성령께서 임하신 증거는 내가 누구에게 찾아가는지를 보면 압니다.

 

우리 사는 세상(kosmos;체제) 속에는 가난하고, 잡혀있고, 약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도 있었습니다.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아...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며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0~17)”

 

예루살렘이 멸망해갈 무렵,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이유를 말씀하시며 소돔과 고모라와 같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저들이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저들에게 여호와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저들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것은 저들이 선행을 배우지 않으며, 정의를 구하지 않으며, 학대 받는 자를 돕지 않으며, 고아를 외면하며, 과부를 보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는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 즉, 가난한 자, 학대받는 자, 고아, 과부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집사님께서 헌금을 보내오셨습니다. 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 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아들 며느리는 이혼을 했고, 손주 둘을 할머니께서 키우십니다. 아들은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데 자주 각혈을 하고 병원에 입원합니다. 각혈을 할 정도로 폐가 나쁜 아들은, 일을 할 수도 없고, 일을 안 할 수도 없습니다. 일을 안 할 수 없어, 결국 공사 현장을 맡습니다. 일을 했는데도, 대금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공사 대금을 받지 못하면, 홧김에 술을 마십니다. 술을 마시고 다시 각혈을 합니다. 칠십이 훌쩍 넘도록, 집사님의 인생은 고단하기만 합니다. 아니, 고통스럽습니다. 가난한 할머니의 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으신 줄 믿습니다. 가난한 할머니의 헌금에, 얼마를 보태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세례 받아 성령충만한 사람은, 가난하고 비참한 ‘레미제라블’의 친구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레미제라블’의 비참한 상황에 함께 아파하며 친구처럼 살펴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레미제라블’의 친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0~11)”

 

기꺼이 우리는 ‘레미제라블’의 친구입니다.

 

 

 

첨부파일 130113_민들레주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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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1.17 3. 스데반을 죽였던 바울은, 여전히 율법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민족주의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율법에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구원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롬9:1~3)

    4. '생명의 성령의 법'이 아니라, '율법'과 '형법'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없다는 것이 바울의 일관된 진술입니다. 그런데, 율법과 형법에 갇혀있는 이스라엘을 위해 롬9~11장에서 길고 긴 기도를 하던 바울의 음성이 돌연 바뀝니다. 찬양으로.
  •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1.18 5."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11:34~35)" 율법을 따르는 동족때문에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중에 있던 바울이, 믿음없는 동족을 위한 기도를 마친 후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찬송하며, 엄청난 심정의 비약으로 그의 기도가 마무리됩니다.

    6. 바울이 찬송하는 이유는 분명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던 거지요. 우리는 율법과 형법을 따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인지, 그 메커니즘을 알지 못합니다. 바울도 다만 찬송할 뿐이구요.
  •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1.17 7. 자베르 경감의 경우에는 자살의 문제까지 있습니다. 보통, 자살자를 정죄하는 것이 교회의 분위기라 조심스럽고, 자칫 제가 자살을 옹호하는 듯한 오해를 야기할 수 있어 더 조심스럽습니다. 다만,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구원의 방법은 말할 수 있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경우를 나열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3:19)",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벧전4:6:)"
  • 작성자김영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1.17 8. 정리하면,
    장발장을 잡아들이려는 자베르 경감의 믿음은 스데반을 죽인 청년 사울의 믿음이겠습니다.
    그리고 자베르 경감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자베르 경감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지가 자베르 경감이 죽은 뒤에 소멸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 작성자요셉 김영민 | 작성시간 13.01.17 1986년에 개봉한 "미션"이후에 가장 신앙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감동했던 영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본디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의 진정성에 대해 의미를 생각하는 편이라...자베르는 참 인간적인..(?) 우리들 스스로의 일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쟝발장도 죄인이요, 쟈베르도 죄인이며..쟝발쟝이 구원을 받았다면, 쟈베르도 하나님의 애틋하고도 크신 사랑으로 구원하셨을 것이다...파리의 어느강으로 몸을 던지기 전까지... 불안해 하고, 고뇌하며, 두려워 하며, 주님을 찾는 기도를 들으셨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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