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영화이야기

보이지 않는 풍경들과 다시 만난 세계 <여행과 나날> 리뷰

작성자소대가리|작성시간25.12.16|조회수1,083 목록 댓글 5

여행은 익숙함으로부터 낯선 곳으로 나를 던지는 행위다. 새로운 나를 찾는 게 아니라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순간들이 텍스트화하는 순간 언어는 질서를 가지고 자신만의 규칙을 만든다. 인과를 통해 서사를 구축하고 단편적으로 이어진 이미지들을 꿰어 말이 되는 것들로 탈바꿈한다. 빛을 머금은 입자들은 어느새 활자로 변하고 글을 쓰는 이들은 ‘말言‘에 사로 잡힌다. ‘이‘는 단순하게 흘러가는 세계에 권태를 느끼고 있다. 선입견과 예정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자신에게서 발견한 “재능 없음”은 그를 무력하게 한다.

‘이’가 각본 작업을 한 최근작에는 그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낯선 여름의 해변에서 만난 젊은 남녀, 무료함으로 가득한 휴가의 한복판에서 서로를 알게 되고 정처 없이 여기저기를 다니다 낯선 동굴을 지나고 인적이 없는 자신들만의 스폿을 찾는다. 미묘한 끌림으로 만난 두 사람은 현학적인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알아간다. 남자는 무서운 이야기라며 해안가의 익사자 이야기를 하고 여자는 무섭다기보다 슬픈 이야기라 한다. 화자의 두려움은 청자에게로 가서 슬픔이 된다. 태풍이 상륙한 어느 날 그들은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발견 못한 물고기와 함께 서로 멀어지며 영화는 끝난다. 번잡한 도시도 삭막한 시골도 잊게 하는 만남이었지만 이에겐 여전히 프레임에 붙들려 정체된 듯하다.

이의 고민을 알았을까, 스승은 시사가 끝나고 각본이 잘 써지는지 묻는다. 근심이 깊어 보이는 제자에게 그는 여행을 제안한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얼마 안 가 스승은 급사를 한다. 추모를 위해 간 곳에서 그의 쌍둥이 동생을 만나면서 슬픔은 신기함으로 전환된다. 그는 형의 유품인 카메라를 이에게 넘긴다. 오랫동안 잠들었던 카메라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 낯선 곳을 여행할 준비를 마친다. 여름의 언어에 사로 잡혔던 이는 설국으로 떠난다.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낯선 곳에서 식사를 하고 예정에 없던 숙소를 찾아 산길을 헤맨다. 밤이 깊어서야 만난 여관, 그곳에서 만난 벤조는 차가운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카메라 역시 자신만의 여행을 떠난다. 숏과 몽타주를 만들어 내는 낯선 빛들을 담고 다시 돌아온다.

1부의 여름은 액자로 표현된다. 이방인이 포착한 이방인의 고독이었다. 언어라는 세계를 만들어 스스로 가두고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게 도달한 낡은 카메라는 프레임 밖에 풍경을 전해줬다. 미야케 쇼는 <여행과 나날>을 통해 말한다. 서사의 인과보다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만든 이미지야 말로 힘이 있다고, 4:3의 좁은 화면은 바다와 산의 광활한 풍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 안에는 밀도 높은 생이 시간과 시간 사이를 자유롭게 다닌다. 영화는 의미를 버릴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이야기를 한다. 여름의 반대 편에서 겨울을 걷고 눈 위에 발자국의 의미를 아는 순간 흰 종이 위에 글을 쓸 수 있다. 마침내 익숙한 언어에서 벗어난 것이다.

<여행과 나날>은 서사라는 프레임 밖을 여행하는 실험적인 영화였다. 안과 밖을 동시에 봄으로써 관성에 지친 우리에게 신선한 질문을 던진다. 왜 안정이라는 불안을 안고 있는가? 고착되고 정지된 인지에 새로운 자극을 통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게 한다. 영화에 오락성만 남은 현재,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잊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의 풍경은 여전히 영화 밖에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안경 선배 | 작성시간 25.12.16 이번에도 좋은 리뷰 남겨주셔서 예습하고 갑니다. 우리에겐 님이 박평식 이동진이죠 ㅎㅎ 서사는 자극적이기만 하고 이미지는 파편화된 인상만 남는 애매한 관객에게도 답을 줄까요? 제게도 관습적 감동을 벗어날 여행이 필요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소대가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2.16 영화가 말하는 지점이 딱 그겁니다. 비슷한 경험을 서사로 하느냐, 의식의 흐름에 따르냐. 그 차이가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들 것이다. 시네마는 서사를 영상화가 아닌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 작성자목요일 | 작성시간 25.12.16 역시나 소대님의 글은 저의 마음을 정리해 줍니다
    1부 여름도 잔잔하게 좋았어요
    이가 말하는 여행의 정의에 생각이 깊어졌어요
    "여행은 말을 멈추기(?정확한 단어가 기억이 안나서요^^)위한 행위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여행인것 같아 더욱 마음에 와닿는 영화였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소대가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2.16 누구나 쉼표가 필요하죠.
  • 작성자어린왕자 | 작성시간 26.02.14 미야케쇼가 한껀 올렸죠ㅋ
    고정쇼트와 낮은 부감쇼트들이 카메라와 인물, 자연과의 거리감을 잘 표현했어요
    바스트샷이 예술이었어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