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코프스키 영화의 기원에는 순수로의 회귀라는 테제가 깔려있다. 전쟁은 영웅도 승자도 패자도 아닌 폐허만을 남겼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소리 없는 비명과 울분이었다. 필름은 그에게 시간을 되돌려주는 장치였다. 셀룰로이드 위에 빛이라는 조각칼로 그가 각인하려 한 것은 자연의 침묵, 기억이라는 고통을 포용하는 예술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시간은 꿈으로 만들어지고, 그 꿈은 현실의 상실을 강하게 인식시킨다. <이반의 어린 시절>은 성장이 파괴된 소년의 시선과 희망에 가까운 여성의 시선이 전쟁 안에서 소멸하고 끝난 후에 끝이라 말할 수 있는지 묻는다.
시작은 이반의 꿈에서부터다. 공중을 부유하는 자신과 해맑은 어머니, 함께 있을 때 애틋한 그들은 나치에 의해 어머니가 살해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목을 축이던 양동이의 물과 발을 딛고 선 땅 아름답던 미소까지 총소리와 함께 깨지는 것이다.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 있다. 강을 지나 아군에게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정찰 임무를 수행 중이다. 첫 번째 시퀀스가 지나는 과정을 통해 관객은 타르코프스키가 보여주려는 이미지를 간파한다. 동심이라는 공기가 안정이라는 땅을 만나고 행복이라는 물을 마시지만 파괴적인 불 앞에서 모든 것이 산산 조각난다. 이제 이반에게 물은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하는 현실이 되었고 불은 체온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역전된 이미지가 된다.
행복한 순간들은 과거가 되고 고통을 주는 것들로 현재를 견뎌야 한다. 그런 이반에게 그랴즈노프 대령은 전선이 아닌 군사 학교로 돌아가길 권한다. 전쟁은 어른의 일이라는 말로 설득하려 하지만 강하게 반발한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분노와 복수심뿐이다. 가족은 모두 총살을 당하고 홀로 남은 아이는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전장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가로놓인 강물을 헤치며 이반이 도달하려는 곳은 죽음이다. 타르코프스키의 멜랑콜리는 물의 이미지가 긍정에서 필멸로 향하는 우울로 나타난다. 이반이 두 번째 꾸는 꿈은 갈채프 중위의 막사에서 눈을 붙일 때다. 우물 바닥을 바라보는 이반과 어머니를 로우 앵글로 담는다. 그곳엔 별 하나가 반짝인다. 어머니는 별이 빛나는 이유에 대해 우리에겐 낯이지만 별에겐 밤일 수 있다고 한다. 이반이 별을 집으려는 순간 우물 속에 빠지고 어머니는 쓰러진다.
아들을 살리려 했던 마음은 잡히지 않는 별과 같다. 별은 하늘에 있어야 한다. 우물 밑바닥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이 역시 그렇다. 12살은 전장이 아닌 학교에 있어야 한다. 잡히지 않는 별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은 구원하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향한 책망이 담겨 있다. 낯에 뜬 별은 비 객관화된 전쟁을 의미한다. 이반은 이제 전장이 아니면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낯이라도 스스로 빛나야 한다. 그토록 두려워한 불이 자신을 태워 구원해 줄 거란 신념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간호장교인 마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그녀 역시 군인들에겐 보호의 대상이지만 마샤가 느끼는 감정은 자작나무로 표현된다. 올곧게 선 나무를 잘라 가로 형태의 벙커로 만들고 그 속에서 숨 죽인 그들은 위태로워 보인다. 나무는 원래 숲에 있어야 하듯 마샤 역시 군인으로 있어선 안 된다 판단한 콜린은 그녀를 도주하게 도와준다. 그때 그들의 참호 위에서의 키스는 발 디딘 죽음과 공중에 떠 있는 삶처럼 보인다. 남성의 명분에 의해 일어나는 전쟁의 여성이 추구하는 사랑도 아이의 꿈도 모두 앗아간다. 거기에 아내를 잃고 폐허를 떠나지 못하는 노인은 전쟁이 무엇을 남겼는지 상기시킨다.
악에 받친 고집을 부려 전장에 남은 이반은 정찰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승리한 소련군은 이반의 흔적을 뒤진다. 혹시나 살아있진 않을까? 그들이 마주한 진실은 참수로 사망했다는 기록이었다. 자신을 증명하려 몸부림치던 이반의 마지막 꿈은 여동생과 사과를 잔뜩 실은 트럭을 타고 바다로 향하는 모습이다. 동생에게 사과를 건네나 받지 않는다. 젖었던 동생은 물기가 말라가며 표정을 잃어간다. 그들이 싣고 간 사과는 해안에 버려져 말들의 먹이가 될 뿐이다. 물은 앞서 말했듯 생명을 추구하나 건조해지는 모습을 통해 여동생이 죽었음을 의미한다. 이때 카메라는 배경을 네거 필름으로 촬영해서 노출이 심한 화면에 밝은 남매를 슬라이드 필름을 붙이는 연출을 통해 불행한 배경 속에 웃고 있는 그들을 보여주려 한다.
참수된 이반을 보여주고 이어지는 장면은 바다를 향해 달리는 이반과 여동생이다. 눈부신 햇살 아래 그들은 마냥 즐겁다. 죽음이라는 수단을 통해서야 마침내 그곳에 다다른다는 사실에 한없는 연민과 인간에 대한 염증이 밀려온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데뷔작을 통해 자신이 가진 염세적 세계관에 관한 질문을 만들었다. 영화 속 ‘묵시록의 네 기사‘는 이반이 혐오하던 독일인의 세계관이었지만 결론적으론 자신의 세계가 멸할 때 만나게 될 다른 세상을 꿈꾸었을지도 모르겠다. “독일인들은 예술을 하지 않아요. 책을 모아다 불태우는 걸 봤어요.” 이반의 이 말을 일말의 동정심조차 가지지 않으려는 절규였다. 죽음 만이 구원인 세상에서 이반은 산 것일까, 죽은 것일까? 모순된 세상에서 우리는 종전을 말할 수 있을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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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젤리나 졸려 작성시간 26.03.20 좋은 영화 선별해서
고퀄 감상문 남겨주셔서 감사해용~
소대가리님 글 읽는 조회수 보면 울 카페 방문객이 수가
거의 다일듯 ㅎㅎ
덕분에 카페가 연명합니다요~
감사감사~ -
답댓글 작성자코코아마녀 작성시간 26.03.21 맞아요. 고만고만한 영화만 알고 보는데 카페에 와 소대가리님의 영화리뷰를 보면서 아 이런 영화도 있구나. 참 좋구나. 한답니다. 어린이집엔
이야기 할머니 나인틴엔 영화 삼촌 -
작성자안경 선배 작성시간 26.03.20 1914나 서부전선 이다 이런 것들이 연상되네요. 이반이 얼마나 많았을까 슬픕니다. 전쟁이 21세기에 계속되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이 영화가 아직도 유의미하다는 것이 슬픕니다. 그런데. 타르코프스키 데뷔작 까지 다시 틀어야 할 만큼 영화가 없는 건가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