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도덕경』에 등장하는 芻狗(추구)는 짚으로 만든 개를 뜻한다. 제의가 행해질 때는 신성하게 받들어지지만, 끝나면 미련 없이 버려진다. 시스템 안에서 인간은 추구와 같고, 자신이 믿고 있는 정의와 신념은 체제라는 감옥 안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1917년 레닌과 그 일파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새 세상을 약속한다. 강력한 정권은 권력을 잡고 얼마 후 레닌의 사망으로 일시적 혼란을 겪은 뒤 스탈린이 집권한다. 체제는 개인을 억압하기 시작하고, 집권과 동시에 혁명을 주도한 동지들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숙청의 대상이 되며 공포 정치를 자행한다. 대숙청의 서막이었다.
<두 검사>는 대숙청의 절정의 시기인 1937년을 고정한다. 스탈린은 자신이 혁명을 완수한 이 나라에 의문을 품는 자는 누구든 숙청의 대상이었다. 이 기획을 지시하고 철저히 이행한 인물은 예조프였다. 그는 NKVD(내부인민위원부)를 창설해 탄압과 폭력을 실행한다.
<두 검사>는 부소불위의 권력 앞에 맞서는 검사를 따라간다. 그는 정의를 위한 걸음이라 믿지만, 그것은 프레임 속의 프레임일 뿐이다. 영화는 갇힌 감각을 형성하기 위해 4:3 화면비로 시야를 좁힌다. 이는 1930년대라는 시대 재현일 뿐 아니라, 인물들을 단독 숏으로 고립시키거나 오버 더 숄더 구도로 배치해 관계의 위계를 드러낸다. 정면과 대각선으로 놓인 의자들은 시선의 비대칭을 통해 권력 구조를 만든다.
고정된 카메라와 배제된 음악, 색이 억제된 미장센은 탈색된 시대의 풍경을 형성한다. 육중한 철문과 대비되는 검찰총장실의 화려한 공간조차 예외가 아니다. 모든 장소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감옥처럼 기능한다. 철문과 자물쇠는 열림의 장치가 아니라 가능성의 부재를 확인하는 장치다.
이 감각은 에드워드 호퍼의 고립된 공간과 프란시스 고야의 불안한 명암을 차용한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감각하며 고립을 만든다. 명암은 밝음으로 가려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남 자체를 긴장으로 바꾼다. 언어와 색채가 빠진 세계 위에 체제라는 현실이 놓인다.
거기엔 계단이 있다. 권력자를 만나는 일은 위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일이다. 부소장과 소장을 접견한 뒤 코르네프는 지하 감옥의 수감자인 스테프냐크를 만나기 위해 이동한다.
지하 깊숙한 수용소로 내려가는 장면은 계단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평면적인 이동만이 반복되며, 그들의 회동은 상하의 구도가 아니라 평등과 연대의 감각으로 구성된다. 고결한 검사와 노동자를 위해 혁명의 선봉에 섰던 죄수는 혈서로 쓴 내부 고발의 진위를 밝히고, 혁명의 의미를 바로 세우려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순수하고 영웅적인 의지는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가장 어리석은 시도로 전락한다.
스테프냐크는 코르네프에게 스탈린이나 예조프를 찾아가라고 말하지만, 코르네프는 검찰총장에게 먼저 도움을 청한다. 흑막의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무지가 곧 비극의 핵심이다. 결국 정의로운 진실은 갈 곳을 갖지 못한다.
코르네프의 또 다른 결점은 선민의식이다. 그는 두 번 열차에 오른다. 첫 번째는 농민과 노인, 상이용사가 탄 기차다. 혁명 당시 팔다리를 잃은 상이용사는 레닌과 스탈린의 시간을 증언하려 하지만, 코르네프는 귀찮다는 듯 잠들어 버린다. 두 번째는 검찰총장이 마련한 특실이다. 그곳에서는 시시껄렁한 농담이 오가고, 고급스러운 차림과 공간 속에서 그는 오히려 깨어 있다. 술을 나누고 그들에게 관심을 보인다. 앞선 노인은 그를 깨우려 했지만 외면당했고, 뒤의 사람들은 그를 잠재운 채 체포로 이끈다. 결국 그는 혁명의 숭고함을 믿는 공산주의자였지만, 계급에 따라 사람을 구분 짓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코르네프와 스테프냐크가 보지 못한, 혹은 외면한 혁명의 본질이다.
영화의 비극성을 극대화하는 장치는 이항대립적 요소들이다. 상행열차와 하행열차를 타는 코르네프는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라, 동일한 인식이 다른 방향으로 분기된 존재다. 상행에서 자신의 신념만을 믿던 검사는 하행에서 체포되어 좌절한다. 기차라는 경험을 통해 그는 세계의 방정식을 뒤늦게 이해한다. 이미 폭력이 기본값인 세계에서, 혼자만 정의로웠던 이의 좌절이다.
알렉산드르 필리펜코가 연기하는 1인 2역의 스테프냐크와 상이용사 역시 같은 구조다. 전자는 권력의 언어이고, 후자는 권력의 몸이다. 탄원서를 태우는 행위와 몸만 남은 상태는 서로를 보완하며 체제의 진실을 구성하지만, 코르네프에게는 끝내 전달되지 않는다.
이항대립은 순환의 형식으로도 나타난다. 교도소 소장과 부소장의 대화 속 라데크의 농담이 그것이다. 혁명가 라데크는 감옥에서 출소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또 다른 감옥이라는 이야기다. 이미 투옥된 스테프냐크와 곧 입감될 코르네프를 예고하는 구조다. 혈서는 체포 영장으로 돌아오고, 영화의 시작과 함께 열리던 철문은 닫히며 끝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철문은 열렸으나 다시 닫힐 뿐이다.
스탈린 이후 폭력은 직접적인 형태를 버리고 배제라는 무형의 방식으로 지속된다. 스스로 芻狗(추구)가 되지 말길 바란다. 우리는 의미 없이도 존재한다. 쓰임이 아니라 있음에 머무는 태도, 그것이 생존이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소대가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4.25 고골이나 카프카의 표현 양식도 끌어오려 했으나 먼저 쓰신 리뷰를 보고 뺐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안경 선배 작성시간 26.04.25 소대가리 왜요 써주세요 카프카 궁금궁금
-
답댓글 작성자소대가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4.25 안경 선배 댓글 달셨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안경 선배 작성시간 26.04.25 소대가리 아쉽넹... 아무튼 혹시 보시게 되면, 올란도, 힌드의 목소리, 침묵의 친구 댓글 준비 완료!
-
작성자코코아마녀 작성시간 26.04.28 다 읽고나니 배경이 우리나라가 아닌데 맞다고 해도 이질감이 없네요. 오늘도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