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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아비투스의 그림자와 헥시스로 된 몸 <르누아르> 리뷰

작성자소대가리|작성시간26.05.22|조회수103 목록 댓글 5


피에르 브루디외는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통해 한 사람의 자라온 환경에는 무의식적으로 체화된 취향과 언어, 욕망이 삶의 구조 속에 스며들어 있다고 말한다. <르누아르> 속 어린 후키는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그 감각을 익혀간다. 공간과 관계 속에서 논리적으로 배워야 할 부분들을 가르쳐줄 어른은 부재하고, 사회의 존재 양식을 분위기와 리듬을 읽으며 몸으로 습득한다. 영화는 지금 세대의 몸에 새겨진 계급적 감각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제목인 ‘르누아르’는 같은 맥락에서 하나의 플롯처럼 작동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은 따뜻한 빛과 안온한 일상 속 풍요로운 부르주아적 삶을 담아낸다. 그러나 그 밝은 표면 아래에는 불안과 붕괴의 기운이 흐른다. 영화는 찬란했던 80년대를 바라보던 일본이 외면한 풍경, 즉 르누아르를 감상하면서도 작품의 아름다움에만 몰두하는 문화자본적 시선을 직시한다.

영화는 비디오로 재생되는 아이들의 울음으로 시작한다. 후키가 그 화면을 바라보는 장면을 다시 관객이 응시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인 경험보다 매체를 통해 접하는 타인의 눈물이라는 설정은 오프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감정이 어떻게 소비되고 재현되는지를 배우게 만드는 장치가 비디오인 셈이다. 원래 울음은 몸이 견디지 못할 때 터져 나오는 즉각적인 생리 반응이다. 그러나 화면 속 울음은 기록 장치에 의해 반복 재생되는 이미지다. 후키는 영상을 보고 슬퍼하거나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저 흥미롭게 바라볼 뿐이다. 감정과 이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영상은 현실의 복제물이자 시간을 붙잡아두는 장치가 된다.

기억 속에 편입된 이미지들은 글쓰기라는 형태로 정리된다. 학교 과제로 주어진 에세이 작성이지만, 후키에게 그것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다. 파편처럼 흩어진 현실을 쓸어 모으는 행위이지만, 감정은 언어를 넘어서고 무언가를 명확히 하려는 순간 오히려 불안과 상실이 먼저 마음에 도착한다. 후키의 작문은 독특하지만, 말 이전의 감각을 더듬는다.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글쓰기와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질서와 규범에 맞춰 자기 생각을 ‘올바르게’ 표현해야 하는 정규 교육은 억압이자 족쇄처럼 작용한다. 그것은 익숙하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글쓰기보다 균열을 먼저 목격하는 일임을 후키는 배워간다.

아이의 성장에는 납득의 과정이 필요하다. ‘지남’이란 단순한 시간의 흐름만을 뜻하지 않는다. 기억의 인과는 삶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이유를 만들어낸다. 후키의 가정은 이미 무너지기 직전이다. 시한부인 아버지는 삶에 대한 집착과 무기력을 동시에 지녔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어머니는 자신의 커리어에 몰두한다. 후키는 그런 어른들을 바라보며 생활의 리듬을 체화한다. 삶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익힌다. 어머니의 에어컨은 감정의 온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고, 아버지는 병원에서도 일을 붙들며 현실을 왜곡하려 한다. 그런 아이러니 속에서 후키가 도피할 수 있는 곳은 텔레비전 속 초능력과 마술뿐이다. 죽음이 차라리 자신의 몫이기를 바라고, 타인의 마음을 읽고,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싶은 욕망이 그 안에 있다.

내부의 불안정 속에서 후키는 외부를 탐색한다. 영어라는 낯선 언어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지만, 자신과 다른 친구들의 가정 역시 결국 비슷한 균열을 안고 있음을 깨닫는다. 가족 밖 세계에 대한 탐구는 폰팅으로까지 이어지지만, 그 끝에서 마주하는 것은 공허한 관계와 자유롭지 못한 어른들의 고독이다. 후키의 경험들은 물과 불의 이미지로 메타포화된다. 흘러가다 윤슬처럼 반짝이고, 타오르다 끝내 사그라든다.

결국 어른들의 인생은 경마장과도 같았다. 우연에 기대고, 욕망에 패배하며, 다시 중독된다. 트랙 위를 달리는 말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중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모두 결승점을 향해 달려가지만, 정작 왜 달리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 불안정한 우연에 기대를 건다. 소란과 소음은 소녀에게 설명할 수 없는 혼돈을 안겨주고, 어른들의 쾌락은 현실을 잠시 가려버린다.

영화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존재는 열차뿐이다. 아직 열 살인 후키는 어른들이 정해놓은 선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풍경이 옆으로 스쳐 지나가듯 삶은 중요한 순간들을 이해하기도 전에 흘려보낸다. 열차의 진동은 시간의 리듬이 되고, 그 흔들림은 인간을 조금씩 빚어낸다. 후키와 우타코는 그 안에서 잠시 모녀만의 시간을 갖는다. 카드의 숫자와 무늬를 맞히는 마술은, 달리는 현실 속에서도 아이의 환성을 지켜주고 싶은 모성의 몸짓이다. 잠시라도 아이가 아버지의 병과 가족의 침묵,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괜찮다는 말 대신 건네는 애정이다. 원어민 선생님의 위로 역시 마찬가지다. 통제와 번역으로 이루어진 세계 대신, 감당하기 힘든 아픔은 결국 몸에 밴 언어로만 전달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버지 케이지의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분위기로 다가온다.

병원의 냄새, 길어진 침묵, 창밖으로 쏟아지던 빛 속에서 후키는 어딘가가 무너지고 있음을 감각한다. 살아남으려는 그의 노력은 세계와 끝까지 연결되려는 몸짓이다. 병원 창에 줄을 거는 행위는 아직 살아 있다는 작은 외침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생을 마감한다. 후키는 알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죽음을 이해하려 했던 모든 순간들, 물 위에 타오르던 불빛을 바라보던 순간과 비디오 속 우는 아이들을 보며 죽음에 관한 에세이를 쓰던 일, 전화로 낯선 이와 통화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후키는 상실이 슬픔을 넘어 삶의 태도가 될 수 있음을 배운다. 그러나 절망하지는 않는다. 죽음으로 인해 생겨난 감정을 끝내 설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창에 걸린 끈을 떼어 상자 안에 넣는다. 영화는 정리된 침상을 비추며, 세상은 결국 사라지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조용히 말한다.

영화의 기조는 엔딩에서 뒤집힌다. 선상 댄스 장면은 인간이 끝내 몸을 움직이며 살아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는 순간처럼 보인다. 배는 물 위를 유영하고, 그 흔들림은 세계의 불안정성을 닮아 있다. 후키가 지나온 시간과 경험은 몸을 흔드는 그 떨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우리는 모두 무너짐을 안은 채 움직인다. 삶은 되돌릴 수 없고, 상실은 반복되며, 죽음은 자명하다. 중심을 잃지 않고 서 있는 방법은 결국 타인과 리듬을 공유하는 일뿐이다.

소마이 신지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하야카와 치에는 폭발 대신 침잠을 택한다. 공기와 빛으로 이미지를 그려내는 르누아르의 회화처럼. <르누아르>는 그런 영화였다. 보고 나면 명확한 결론보다 오래 흔들리는 감각 하나가 마음속에 남는 영화. 마치 물 위에 비친 불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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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House | 작성시간 26.05.22 첫 댓글에 미안한데 킁킁.
  • 답댓글 작성자안경 선배 | 작성시간 26.05.22 전혀 어려운 영화 아니에요 소녀 좋잖아영
  • 답댓글 작성자House | 작성시간 26.05.22 안경 선배 예뻐요?
  • 작성자안경 선배 | 작성시간 26.05.22 긴 리뷰 반갑습니다. 아이가 안타까웠어요 어른 각자의 고민으로 아이를 슬픔과 불안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자명한 죽음앞에 두려움을 딛고 숨쉬게 하는 것은 타인과의 교류가 맞긴 합니다. 그 타인이 나쁜 사람이 아니길 바라는데 그건 운에 맡겨야만 하는 것 같아 무섭네요.
  • 작성자코코아마녀 | 작성시간 26.05.22 한번에 내용이 안들어와서 두번 세번 읽었어요. 어려워도 소대가리님 글은 늘 좋습니다. 오늘도 좋은 리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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