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강론

남편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여인, 이성례 마리아

작성자이기우|작성시간23.09.14|조회수128 목록 댓글 5

남편과 아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여인, 이성례 마리아

1티모 3,1-13; 루카 7,11-17 /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2023.9.19.;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마침 외아들이 죽어서 장례를 치루는 과부를 만나셨습니다. 남편이 먼저 죽은데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죽었으니, 보통 사람들이 겪지 않는 불행을 이중으로 겪게 된 과부의 슬픔에 함께 하고자 고을 사람들도 큰 무리를 지어 함께 가고 있는 행렬과 마주치신 겁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과부가 얼마나 커다란 슬픔에 빠져있는지 알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엾은 마음이 드신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던 과부를 위로하시고 이미 죽어서 관에 들어가 있는 젊은이를 살려주셨습니다. 

  한국의 천주교회사에도 나인의 과부 못지않게 슬픈 과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의 아내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충청도 내포의 사도로 일컬어지는 이존창 루도비코의 사촌누이의 조카딸입니다. 최경환과 혼인한 이후 고향인 충청도 홍주 다락골과 재산을 버리고 경기도 부평, 수리산 등지의 교우촌으로 옮겨다니며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을 겪으면서 네 아들을 키웠습니다. 

 

  기해박해(己亥迫害)로 알려진 1839년 박해 때에, 큰 아들 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남편 최경환이 한양과 수리산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고 교우들을 돌보며 수리산 뒤뜸이에 모여 살던 교우촌의 회장 역할을 하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는데, 최경환과 이성례는 조금도 소란을 피우지 않고 음식을 준비하여 포졸들에게 대접한 다음 체포되어 당시 서대문 근처에 있던 경기 감영에서 문초를 받았습니다. 남편 최경환이 먼저 치명하고나서 아직 갓난 아기였던 넷째가 품 안에서 굶어죽는 참상을 당했습니다. 교우촌 신자들이 몽땅 잡혀오는 바람에 사식(私食)을 넣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던 감옥 형편에서 관식(官食)도 주지 않아 어머니가 굶주리니 젖이 나오지 않아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겁니다. 

 

 

  이렇게 되자 이성례의 모성애가 극에 달했습니다. 품 안에서 죽은 아기를 보니 문전걸식을 하고 있을 둘째와 셋째 아들도 굶겨 죽일까봐 겁이 더럭 났던 겁니다. 그래서 아들들을 찾아보겠다고 하자, 배교해야 풀어주겠다는 바람에 일시 배교를 하고 자식들을 찾고 나니 남편과 큰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감영에 찾아가 스스로 옥에 갇혔고 세 차례나 고문을 당한 후 사형 선고를 받고 당고개 성지에서 치명했습니다. 이 장면을 그린 영화 ‘초대받은 사람들’에는 이 당시 살아남은 두 아들이 휘광이를 찾아가서 구걸하여 모은 동전을 주며, 사형장에서 어머니가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도록 단칼에 베어달라는 눈물 어린 호소를 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1840년에 순교한 이성례 마리아는 한번 배교했다는 이유로 1984년에 열린 시성식의 심사에서 제외되었다가 2014년에 열린 시복식에서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품 안의 아기에게 젖을 먹이지 못해서 굶겨 죽여야 했던 처참한 상황에서 모성애가 발동하는 일은 극히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일이요, 나머지 어린 아들들을 염려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인간성의 발로입니다. 그러므로 살아남아 걸식하고 있던 아들들을 위해 일시 배교한 일은 치명의 보류이지 신앙을 배반한 일이라고 보는 것은 과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죽은 외아들을 다시 살려서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함께 치명한 아홉 교우가 모두 1925년에 시복되고 1984년에 시성되었는데, 이성례 마리아만 빠졌다가 2014년에야 성인품에 오른 일을 생각해 보면, 교회의 처사가 야박하게 느껴지고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과부를 가엾어 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용서하신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죽기 직전 감옥에 찾아온 둘째와 셋째 아들에게 이성례 마리아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6년에 순교한 지 3년 후에 조선에 돌아온 이성례 마리아의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2년 동안 혼자서 해마다 7천리 길을 걸어다니며 120여 군데의 교우촌에서 성사를 집행했고, 한글로 된 천주가사와 성교요리문답을 지어 교우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짧은 생애 동안 빛나는 순교로 교우들에게 모범이 되었다면,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나이 마흔에 과로로 숨질 정도로 순교보다 더 힘든 교우촌 사목자로서 모범이 되었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는 각자가 받은 은사로 박해에 시달리는 조선 천주교회에서 신앙의 등불이 되었습니다. 김대건은 첫 사제 순교자로 대접받고 있고, 최양업도 사제로서 김대건 다음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최경환도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지만, 이성례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데레사강 | 작성시간 23.09.19 이분들의 신앙이 제마음의 등불이 되어 밝혀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오늘도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실천할수 있는
    신앙인으로 살수 있게 이끌어 주십사 기도 합니다.

    신부님 너무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이기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9.19 네, 저도 어줍잖은 강론이나마 잘 읽어주시고 이처럼 꼬박꼬박 댓글도 달아주시니 고맙습니다. 복녀 이성례 마리아의 이야기는 생각할 때마다 슬퍼서 마음이 아리기까지 합니다. 오늘자 강론을 쓰면서도 또 그랬습니다. 울면서 쓴 강론입니다. 그래서 마무리를 ‘...’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작성자데레사강 | 작성시간 23.09.19 아 ~ 그러셨군요

    왜 그렇게 마무리를 하셨을까 궁금했답니다.
    신부님 말씀 하시니
    이해가 조금이나마 됩니다.

    사실 그분에 대한 글 처음 접했 거든요.
  • 작성자데레사강 | 작성시간 23.09.19 임복남 마리안나에게
    신부님 강론글 매일 보내 주거든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가족사를 잘 몰랐는데
    자세히 알려 주시어 감사 하다고 썼어요

    신부님께 너무 감사 하다고 하네요.
  • 답댓글 작성자이기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9.19 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