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이 할머니께 11월 배움터 알림장을 전해드리러 가겠다며
10분쯤 뒤에 찾아가도 괜찮으실지 전화로 여쭈었습니다.
"괜찮아요, 와요."
헬맷을 쓰고, 자전거에 발을 올렸습니다.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기분이 상쾌합니다.
백담사 지나 용대초등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 안으로 쭉 들어가야 중원이네입니다.
등쪽에 땀이 살짝 배어나올 만큼 몸에 온기가 돌자
드디어 중원이 집이 나옵니다.
똑똑, 노크를 하니
일전에 뵜던 중원이 할머니께서 문을 열어주십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드리고 들어갔습니다.
중원이 할머니가 내주시는 커피를 받아들었습니다.
따뜻한 온기와 달콤함이 포근합니다.
"직접 주러 안 와도 되는데, 수고스럽게"하시는
중원이 할머니 얼굴에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합니다.
지난 번에 중원이가 집에 갔을 때
김장 준비하시던 게 생각나
"지난 번에 김장 준비하시더니, 김장은 하셨어요?" 여쭈니
"주말에 중원이 큰아빠하고 친척들이 내려와서 했지. 한 번 더 해야되~"하십니다.
배움터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활동인 '김장김치 하는 날'.
"김치 담그실 때, 우리집 아이와 아이 친구 서넛 정도(혹은 동네 아이 서넛)가서
배추 한 두 포기만 담궈봐도 될까요?"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드릴 활동.
'다음에 중원이 할머니께 여쭈어야지'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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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럽게 중원이 칭찬할 거리가 나왔습니다.
알림장에 담긴 감사기록을 보실 때
배움터에서 동생 잘 챙기고,
선생님들 편에서 배려하는 중원이 부분을 자세히 말씀해드렸습니다.
"중원이가 잔정이 참 많아요."하니
할머니 표정이 온화해지시며 말문을 여십니다.
"중원이 걔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그런 걸 잘 해요.
하루는 여름에 밭에서 일하고 있으니까, 커피를 타오더라고요.
어느 집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렇게 하라고 하겠어요.
물론 좀 싱겁긴 해도 맛있게 먹어줬지요.
나중에 따로 불러, 커피를 하나 넣으면 물을 이만큼 넣어야 하니
물이 많으면 커피도 많이 넣어야 한다고 일러줬어요.
언제던가, 하루는 저더러
'할머니, 언제쯤 식사하실 거에요?'하기에 '한 두 시쯤 할까 생각 중이야'했어요.
잊어버리고 한참 밭일하고 있는데,
중원이가 무얼 쟁반에 싸오길래 보니
집에 끓여놓은 곰탕을 데워, 비닐봉지에 담아서 대접에다 딱 받치고
김치, 밥을 싸서 '할머니, 출출하시죠? 드세요'하고 갖고 오는 거에요.
제가 그 날 밥이 진짜 꿀맛이었어요."
"와... 정말 대견하네요. 잔정많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 일 줄은 몰랐어요.
중원이가 더 새롭게 보여요. 정말 놀랐어요, 할머니." 했습니다.
"중원이 작년하고 올해 담임 선생님도 그러대요.
애가 요즘 애 같지 않다고, 선생님이 뭐 들고 있으면
'선생님, 제가 도와드릴까요?' 먼저 묻는다고요."
손주 자랑, 칭찬. 어느 할머니가 마다하시겠습니까?
키우시다보면 마음 아프거나 안쓰러운 면도 있겠지만
그걸 깊게 묻거나 파고들기보다
당당하실 이야기, 자랑스레 내세울 이야기를 끌어내고자 애썼습니다.
할머니 자랑할 만한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놀랄 만한 이야기였고,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한 아이의 강점, 장점이었습니다.
"우리 애 자랑일 수도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제가 불 떼고 있으면
'할머니, 제가 도울 거 없어요?'해요.
제가 하다못해 뭐라도 끌고 있으면
뒤에 와서 밀어주고 그래요.
어느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러라고 시키겠어요.
다 지가 알아서 하는 거죠.
학교 가는 것도,
제가 밭일가고 그러니 딱딱 못 챙겨주지만
그래도 학교가라고 깨운 적이 없어요.
시간 되면 알아서 챙길 것 챙겨 가더라고요."
중원이가 자기관리 잘 하는 거라고,
어른 되어서도 누군가 챙겨주지 않으면
자기 일도 스스로 알아서 못 하는 사람도 있는 시대에
중원이는 참 대단한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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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지시 공연 이야기도 꺼냈습니다.
"할머니, 알림장에 써있던 거요.
11월 20일에 인제에서 뮤지컬 공연하는 거,
중원이랑 가실 생각 있으세요?"
서울에서 했었고
내년에는 미국에서 공연하는 좋은 공연이라고,
아이들도 볼 수 있는 춤과 노래가 흥이 나는 내용이라고
할머니께 설명했습니다.
"가볼까... 일이 없으려나 모르겠네. 혹시 현수네도 가나?" 물어보십니다.
현수는 배움터 안 다니고 있다고 말씀드리니
"여름에 현수네가 물가에서 동네 애들이랑 고기 구워먹는다길래
고기 값 삼 만원인가? 주고 중원이 보냈었지~ 그래서 혹 가나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하십니다.
할머니께 집에 타고 갈 차는 있으신지,
운전하실 할아버지는 같이 가실 수 있으실지 여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일이 없어야 갈 수 있는데..." 하시기에
"할아버지 못 가시면 현수네 가는지 물어보고, 간다고 하면
할머니가 가시든 못 가시든 같이 태워줄 수 있는지 물어볼까요?" 하고 다시 여쭈었습니다.
"어, 그럼 물론이지." 하십니다.
공연 관람을 구실로 현수네를 만날 명분이 생겼습니다.
걸언하니 기존의 좋은 관계를 알게되고
그 관계를 유지, 개선, 강화할 여지가 드러납니다.
다음에 이웃에 걸언할 좋은 명분도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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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 사회사업, 어렵지 않고 단순합니다.
그리고 실익이 분명합니다.
알림장을 구실로
아이의 보호자를 찾아뵙고
인사하고 여쭙고 의논하고 부탁드리며 가능합니다.
아이의 좋은 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을 뿐입니다.
없는 장점 억지로 만들어내란 말이 아니라
평소 아이가 잘한 일, 아이의 좋은 면이 드러난 경우를 잘 기억해두었다가
아이의 부모님, 선생님을 만났을 때
그 얘기부터 시작하면 편안합니다.
상대가 아이의 문제, 어려움을 꺼내더라도
그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됩니다.
어려운 문제, 단점 이야기 하시면 잘 들어드리되,
물 흐르듯 흘려 보내면 그걸로 족할 때가 많습니다.
'나마저' 아이와 아이의 가족을 기죽게 만들기보다
아이의 강점, 장점에 적극 반응하여
부모님이나 보호자로 하여금
우리 아이 자랑하고 싶고, 칭찬하고 싶게 만드는 '기 살리는' 사회사업!
배움터에 돌아와 천강희, 임영주 선생님께 이야기를 전해드리니
임영주 선생님께서 이 기록 그대로 기관에서 쓰는,
개별 아동 '아동성장기록부(아동관찰일지, 아동신상명세서, 아동이용신청서)'란에 담자고 하십니다.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까지 말씀해주시는 임영주 선생님, 고맙습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한덕연 작성시간 10.11.02 "키우시다보면 마음 아프거나 안쓰러운 면도 있겠지만
그걸 깊게 묻거나 파고들기보다
당당하실 이야기, 자랑스레 내세울 이야기를 끌어내고자 애썼습니다.
할머니 자랑할 만한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 그렇게 여쭙고 그렇게 반응해 드린 것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중원이가 자기관리 잘 하는 거라고,
어른 되어서도 누군가 챙겨주지 않으면 자기 일도 스스로 알아서 못 하는 사람도 있는 시대에
중원이는 참 대단한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 진심으로 드린 말씀일 테니 이 또한 좋은 반응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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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덕연 작성시간 10.11.02 이주상 선생님이 제안하는 강점 사회사업,
과연 어렵지 않고 단순해 보입니다.
무슨 이야기로 대화를 이끌면 좋을지,
아이의 문제나 어려움을 언급하실 때는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습니다.
평범한 예로써 충분히 할 수 있는 강점 사회사업입니다. -
작성자김혜영(꽃대) 작성시간 10.11.05 [ 중원이가 무얼 쟁반에 싸오길래 보니 집에 끓여놓은 곰탕을 데워, 비닐봉지에 담아서 대접에다 딱 받치고
김치, 밥을 싸서 '할머니, 출출하시죠? 드세요'하고 갖고 오는 거에요. ]
할머니께서는 시키지 않아도 중원이가 잘 한다 하시는데, 중원이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하며
자연스레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겠죠?
주상오빠. 하루, 하루 신나겠어요. 나눠줘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