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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한국철학(9) - 선불교(선종)가 들어오다

작성자촌사람(이동민)|작성시간26.06.08|조회수19 목록 댓글 2

   선불교가 들어오다.

 문경 가은에 봉암사가 있다. 봉암사는 최치원이 쓴 글의 비석이 있다. ‘지증대사 적조비’이다. 이 비석에는 선불교가 신라에 들어오는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적어 놓았다. 최치원과 동시대의 일임으로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가 아주 높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화엄불교의 극성기였다. 의상을 중심으로 불교 교단에서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시대는 전 백성의 8-90%가 불교 신자라고 하였다. 이때 중국에서는 선불교가 유행하였다.

 

 중국으로 유학을 갔던 신라의 구법승은 중국의 선불교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41대 헌덕왕 13년(821)에 도의가 당에 가서 선불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신라에는 교종 계열인 화엄불교가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경주에 선불교로는 발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도의는 북쪽의 북쪽인(최치원 비석의 표현이) 설악산 아래에 진전사를 짓고, 선불교를 퍼트렸다.

 도의가 가지고 온 선종은 남종선으로 6조 혜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육조 혜능의 전설적인 이야기능 ‘돈오(頓悟)설’ 즉 깨달음이란 마음을 닥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얻어진다.‘는 것이다. 당시에 유행한 화엄불교는 마음을 닦고, 또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다.(漸修)고 주장했다. 그래서 항상 깨달음을 찾으려 노력(수행)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려면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또 공부하여 한 발, 한 발씩 다가가야 한다는 주장이다.(점수)

 선불교가 점차 화엄불교를 누르면서 교세를 펼쳐나갔다. 유명한 선종 스님들은 지방애 선종사찰을 지어서 점점 불교의 중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왕실도 선종 사찰을 차별없이 대우해 주었다.

 신라말이 되면 교종사찰이 선종사칠로 간판을 바꿔어 다는 절도 많이 나타난다.

 (돈오는 어느 한 순간에 깨달음이 확 느껴져서 ’아하 맞다‘하고 무릎을 탁 친다. 그래서’아하 경험‘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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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栢松 | 작성시간 26.06.09 한국철학-선불교(선종)가 들어오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화엄불교의 극성기였다. 의상을 중심으로 불교 교단에서 적극적으로 포교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시대는 전 백성의 8-90%가 불교 신자라고 하였다. 이때 중국에서는 선불교가 유행하였다.
    중국으로 유학을 갔던 신라의 구법승은 중국의 선불교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41대 헌덕왕 13년(821)에 도의가 당에 가서 선불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신라에는 교종 계열인 화엄불교가 불교계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경주에 선불교로는 발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도의는 북쪽의 북쪽인(최치원 비석의 표현이) 설악산 아래에 진전사를 짓고, 선불교를 퍼트렸다.
    도의가 가지고 온 선종은 남종선으로 6조 혜능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육조 혜능의 전설적인 이야기능 ‘돈오(頓悟)설’ 즉 깨달음이란 마음을 닦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순간에 얻어진다.‘는 것이다. 당시에 유행한 화엄불교는 마음을 닦고, 또 닦아서 깨달음을 얻는다.(漸修)고 주장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려면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또 공부하여 한 발, 한 발씩 다가가야 한다는 것이다.선불교가 점차 화엄불교를 누르면서 교세를 펼쳐나갔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촌사람(이동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9 우리의 조계종은 고려 때 지눌이 불교의 타락을 개혁할 목적으로 시령의 거조암에서 구상하여 선종과 교종을 결합한 조계종을 제시합니다 고려 왕이 지리산 자락에 수선사라는 절을 내리고 --- 그 절이 오늘의 송광사입니다; 지늘은 고려 초대 국사가되어서 '보조 국사 지눌이라 합니다; 송광사는 고려 때 16국사가 배출되어서 승보 사찰이라고 하고요. 지눌, 거조암, 조계종 등등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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