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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22) - 고려 말의 유학 이론

작성자촌사람(이동민)|작성시간26.06.21|조회수13 목록 댓글 1

    고려 말의 유학 이론

 1055년에 최충이 사숙을 열어 유학을 가르쳤고, 안향이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유학 이념이 정치 이념으로 자리를 잡자 고려 말에는 많은 유학자들이 중앙 정부에 포진해 있었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유학자들은 자기들의 이념에 따라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었다. 유학자들의 분파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현실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방법의 문제였다. 방법론이란 것이 실리를 챙길 것인가, 의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가 이다. 이러한 파벌 의식(또는 파벌 문화라고 할 까?)은 조선 초까지도 이어진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파벌 존립의 가치관도 바뀐다.

 그렇다면 유학자들이 목숨까지 걸개 헌 성리학의 바탕도 조금 알고 넘어갑시다.

 

“이 세상은 理와 氣라는 두 가지의 근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理가 氣를 우선한다. 理는 자기 스스로 운동을 나타날 수 있으나, 氣는 스스로 나타날 수가 없다. 스스로가 아니고 만들어져야 나타난다. 理가 氣의 원천이 된다.”

 

 이것이 성리학의 기본 논리이다. 어려우니 따지지 말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갑시디. 氣는 변화가 잘 오는(해딱해딱 잘 하는) 마음(心理)과 관련이 깊다. 理에 너무 무게를 두었다 싶어서인지 理는 氣의 도움을 받아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식으로 물러선다.(主氣論이다.) 그러나 理는 불변부도의 절대자이다.(主理論)이다.(기의 도움만 받으면 해딱해딱 변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리론이 조선 성리학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 중국 이론은 理와 氣가 동격으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와 중국과 차이이다.

 

 고려 말에 우리나라 유학자들도 현실을 대응하는 방법이 차이를 드러냈다.

 고려 왕실 보존자 학자 — 이색, 정몽주, 길재이다.(절의파가 된다.)

 조선왕조 건국을 주장한다.-- 점도전, 하륜, 권근 등이다.

 이것을 의리론자(의리파. 절의파)와 관학파로(관직에 나아가는) 나누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과 더불어 고위직에 관학파들이 많이 채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왕의 입장으로서는 변소가기 전과 후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왕이 된 후에는 절의파가 필요할까. 관학파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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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栢松 | 작성시간 26.06.22 new 한국철학- 고려말의 유학이론
    1055년에 최충이 사숙을 열어 유학을 가르쳤고, 안향이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유학 이념이 정치 이념으로 자리를 잡자 고려 말에는 많은 유학자들이 중앙 정부에 포진해 있었다.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유학자들은 자기들의 이념에 따라 반대파와 찬성파로 나뉘었다. 유학자들의 분파가 일어났다.
    이것은 현실 대응에 대한 방법의 문제였다. 방법론이란 실리와 의리 중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뭐냐 이다. 이러한 파벌 의식은 조선 초까지도 이어진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유로 파벌 존립의 가치관도 바뀐다.
    성리학의 기본논리는“이 세상은 理와 氣라는 두 가지의 근본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理가 氣를 우선한다. 理는 자기 스스로 운동을 나타날 수 있으나, 氣는 스스로 나타날 수가 없다. 스스로가 아닌 만들어져야 나타난다. 理가 氣의 원천이 된다.”이다.
    氣는 변화가 잘 오는 마음(心理)과 관련이 깊다. 곧 理는 氣의 도움을 받아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식으로 물러선다.(主氣論.) 그러나 理는 불변부도의 절대자이다.(主理論)이 성리학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유학자를 고려왕실보존의 절의파와 조선건국의 관학파로 나누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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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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