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방랑 시인
마쓰오 바쇼
松尾芭蕉
| 출생일 | 1644년 |
|---|---|
| 사망일 | 1694년 |
| 본명 | 마쓰오 무네후사(松尾宗房) |
| 국적 | 일본 |
| 대표작 | 《노자라시 기행(野晒紀行)》, 《오쿠노 호소미치(奧の細道)》 |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촌철살인의 명구로 오늘날까지 일본인의 가슴을 울리며 많은 사랑을 받는 하이쿠 시인.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음유시인. 하늘을 지붕 삼아 살고 싶었고, 그저 그날 밤 잘 곳을 찾을 수 있기만을 바랐던 방랑 시인 마쓰오 바쇼.
하이쿠는 에도 시대에 발달한 전통시의 형태로, 5-7-5의 음수율을 지닌 17자로 된 정형시이다. 근세에는 하이카이로 불렸으나 메이지 시대각주1) 에 하이쿠라는 명칭으로 정착했다. 하이쿠는 상류층의 와카나 렌가와 대조적으로 골계성을 강조한 말장난의 일종으로, 서민층에서 크게 유행했다. 하이쿠를 놀이가 아닌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인물이 바로 마쓰오 바쇼다. 바쇼는 말장난 유희에 불과했던 하이쿠를 풍류와 풍자가 담긴 자연시로 끌어올렸다.
바쇼는 1644년 이가국(미에 현 이가 시)에서 마쓰오 요자에몬의 2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쓰오 무네후사이다. 농민 집안이어서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청년 시절 무사인 도도 요시타다 아래에서 고용살이를 했다. 이때 요시타다를 따라 이름난 가인이었던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을 만나면서 하이쿠에 눈을 떴다.
바쇼는 23세 무렵 요시타다가 죽으면서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형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앞으로 먹고살 일을 궁리하면서 바쇼는 무사가 될지 승려가 될지 고민하다 결국 자신에게는 오직 하이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9세가 되던 해 바쇼는 고향을 떠나 에도로 떠났다. 그는 '도세이(桃靑)'라는 호로 활동하며 일약 촉망받는 신인 하이쿠 작가로 떠올랐다. 35세 무렵에는 그의 문하생이 되기를 자처하는 시인들이 줄을 이을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바쇼는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은거와 방랑의 길을 택했다. 유망한 하이쿠 시인으로서 앞날이 창창했던 바쇼는 37세 무렵의 어느 날 돌연 후카가와에 파초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어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선종 수행법을 배워 참선하고, 《장자》를 비롯해 두보, 이백, 소동파 등 중국 고전을 탐독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잦은 방랑길에 올랐다.
마흔 살 무렵 가을 바쇼는 총 9개월간의 긴 여행을 시작했다. 방랑 인생의 시작이었다. 바쇼는 에도를 출발해 도카이도, 사요나카야마, 이세, 야마토, 요시노 산, 비와 호, 나고야, 우에노, 나라, 교토, 오쓰 등을 기행했고, 이 경험은 《노자라시 기행(野晒紀行)》이라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노자라시(野晒)'란 '비바람을 맞으며 백골이 되었다'는 의미로, 제목답게 목숨을 건 힘든 여행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여행은 그의 작풍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재치 있는 언어유희적 하이쿠를 지었던 바쇼는 보다 느긋하게 자연을 즐기고, 솔직하게 생과 자연의 진실을 포착해 내는 작품을 읊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문하생과 하이쿠 추종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바쇼는 하이쿠의 일인자로 부상했다. 그의 작품들은 교토와 에도는 물론, 일본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바쇼는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암자에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생활을 하고 참선 수행을 했다.
받아서 먹고, 청해서 먹고, 굶주려 죽지도 않은 채 한 해가 저무니 행복한 사람 축에도 들겠구나, 늙음의 끝자락.
달이여, 눈이여, 흥에 겨워 지내니 연말이구나.
이 무렵 바쇼의 하이쿠들에는 소박하게, 그저 일이 이루어지는 대로 살아가고, 풍류를 즐기며 자족하는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2년 후 바쇼는 추종자들을 물리치고 두 번째 방랑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져서 가는 곳마다 떠들썩한 환대를 받았다. 탈세속적인 작풍과 풍류를 즐긴 바쇼로서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쇼의 암자도 고독을 즐기고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추종자들의 방문을 받는 곳이 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쇼는 곧 암자를 팔고 홀로 낯선 곳을 떠돌아다니기로 결심했다.
1689년 3월 제자와 함께 방랑길에 오른 바쇼는 고전에 등장하는 명승고적을 둘러보았다. 중국 고전을 비롯해 일본의 전통시에 심취했던 그는 사이교, 노인 법사 등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선인들의 시혼(詩魂)을 배우고자 했다. 존경했던 노인 법사가 지났던, 이제는 사라져 버린 오우 지방의 입구인 시라카와 관문을 지나면서는 "내 살던 고향, 봄 안개 피어날 때 떠나왔는데, 가을 바람 스산한, 시리카와의 관문"이라며 감동을 표현했다. 일세기를 풍미했던 후지와라씨의 근거지 히라이즈미에서는 "장맛비도 비껴간 듯하구나, 금박 입힌 금당"이라며 공명과 부귀영화도 한낱 허무한 꿈일 뿐이라고 노래했다. 약 150여 일간의 이 기행은 《오쿠노 호소미치(奧の細道)》로 탄생했다.
이 방랑을 통해 그는 유한한 역사와 변화무쌍한 자연 속에서 인간의 존재와 삶은 일시적이고 나약할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절감하고, 노장적인 자연 사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의 예술적 경지는 한 차원 더 끌어올려졌다.
소나무에 대한 것은 소나무에게 배우고, 대나무에 관한 것은 대나무에게 배워라.
하이쿠를 행하는 사람은 조화를 따라서 사계를 친구로 삼는다. 조화를 따라서 조화로 돌아가라.
에도로 돌아온 후 바쇼는 제자들에게 인위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천지 만물의 조화에 따라 살 것을 설파했다. 그리고 하이쿠에 있어서도 고정관념을 버리고, 영속적으로 변화하고 재생산되는 자연의 법칙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제자들과의 만남도 잠시, 그는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바쇼는 오랜 방랑을 통해 자연과 인생의 의미를 찾고, 종래 관념적·논리적·유미주의적 관점에서 정형화되어 있던 하이쿠를 보다 자연스럽게 인생의 애환을 담는 그릇으로 발전시켰다.
마쓰오 바쇼는 1694년 오사카에서 객사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하이쿠를 읊었다.
방랑에 병들어 꿈은 마른 들판을 헤매고 돈다.
· 1682년 : 이하라 사이카쿠가 《호색일대남》을 발표하다.
· 1703년 : 최초의 세와모노 작품인 《소네자키 신주》가 발표되다.
· 1689년 : 마쓰오 바쇼가 《오쿠노 호소미치》의 배경이 되는 방랑길에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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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출처
신화의 시대부터 인간의 시대까지, 100인의 인물로 관통하는 일본사! 일본사에 한 획을 그은 100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오늘날 일본과 일본인의 정신을 이룬 역사, 문화....펼쳐보기
* 다음 글은 다른 글인데, 여기 한 곳에 옮긴다.
오쿠노 호소미치
동의어 마쓰오 바쇼 다른 표기 언어 奧の細道
| 저작자 |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
|---|
요약 하이카이(俳諧, 익살스러운 와카의 한 형식) 기행문. 1694년에 새로 옮겨 쓴 것으로, 작자는 마쓰오 바쇼(1644~1694)이다. 일체의 세속적 명리를 버리고 무쓰(陸奧) 지방을 시작으로 동냥 행각의 길에 나선 바쇼가 여행길에서 마주친 풍경을 통해 위대한 자연을 느끼고 와카와 관련이 있는 명소를 찾아가 옛 시인들과 시간을 초월해 해후하며 불역유행(不易流行, 시의 변하지 않는 기본과 그때그때의 새로운 형식) 사상의 기초를 마련했다.
출발
해와 달은 멈추는 일 없이 영원히 운행하는 나그네이며, 왔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다시 오는 해[년(年)] 또한 나그네이다. 뱃사람이 되어 일생을 배 위에서 보내거나 마부가 되어 재갈을 붙잡고 나이를 먹어 가는 자는 평소의 삶 자체가 나그넷길이다. 한곳에 머물지 않고 떠도는 삶이 자신의 생활인 것이다. 이백(李白) · 두보(杜甫) · 사이교(西行) · 소기(宗祇) 등과 같이 풍류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 역시 대부분 나그넷길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도 언제부터인가 조각 난 구름이 바람에 떠밀려 가듯 자연의 흐름을 따라 길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항상 맴돌아 멀리 땅 끝에 있는 해변을 방황하며 걷다가, 작년 가을에 스미다(隅田) 강 언저리의 초라한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 다시 봄이 돌아오고 초봄의 아지랑이 낀 하늘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에는 시라카와(白川)의 관문을 넘어 무쓰 지방[지금의 아오모리(靑森)와 이와테(岩手) 현 부근]으로 길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휩싸였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내 마음은 미칠 것만 같았고, 도조신(道祖神, 여행길의 수호신)이 끊임없이 유혹하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바지의 해진 부분을 기우고, 갓끈을 갈아 끼우고, 손발의 세 곳에 뜸을 뜨는 등 길 떠날 채비를 하는데 벌써 마쓰시마(松島)에 뜨는 달이 눈에 어른거린다. 살고 있던 암자를 남에게 물려주고 스기야마 산푸(杉山杉風, 1647~1732, 바쇼의 후계자)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음은 이 무렵에 읊은 구절이다.
초가집도 사는 사람이 바뀌니 아기 새의 집이로다.
草の戶も住み替る代ぞ雛の家
기념으로 이 구절을 제1구로 한 렌가(連歌)각주1) 를 옛집의 기둥에 걸어 두었다.
나스 들판
나스[那須, 지금의 도치기(枥木) 현]의 구로바네(黑羽)라는 곳에 아는 이가 있어 닛코(日光)에서 들판을 가로질러 가까운 지름길로 가기로 했다. 멀리 저편에 보이는 마을을 목적지로 삼아 가는 도중 비가 오더니 날도 저물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농부의 집에 들어가 하룻밤 잠을 청하고 다시 날이 밝자 또 들판을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들판에는 방목해서 키우는 말들이 있었다. 풀을 베고 있는 남자가 있어 걷는 고생을 말하며 말을 빌려 달라고 청하자, 들일이나 밭일을 하는 시골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인정을 베풀어 주었다.
“그럼, 어쩌지? 지금 내가 안내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들판 길은 종횡으로 가로질러 있어 이곳을 여행하는 나그네가 길을 잃을까 걱정도 되니, 이 말을 타고 가다 멈추는 곳에서 말을 돌려보내 주시오.”
그러면서 말을 빌려 주었다.
빌린 말을 타고 가는데 어린아이 둘이 뒤따라 달려왔다. 한 아이는 귀여운 어린 소녀로 이름은 ‘가사네’라고 했다. 그다지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 우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바쇼의 제자 소라(曾良)는 다음의 노래를 읊었다.
가사네라는 이름을 꽃에 비유하자면 겹패랭이꽃일 것이다.
かさねとは八重撫子の名なるべし
말을 달리고 얼마 가지 않아 마을이 나왔으므로 말 삯을 안장에 묶어 말을 돌려보냈다.
길가의 버드나무
사이교(西行) 법사가 그 아래에 멈춰 서 “길가의 맑은 물, 흐르는 버드나무 그늘을 잠시 빌려 가는 걸음을 멈추네”라고 읊은 것으로 유명한 버드나무는 아시노(蘆野) 마을에 있었고 지금도 밭두렁에 서 있다. 이 지역의 영주 고호(戶部) 아무개라는 사람이 이 버드나무는 남에게 자랑할 만하다며 시간 있을 때마다 왔다고 하기에 도대체 어디에 있는 나무인가 보고 싶었는데 오늘 드디어 그 버드나무 그늘 아래 서 보게 되었구나.
한참 만에 밭일을 끝내고 한숨 쉬려 버드나무 아래로 들어선다.
田一枚植ゑて立ち去る柳かな
시라카와 관문
왠지 불안해 차분하지 못한 마음으로 길을 계속 가다가 겨우 시라카와(白川) 관문에 이르러 여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옛날 다이라노 가네모리(平兼盛)가 이 관문까지 와서 너무도 감명받은 나머지 그 감동을 수도에 전하고자 시를 읊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라카와 관문은 동쪽 지방의 3대 관문 가운데 하나로, 풍류의 길에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모두 관심을 가지고 시를 읊은 곳이다. 그 옛날 노인(能因, 988~1050, 헤이안 시대 중기의 와카 시인)이 읊은 가을바람 소리와 요리마사(賴政)가 읊은 단풍을 생각하며 눈앞의 푸른 나뭇잎이 매달린 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옛 노래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흰 댕강목 꽃 곁에 가시나무 꽃이 피어 있어 마치 눈 속을 걷는 것 같았다. 그 옛날 다케다노 다유[竹田大夫, 후지와라노 구니유키(藤原國行)의 호]가 이 관문에서 노인의 시에 경의를 표하며 의관을 바르게 하고 지나갔다는 일화는 후지와라노 기요스케(藤原淸輔, 1104~1177, 헤이안 시대 말기의 와카 시인)의 『후쿠로조시(袋草紙)』에도 적혀 있는 일이다. 소라의 노래가 전한다.
댕강목 꽃 장식을 나들이옷 삼아 관문을 지나간다네.
卯の花をかざした關の晴着かな
히라이즈미
후지와라 집안의 3대 영화도 한밤의 꿈처럼 짧아 지금은 모두 폐허로 변해 버렸다. 히라이즈미(平泉) 저택의 정문 터는 10리 앞에 있다.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가 살았던 저택의 터는 지금 들판이 되었으며, 그가 쌓았다는 긴케(金鷄) 산만이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우선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經)의 집이 있던 다카다치(高館)에 오르자, 눈 아래로 기타카미(北上)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 강은 남부 지방까지 흘러드는 큰 강이다. 고로모(衣) 강은 이즈미노 다다히라(和泉忠衡)가 살았던 이즈미 성을 두르고 이 다카다치 아래서 기타카미 강과 합류한다. 무장 후지와라노 야스히라(藤原泰衡)가 살았던 옛터는 기누가세키(衣關) 관문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보아 북쪽 관문인 남문을 견고하게 지키면서 북방 민족인 에조(蝦夷)의 침입을 방어했었나 보다.
한때는 요시쓰네가 선발한 충성스럽고 용감한 부하들이 용맹하게 싸웠을 이 다카다치에 그때 그 사람들의 공명은 그저 한때의 꿈으로 사라져버린 지금, 남은 것이라고는 무성한 여름풀뿐이다.
나라가 무너져도 산천은 그대로이고, 다만 봄이 되어 성내는 초목만 무성하네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라는 두보의 시구를 생각하며 삿갓을 풀어 놓고 주저앉아 옛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여름 초목 우거진 이곳은 옛 병사들의 꿈의 자리로다.
夏草や兵どもが夢の跡
기사카타
지금까지 산과 계곡 그리고 바다와 육지 등 숱한 곳의 뛰어난 경치를 많이 보아 왔는데도 새삼스레 기사카타(象潟)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지고 있다. 사카타(酒田) 항구에서 동북쪽으로 10리 정도, 어느덧 해가 기울어질 무렵이 되어서야 시오고시(汐越)라는 곳에 도착했다.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리고, 몽롱하게 내리는 비에 사방이 뿌예져 조카이(鳥海) 산도 모습을 감추었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어 물건을 찾듯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빗속에 아름다운 경치를 상상하고, 또 비 그친 뒤의 경치를 추측하면서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의 「서호(西湖)」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겨우 엉덩이만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어부의 집에 들어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다음 날 하늘이 맑게 개고 아침 해가 밝아 올 무렵에 기사가타를 향해 배를 띄웠다. 우선 노인 법사가 살았던 섬에 배를 대고 법사가 3년간 은거 생활을 했던 곳을 찾아갔다. 그런 다음 반대쪽 해안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오르자 그곳에는 사이교 법사가 “기사카타의 벚꽃은 파도에 묻히고, 꽃 위를 지나가는 해녀의 고깃배”라고 읊은 그 늙은 벚나무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법사를 기리고 있었다. 물가에는 진구(神功) 황후의 능묘가 있다. 그곳에 있는 절을 간만주 사(干滿珠寺)라고 한다.
이 절의 방에 앉아 발을 걷어 올리고 바라보니 기사카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쪽에는 조카이 산이 하늘을 떠받치듯 솟아 있고, 그 그림자가 후미에 걸쳐 있었다. 서쪽으로는 안개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관문이 길을 가로막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제방을 쌓은 위로 아키타(秋田) 지방으로 통하는 길이 이어져 있다. 북쪽 바다의 파도가 후미까지 들어오는 곳을 시오고시(汐越)라고 한다. 후미는 가로 세로 약 10리로, 그 모습이 마쓰시마(松島)와 많이 닮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마쓰시마가 웃고 있는 것처럼 밝다면 기사카타는 우울하게 가라앉은 느낌이다. 좀더 설명하자면 외로움에 슬픔이 더해진 듯한 상심한 미녀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기사카타의 비를 맞는 자귀나무 꽃, 마치 비운의 서시(西施) 같구나.
象潟や雨に西施がねぶの花
에치고 길
사카타(酒田) 사람들과 나눈 정을 잊지 못해 애석한 기분으로 며칠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호쿠리쿠(北陸) 가도 위에 걸려 있는 구름을 향해 걷게 되었다. 앞길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저려 왔다. 길을 물으니 가가(加賀) 지방의 가나자와(金澤)까지는 아직 1,300리나 된다고 한다. 네즈(鼠)의 관문을 넘으면 에치고 땅이다. 그러면 곧 에추(越中)의 이치부리(市振) 관문에 이를 것이다. 이즈음 9일 동안 더위와 비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더니 끝내는 병이 생겨 여행기를 끄적일 붓조차 들 수 없었다.
칠석날 전날인 6일은 여느 때 밤과 다르오.
文月や六日も常の夜には似ず
거친 바다와 사도(佐渡) 섬 사이에 은하수 가로놓여 있네.
荒海や佐渡によこたふ天の河
이로 해변
8월 16일, 하늘이 맑게 개었으므로 사이교 법사의 옛 노래에 나오는 모래사장의 작은 조개껍데기를 줍기 위해 이로(種) 해변으로 배를 서둘렀다. 쓰루가(敦賀)에서 뱃길로 70리여서 배는 순풍을 안고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했다. 이로 해변에는 어부들의 볼품없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고, 그 옆에는 허름한 법화종(法華宗) 사찰이 있었다. 절에서 차를 얻어 마시고 술로 몸을 녹였다. 주변의 적막한 저녁 풍경은 절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스마(須磨) 해변의 적막함보다 더한 가을 해변이구나.
寂しさや須磨に勝ちたる浜の秋
파도가 밀려간 뒤 조개 껍데기에 섞인 싸리꽃 보이네.
浪の間や小貝にまじる萩の花
마쓰오 바쇼의 본명은 마사후사(宗房)이다. 이가(伊賀) 지방의 우에노(上野)에 있는 도도(藤堂) 집안의 후계자 도도 요시타다(藤堂良忠)를 받들었다. 요시타다가 고전학자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 1624~1705)의 제자였으므로 바쇼도 자연스럽게 기타무라 기긴을 따른 셈이다.
바쇼는 요시타다의 죽음을 계기로 벼슬을 버리고, 교토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마쓰나가 데이토쿠(松永貞德, 1571~1653, 에도 시대 전기의 시인)풍의 하이카이를 배웠다. 그러고 나서 에도로 내려가 단린(談林, 데이토쿠풍의 하이카이에 반항하던 일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그 후 자신의 독자적인 시 세계를 개척했다. 한적한 것을 즐기며 고담한 분위기를 사랑한 바쇼의 마음은 자연 속에 드러나는 조용하고 적막한 정취가 되어 그의 시구 속에 나타났으며, 사물의 깊은 뜻과 의미를 끌어내는 부드럽고 섬세한 시정으로 표현되었다.
바쇼의 시상은 여행을 통해 길러지고 다듬어졌다. 『노자라시 기행(野ざらし紀行)』, 『오이노코분(笈の小文)』, 『사라시나 기행(更科紀行)』, 『오쿠노 호소미치』 등은 그의 인생과 문학이 여행을 통해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해 간 과정의 생생한 기록이다.
『오쿠노 호소미치』는 1689년 3월 27일에 제자 소라를 데리고 에도를 떠나 닛코(日光), 마쓰시마(松島), 히라이즈미(平泉), 류샤쿠 사(立石寺), 기사가타(象潟) 등을 돌고 해변을 따라 에치고 길을 거쳐 호쿠리쿠(北陸) 길을 통해 오가키(大垣)에 이르기까지 6,000리 길을 150일 동안 여행한 기록이다. 바쇼의 자필본은 1743년 이후 소재를 알 수 없다. 다만 가시와기 소류(柏木素龍)가 정리한 것[니시무라본(西村本)]과 자필본과 비슷한 소네본(曾根本) · 가키에본(枾衛本, 가시와기 소류가 정리), 1702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된 이쓰쓰야본(井筒屋本, 니시무라본을 베낀 것)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1998년 오사카에서 원본이 발견되어 이와나미 서점을 통해 영인본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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