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앞에 실었던 글인데, 워낙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어, 더 정밀하게 글의 논리를 맞춰 놓았습니다.
(큰 챕터1 시작)
1.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깨닫기 전의 부처님 자신으로 추정되는 관자재보살의 예를 통하여 오온은 다 실체가 없는 것들[空]임을 꿰뚫어보고 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줌 (오온이 다 없어진 것을 꿰뚫어보고 나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줌)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찰에 통달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닦아갈 때 오온은 다 실체가 없는 것들[空]임을 꿰뚫어 보고는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뜻이 조계종 표준 반야심경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돼 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1) 觀自在菩薩(관자재보살), Avalokiteśvara Bodhisattva
관자재보살은 관찰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 관찰에 통달한 보살
반야심경에서 성공 모델로 들고 있는 인물이 관자재보살이다. 반야심경은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깨닫기 전의 부처님 자신으로 추정되는 관자재보살의 예를 통하여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닦으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고, 또 반야의 존재와 반야를 닦는 방법, 닦아서 오온은 다 실체가 없는 것들임을 꿰뚫어보고 난 뒤의 상태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또 반야바라밀다 방법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고, 그 방법의 공덕을 찬탄하고 있다.
그럼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어떤 분이신가? 왜 ‘관자재보살’이라고 부르는가? ‘관자재보살’에서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a(아바로키타)의 번역으로 ‘관찰한다’는 뜻이고, 자재(自在)는 산스크리트어 īśvara(이쓰바라)의 번역으로, ‘~에 자유자재한 자’, ‘~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라는 뜻이다. 즉 관자재보살은 관찰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어서 ‘관찰에 통달한 보살’이다. 이 때 관찰은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色]과 마음[受想行識]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관찰이다.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이 아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산스크리트어 ‘Avalokiteśvara Bodhisattva(아바로키테쓰바라 보디사트바)’의 번역으로, 흔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은 불보살(佛菩薩)에 대한 신앙을 중시하는 법화경에 나오는 보살이고, 여기서는 반야사상, 즉 지혜의 계발에 대해 말하는 반야부(般若部)의 경전이라, 이 두 경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경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은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믿음만 강조하지 반야심경의 관심사인 지혜의 계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법화경에 나오는 가공(架空)의 부처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일체 성문과 벽지불은 이 법화경 안에까지 [지혜분별의] 힘이 미치지 못 한다. 이 경에는 [지혜 제일인] 사리불 너조차 믿음으로 들어왔는데, 하물며 다른 성문들은 어떠하겠는가? 다른 성문들은 모두 부처님의 말씀을 [아무 의심 없이] 믿는 까닭에 이 경을 따르는 것이요, 자신의 지혜 분별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며,
정체불명의 법화경의 가짜 부처는 지혜 분별력을 계발하지 못하게 꾀고 있다. 법화경은 석가부처님의 불교에 대해 ‘방편설(方便說)’이라는 말을 만들어내어, 불교의 본질인 지혜의 계발을 가로 막고, 오직 불보살에 대한 신앙만 강조한다. 잘 아시다시피 법화경의 관세음보살은 고통속의 중생들을 구제해주는 구세주인 반면에, 관자재보살은 구세주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계발하여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보살이다.
또 기원전 100년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반야심경에 기원후 1세기 전반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법화경의 ‘관세음보살’이 나올 리 없다. 반야심경이 쓰여질 때는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반야심경에는 ‘관자재보살’ 대신 ‘관세음보살’로 번역돼 있고, 지혜륜(智慧輪)이 번역한 반야심경에는 ‘관세음’과 ‘관자재’를 합한 ‘관세음자재보살(觀世音自在菩薩)’로 번역돼 있다. 그 외의 다른 8종의 반야심경 한역(漢譯)에는 모두 ‘관자재보살’로 번역돼 있다.
왜, 어떤 과정을 통하여 관자재보살이 ‘관세음보살’로 둔갑하게 되는가?
그럼 왜 관찰에 자유자재한 관자재보살이 성격이 다른 ‘관세음보살’로 둔갑하게 되는가? 그것은 석가불교의 지혜를 계발하는 방법을 없애려고 하는 불순한 의도를 지닌 대승주의자들의 교묘한 조작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붓다의 법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교의(敎義)를 집어넣으려는 의도로 쓰여진 불순(不純) 대승경전으로 분류되는 법화경을 한역한 구마라습은 최초로 반야심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관자재보살을 ‘관세음보살’로 바꿔치기 해놓았다. 이에 대해 당(唐)나라 시대에 많은 불경을 번역했고, 음운(音韻)문자에 정통했던 현응(玄應) 스님은 <현응음의(玄應音義)> 제5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구역(舊譯), 즉 최초의 번역에 ‘世音(세음)’ 또는 ‘觀世音(관세음)’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원본에는 모두 ‘savara(사바라, 舍婆羅)’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자재(自在)’라는 뜻이다. 그러나 설산(雪山) 이래의 모든 경본(經本)에는 이것이 ‘svara(스바라, 娑婆羅)’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音(음)’이 된다. 여기서 舍(sa, 사)와 娑(s, 스)는 그 음(音)이 비슷함으로 인해 잘못 전해진 것이다.”
Avalokitasavara(아바로키타사바라, 관자재)→ Avalokitasvara(아바로키타스바라, 관음)→ Avalokiteśvara(아바로키테쓰바라)
위의 현응의 글에 의하면 ‘관자재(觀自在)’에서 ‘自在(자재)’의 산스크리트어 원어가 원래는 ‘iśvara(이쓰바라)'가 아니라 ‘savara(사바라)’였고, 이것이 설산(雪山) 이래의 모든 경본(經本)에는 음이 비슷한 ‘svara(스바라)’로 변모(變貌)되어,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위의 글에서 현응은 savara(사바라)와 svara(스바라)는 그 음이 비슷함으로 인해 실수로 잘못 전해진 것이라고 말하지만, 필자는 그렇게 보지 않고,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바꿈질 해놓았다고 본다.
구마라습 또는 어떤 대승불교주의자가 원래 ‘觀(관), 즉 관찰한다’는 의미의 avalokita(아바로키타)에 ‘自在(자재)’의 뜻인 savara(사바라)로 구성돼 있던 것을, ‘自在(자재)’의 뜻인 savara(사바라)를 ‘音(음)’의 뜻인 ‘svara(스바라)’로 고의적으로 바꿔치기 하여, ‘觀自在(관자재)’를 ‘觀音(관음)’으로 만들어버리고, 관음보살은 관세음보살이기 때문에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로 번역했다고 본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관자재보살’로 번역돼야 할 것이 ‘관세음보살’로 잘못 번역돼 있고,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은 법화경의 관세음보살이라고 잘못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위의 글에서 구마라습보다 약 200년 뒤의 역경가인 현응(玄應)도 ‘관자재’가 아니라 ‘관세음’으로 번역돼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것을 보면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과 법화경의 관세음보살은 분명히 다른 보살이다.
불순(不純) 대승주의자인 구마라습은 반야심경을 한역(漢譯)하면서 ‘관자재보살’로 번역해야 할 것을 ‘관세음보살’로 번역하여, 마치 법화경의 관세음보살이 반야심경의 주인공인 것처럼 만들어 놓고, 법화(法華)사상을 주창하고, 반야사상과 어울리지 않는 주문까지 외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관자재(觀自在)’의 원어가 달라진 것은 어떤 연유일까?
현존하는 ‘관자재(觀自在)’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Avalokiteśvara(아바로키테쓰바라)’다. 그러나 위의 현응(玄應)의 글에 의하면 ‘관자재’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원래 ‘Avalokitasavara(아바로키타사바라)’였다. 이것이 어떤 연유(緣由)로 현재의 형태로 바뀌게 됐을까? 구마라습 혹은 어떤 불순 대승주의자가 지혜의 계발에 초점 맞춰진 관자재(觀自在)보살을 불보살의 가피력(加被力)에 초점 맞춘 관세음[觀音]보살로 둔갑시키기 위해 ‘Avalokiteśvara(아바로키테쓰바라)’로 바꿔치기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바꿔치기는 산스크리트어 원본에 이미 이루어져 있어서 구마라습 이전의 누군가에 의해 바꿔치기 됐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반야심경의 유일한 산스크리트어 원본인 일본 법륭사(法隆寺)본을 보면, 그곳에 이미 ‘śvara(쓰바라)’로 바꿔치기 돼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륭사의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구마라습이 반야심경을 번역한 시기보다 약 200년 뒤, 서기 609년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받은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이것은 구마라습이 바꿔치기 해놓은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音(음)의 뜻인 ‘svara(스바라)’가 아니라 ‘śvara(쓰바라)’로 돼 있다는 점이다. ‘śvara(쓰바라)’라는 단어는 어떤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일본 학자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가 해석한 것처럼 ‘자재(自在)’의 원어를 ‘iśvara(이쓰바라)'로 해석하는 견해가 맞거나, 아니면 옛날에는 ‘svara(스바라)’와 ‘śvara(쓰바라)’를 혼용해서 사용했거나, 아니면 현응이 범본을 확인해보지 않고 짐작으로 말했을 수도 있다. 법화경에도 관세음보살은 ‘Avalokiteśvara(아바로키테쓰바라)’로 돼 있다. 하지만 산스크리트어 음운에 정통했던 현응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면, 반야심경의 관자재의 원어는 원래 ‘Avalokitasavara(아바로키타사바라)’였던 것을 누군가가 현재의 형태인 ‘Avalokiteśvara(아바로키테쓰바라)’로 바꿔치기 해놓았다고도 볼 수 있다.
구마라습의 평소 사상과 번역 성향을 고려해볼 때 구마라습이 바꿔치기 했다고 의심해볼 만하다. 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만약 구마라습이 반야심경을 번역하면서 바꿔치기 했다면, 다른 경에서 바꿔치기 하기 이전의 형태인 ‘Avalokitasavara(아바로키타사바라)’가 발견돼야 하지만 그런 단어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면 현응(玄應)이 “설산(雪山) 이래의 모든 경본(經本)에는 이것이 ‘svara(스바라)’로 돼 있다”고 한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설산(雪山) 이래의 모든 경본(經本)’이라는 말은 아주 오래 전부터 바꿔져 있어서 이제 경본에서 이전의 형태인 Avalokitasavara(아바로키타사바라)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관자재’의 산스크리트어 원어의 원래 형태로 추정되는 Avalokitasavara(아바로키타사바라)는 보이지 않지만, ‘觀音(관음)’의 산스크리트어 원어의 원래 형태였던 ‘Avalokitasvara(아바로키타스바라)’는 근래에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나온 법화경 조각[斷片]에서 발견됐다. 이것은 현응의 말이 맞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고, ‘관자재’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원래 ‘Avalokitasavara(아바로키타사바라)’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만약 반야심경에서 ‘관자재(觀自在)’의 원어가 원래부터 현재의 형태인 ‘Avalokiteśvara(아바로키테쓰바라)’였고, 법화경의 ‘관음(觀音)’ 또는 ‘관세음(觀世音)’의 원어도 같은 것이었다면, 그것이 어떤 원어분석을 통하여 ‘관음(觀音)’으로 번역되었는지 설명 가능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사전에도 ‘śvara(쓰바라)’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가 없고, 비슷한 형태로 ‘音(음)’이라는 뜻의 단어 ‘svara(스바라)’만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관음(觀音)’의 원어는 원래 ‘Avalokitasvara(아바로키타스바라)’였고, 현재의 ‘관자재(觀自在)’와 ‘관음(觀音)’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로 전해지고 있는 ‘Avalokiteśvara(아바로키테쓰바라)’는 전래되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바꿈질 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Avalokita savara(아바로키타 사바라)’에서 ‘Avalokita+īśvara(아바로키테쓰바라)로 바꿈질이 가능한 것은 산스크리트어 savara(사바라)와 īśvara(이쓰바라)는 둘 다 인도 브라만교의 세계를 창조하는 신(神)인 śiva(씨바)신을 일컫던 말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 ‘왕’, ‘主(주)’, ‘자재(自在)’, ‘자재자(自在者)’ 등의 뜻을 가진 단어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바꿈질 하는 과정을 정리해보면,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의 산스크리트어 원어는 원래 ‘Avalokitasavara(아바로키타 사바라)’였던 것을 법화경의 ‘觀音(관음)’(보살)로 둔갑시키기 위해 savara의 a자를 하나 빼서 ‘Avalokitasvara(아바로키타 스바라)’로 바꿈질 한 뒤, 다시 ‘관자재((觀自在)’와 ‘관음(觀音)’의 현재의 원어 형태인 ‘Avalokiteśvara(아바로키테쓰바라)’로 바꿔 놓음으로써 지혜의 계발을 추구하는 관자재보살이 졸지에 자비의 손길로 고통 속의 중생들을 구제해주는 관세음보살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만약 구마라습이 관자재의 원어를 바꿔 놓았다면, 그는 번역뿐만 아니라 산스크리트어 원문까지 바꿈질 하여, 완벽한 바꿈질을 꾀했다고 볼 수 있다. 끔찍하고도 속지 않을 수 없는 불순 대승불교주의자들의 교묘한 술수다.
우리는 관자재가 관세음으로 둔갑하는 이 부분에서도 불교에서 반야지혜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없어지게 됐는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불순 대승불교주의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반야지혜를 계발하는 석가의 법을 짓밟고, 왜곡하고, 없애려 했다.
관세음보살이 등장하는 법화경은 불보살의 위신력(威神力)을 믿고 그들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기만 하면, 모든 어려움에서 해탈할 수 있는데, 굳이 어렵게 반야지혜를 닦을 필요가 없다는 가르침을 펴는 경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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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미토스 작성시간 15.08.04 종교의 근간이 앎과 신앙의 문제에서, 기독교처럼 믿음이 긍극적인 목적인 종교와는 다르게, 불교의 신앙은 깨달음을 위한 방편으로 신앙이 요청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깨달음이 부정되고 신앙만 남는다면, 참된 석가의 가르침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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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8.05 미토스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붓다의 불교는 깨달음을 위한 불교이고, 관세음보살의 불교는 복을 빌기 위한 불교, 신앙을 위한 불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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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muhayou 작성시간 15.08.04 기존의 애매하고 추상적인 불교원문에 대한 번역을 보면서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한 적 있었는데 쉽고 명확하게 들어와 좋습니다. 생각에 초기불교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악의적인 의도라기보다는 불교를 일반 대중들에게 보다 빨리 쉽게 전파하려는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닐련지요. 그렇다하더라도 잘못된 것은 불교연구자들이 바로 잡아야 하는데 아마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깨달음의 정수인 반야심경의 제대로된 완역과 해설판이 무척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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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9.05 무하유님, 우선 좋은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순수 대승불교인 반야심경에서는 님께서 말하신 그런 좋은 의도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다른 언어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거나 혹은 경전이 창작될 때 붓다의 법을 왜곡, 파괴하고, 거기에 잡 것을 끼워 넣기 위해 만들어진 경전들이 있는데, 이런 경을 저는 불순 대승경전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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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8.05 휴~~~ 자꾸 수정되니, 끝이 없네요. 이젠 그만 수정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