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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 또는 지혜란 뭔가? [2]

작성자조성래|작성시간13.11.12|조회수328 목록 댓글 4

지난 일요일(11/10) 내용에 이어 '반야 또는 지혜란 뭔가'를 가지고 계속 설명해 갑니다. 

 

   ‘지혜(智慧)’의 의미

 

여기서 지혜가 뭔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불교의 지혜는 ‘일머리가 잘 돌아가거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책략을 짤 수 있는’ 그런 일반적 의미의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불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깊은 선정(禪定), 즉 멈춤과 관찰을 닦은 결과 나오는 반야지혜로서, 자신의 실체, 즉 무아(無我)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다.

인터넷에서 불교의 지혜를 검색해보면 단지 “미혹(迷惑)을 끊고 부처의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힘”이라고만 되어있을 뿐이다. 이것을 봐도 여태까지 지혜가 얼마나 추상적으로 이해되어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럼 이번에는 티벳 달라이라마가 그의 반야심경 해설에서 내려놓은 지혜에 대한 설명을 한 번 보자.

 

“1. 반야(般若)

 

반야(般若)란 지혜를 말합니다. 통찰지입니다.

뭐가 반야이며, 뭘 통찰해야 그게 통찰지일까요?

뭐가 지혜인지 우선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혜라는 것은 제법(諸法), 즉 삼라만상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의 반대는 무명(無明)인데 무명이란 곧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을 잘못 알고 있는 상태를 뜻 합니다.

 

반야(般若), 즉 지혜/통찰지라는 것은, 모든 것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삼라만상 모든 것들의 존재방식은 어떤 것일까요?

그게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법(緣起法)입니다.

연기법(緣起法)이란 인(因)과 연(緣)이 서로 상호의존하여 모든 법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뜻 합니다.

연기법(緣起法)이란 가장 쉽게 표현하면 상호의존성을 뜻 합니다.

상호의존성이란 독립적인 실체가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삼라만상에 독립적인 실체가 없을까?

바로 상호의존성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명(無明)이란 바로 이걸 모르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무명(無明)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엔 독립적인 실체가 있다고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왜 중생은 무명(無明)에 빠져 고통을 당할까요?

왜냐면 보이는 것이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우리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면 언제나 진짜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속는 것입니다.

속기 때문에 모든 것에 실체가 있는 줄 알고, 집착을 하게 됩니다.

집착을 하게 되므로 온갖 고통이 생깁니다.

집착하는 것을 못 이루거나, 이뤘어도 결국 잃어버리게 되므로 온갖 고통이 발생합니다.

이런 것이 무명(無明)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의 무명(無明)이란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반야(般若)란 이와 반대로 모든 것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똑바로, 사실 그대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의 존재방식이란 바로 상호의존성, 즉 연기(緣起)입니다.

인(因)과 연(緣)이 서로 의존해서 모든 것이 발생하므로, 거기엔 독립적인 실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이건 사물이건 모두 다 순간순간 변해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게 변해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상호의존성 때문입니다.

변해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야(般若)란 곧 지혜/통찰지이며, 지혜/통찰지란 존재 및 사물의 존재방식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상이 달라이라마의 반야심경에서의 지혜에 대한 설명입니다. 과연 지혜란 위의 설명과 같은 것일까요? 아닙니다. 달라이라마의 지혜에 대한 해설에서 잘못된 것들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혜란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밝게 아는 것입니다. 곧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에 깨어있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무명(無明)이란 삼라만상의 존재방식에 대해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곧 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자신의 고통의 원인에 대해 잘 모르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갖추지 못한 것이 무명입니다. 무명은 어리석음[痴], 무지(無知), 痴暗(치암), 깜깜함, 혼침(昏沈) 등과 동의어입니다.

 

3. 혜[慧, (산) Jāña, jñā 若那, prajñā 般若, (빨) paññā)

 

혜(慧)는 ‘지혜’ 또는 ‘반야’라는 뜻. 그럼 여기서 말하는 지혜(智慧)란 어떤 것인가?

지혜란 위빠사나의 관찰수행을 통하여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들의 작용에 대해 밝게 아는 것. 내관(內觀), 즉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지혜의 반대개념은 無明(무명), 無知(무지), 자신에 대해 깜깜하게 어두운 것, 痴暗(치암), 昏沈(혼침) 등이다.

 

jñā 若那(자나)를 번역하여 智(지), prajñā 般若(반야)를 번역하여 慧(혜)라고 말한다. 또 決斷(결단), 즉 단호히 잘라버림을 智(지), 簡擇(간택), 즉 선택함을 慧(혜)라고 말하는 곳도 있다. 또 大乘義章九(대승의장구)에는 “照見(조견), 즉 밝게 관찰하는 것을 智(지)라고 말하고, 解了(해료), 즉 관찰한 결과 그 대상의 특성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慧(혜)라고 말하는데, 통(通)하면 뜻이 같다”고 했다. 法華經義疏二(법화경의소2)에 “경론 가운데 慧門(혜문)으로는 空(공)을 비추고, 智門(지문)으로는 有(유)를 비춘다 함이 많다”고 했다. 瑜伽論記九(유가론기9)에는 “범어 반야prajñā는 ‘慧(혜)’로 번역되는데 第六度(제6도)가 됨을 알아야 하고, 범어 jñā는 ‘智(지)’로 번역되는데 第十度(제10도)가 됨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智(지)와 慧(혜)에 대해 어원분석을 통하여 좀 더 정확하게 알아보자.

 

智(지)에 해당하는 (산) jñā는 살펴보다[檢], 알다, ~을 관찰하여 알다[察知], 모르던 것을 알게 되다[覺], 깨닫다[悟, 證], 경험하다, 확인하다, 시인(是認)하다, ~라고 알다, 어떻게 할 것인지를 알다 등의 뜻이 있고, 이것은 知(지), 能知(능지), 解(해), 證(증), 能識(능식), 明達(명달), 了達(료달), 能明了(능명료), 了(료), 了知(료지), 能了知(능료지), 明知(명지) 등으로 한역돼 있다.

또 慧(혜)에 해당하는 (산) prajñā는 위와 같은 의미의 jñā에 ‘최상의[極上]’ 또는 ‘뛰어나다[勝]’는 의미의 접두사 pra가 붙어, 완전한 이해, 요해(了解), 최상의 지식, 궁극적 앎 등의 뜻이 되고, 慧(혜), 明(명), 慧明(혜명), 妙慧(묘혜), 勝慧(승혜), 覺慧(각혜), 智(지), 智慧(지혜), 極智(극지) 등으로 한역돼 있다.

 

즉 智(지)는 우리가 알아차림 수행을 할 때 몸의 움직임이나 감각 등 어렵지 않게 알아차려지는 대상들을 밝게[日] 아는[知] 것이고, 慧(혜)는 그렇게 알아차림을 계속 많이 닦은 결과, 알아차리는 감각이 극도로 예리해져, 매 찰라 순간에 일어났다 사라지는 미세한 변화들, 즉 무상(無常)까지 알아차리는 정도의 대단히 빠르고 밝은[彗] 혜성(彗星)과도 같은 알아차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智(지)가 극도로 계발되면 慧(혜)가 나온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慧(혜)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 원어 prajñā를 極智(극지), 즉 최고의 智(지)로 한역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해심밀경>의 3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들은 모두 불자로서, 마음이 잘 해탈하였으며, 지혜가 잘 해탈하였으며, 계행이 매우 청정하였으며, 법의 즐거움을 나아가 구하였으며, 많이 듣고, 들은 것을 기억해, 그 들은 것이 쌓이고 모였으며, 생각해야 할 것을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잘 말하고, 지어야 할 것을 잘 짓는 자들이었다. 민첩한 지혜[捷慧]ㆍ재빠른 지혜[速慧]ㆍ예리한 지혜[利慧]ㆍ벗어나는 지혜[出慧]ㆍ잘 선택하는 지혜[勝決擇慧]ㆍ큰 지혜[大慧]ㆍ넓은 지혜[廣慧]ㆍ최고의 지혜[無等慧] 등 지혜의 보배를 성취하였으며, 3명(明)을 구족하였으며, 제일의 현법락주(現法樂住)를 얻었으며, 크고 청정한 복밭[福田]이었다. 위의(威儀)와 고요함이 모두 원만하였으며, 큰 인욕과 부드러운 화목을 성취하여 손상함이 없었으며, 이미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잘 받들어 행하는 자들이었다.

 

위의 글의 밑줄 친 부분에 慧(혜)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慧(혜)는 매우 빠르고, 예리해서 찰라 순간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현상까지 다 알아차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 잘 선택하여,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특성을 갖고 있다.

경전을 보면 지혜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지혜가 있다.

四慧(사혜):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 증혜(證慧)

경전이나 법문을 보고 들어서 얻는 지혜, 들은 것을 사유해가서 얻는 지혜, 닦아서 얻는 지혜, 완전히 깨달아서 얻는 지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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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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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대원 | 작성시간 13.11.13 저는 통찰지라는 데 끌림이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1.14 대원님, 통찰지(洞察智)란 '예리한 관찰력으로 대상을 환히 꿰뚫어 보는 지혜'라는 뜻인 줄은 잘 알고 계시죠? 혹시 '통찰'이라는 단어의 어렵고, 고상한 듯한 이미지에 끌린 건 아니겠지요. 이런 어려운 말은 가능하면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꿰뚫어본다'는 쉽고도 좋은 단어가 있는데 꼭 다른 사람이 잘 모르는 어려운 어휘를 선택하고, 또 쉽게 이해되지 않는 단어에 꽂히는 것은 불교의 명확한 이해에 장애가 된다고 봅니다.
  • 작성자있는 그대로 | 작성시간 13.11.13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1.13 어, 오랜만입니다. 목소리 들으니 반갑습니다. 왜 안나올까, 어디 집중수행이라도 가셨나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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