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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함 제1권

<금강경>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정확한 의미는?

작성자관정|작성시간15.06.01|조회수828 목록 댓글 19

 이 글은 앞에서 1~2년 전에 이미 카페에 올렸던 내용인데, 그 때 완성된 글이 아니라서 이 번에 반야심경 해설작업을 하면서 완성하여  올립니다. 이 내용은 소승의 책 <반야심경, 무슨 말을 하고 있나>와 <반야심경 정해>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이 글을 주변 분들께 많이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영축산 사문 관정(觀頂) 합장  

 

   금강경의 사상(四想, 四相)에 대한 상세한 해설

 

 

  금강경을 읽고 나면 남는 것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밖에 없다. 그만큼 이것이 여러 번 나오고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금강경의 이 네 가지 상(相)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육조혜능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그 뜻을 해설해 놓았지만 그것들은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해놓은 것들이라서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壽者相(수자상)에서 ‘壽者(수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또 인상(人相)에서 ‘人(인)’이 ‘사람’이라는 뜻인지, ‘타인(他人)이라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럼 수자상에 대해 육조혜능 대사는 어떻게 해석했는지 한번 보자. 혜능대사는 수자상에 대해 “범부들이 대상을 보고 취사분별하는 것(對境取捨分別名壽者相)”이라고 해석하고 있고, 또 “수행인이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복을 닦으며 온갖 집착을 놓지 않는 것(心愛長年而勤修福業諸執不忘)”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혜능대사는 ‘壽者(수자)’에 대해 ‘오랜 세월[長年]’, 즉 ‘장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이 壽者(수자)는 산스크리트어 원어의 도움 없이 한문만으로 그 뜻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게 번역돼 있는 단어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 ‘영혼을 가진 존재’, ‘생명체’라는 뜻이다. 이 한 가지 예만 보더라도 사상(四相)이 그동안 원래 의미와 얼마나 다르게 해석돼 왔는지 알 수 있다. 사상(四相)에 대한 정확한 해설은 바로 이 뒤에 나온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금강경에서 사상(四相)에 대한 개념 잡기가 그만큼 어렵고 중요한데, 제대로 안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산스크리트어 원어를 통하여 사상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한 번 잡아보자.

 

  1) 아상(我相, 我想,1) ātman-samj˜nā): self-concept, egoism, a notion of a self, the illusion of separate individuality or ego-entity,

‘아상(我相)’이란 ‘내’라는 생각, 즉 ‘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我(아)’는 범어 ‘ātman’의 번역이고, ‘想(상)’은 ‘samj˜nā’의 번역이다. ‘ātman’은 ‘호흡[氣息]’, ‘영혼’, ‘생명’, ‘자신(自身)’, ‘본질’, ‘본성’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我(아)’, ‘我者(아자)’, ‘自己(자기)’, ‘神(신)’ 등으로 한역돼 있다. 또 ‘samj˜nā’는 ‘이름’, ‘생각’, ‘개념’, ‘잘못된 생각’이라는 뜻으로서 ‘名(명)’, ‘想(상)’, ‘相(상)’, ‘槪念(개념)’, ‘邪想(사상)’ 등으로 한역돼 있다.

즉 아상(我想)은 ‘내’라는 생각,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내’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 등이다. 즉, 아상은 이 몸과 마음은 오온의 화합으로 이루어져, 풀잎의 이슬과도 같은 존재일 뿐인데 고정불변의 ‘내[我]’라는 것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반야의 눈으로 보면, 몸과 마음이 있고, 그것의 작용이 있을 뿐, ‘내’라고 할 만한 존재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내, self, ego’라고 하는 추상적인 개념을 하나 만든 뒤에 그것에 집착하고 고집한다. 그런 나머지 괴롭다. 여기서 ‘내’라는 개념은 관념이 만들어 낸 하나의 환상일 뿐, 실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개념, 환상에 속아, 꼼짝없이 그것의 노예로 살아간다.

 

  2) 인상(人相, 人想, pudgala-samj˜nā): a notion of a person, a personality, an idea of a person, the illusion of a person

인상(人相)은 범어 ‘pudgala-samj˜nā’의 번역어로서 ‘사람’이라는 생각,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pudgala’란 ‘아름답다’는 뜻이 있고, 명사로는 ‘신체’, ‘물질’, ‘나[我]’, ‘개인’, ‘영혼’이라는 뜻이 있다. 이것은 我(아), 人(인), 衆生(중생), 有情(유정), 士夫(사부), 丈夫(장부) 등으로 한역돼 있다. 여기서 눈여겨봐야할 것은 ‘pudgala’에 ‘我(아)’, ‘人(인)’, ‘衆生(중생)’의 뜻이 다 들어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보면 아상, 인상, 중생상은 다른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같거나 유사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중생상(衆生相, 衆生想, sattva-samj˜nā): a notion of a being, a notion of a living being, a notion of a being with a feeling, a notion of a sentient being.

‘衆生相(중생상)’은 ‘중생’이라는 생각, 즉 ‘생명’ 또는 ‘생명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생(衆生)’은 범어 ‘sattva’의 번역이다. ‘sattva’는 중생 외에 ‘존재하는 것’, ‘有(유)’, ‘존재(存在)’, ‘실재(實在)’, ‘실체(實體)’, ‘생명’, ‘생물’, ‘동물’, ‘유령’, ‘악마’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人(인)’, ‘彼(피)’, ‘他(타)’, ‘有情(유정)’, ‘含識(함식)’ 등으로 한역돼 있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중생’의 원어 ‘sattva’도 역시 ‘人(인)’의 뜻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봐도 인상과 중생상을 구분해서 완전히 다른 것으로 해석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수자상(壽者相, 壽者想, jiva-samj˜nā): a notion of a life, a notion of a life span, the notion of a living soul, the idea of a soul, a notion of a being with an immortal soul

‘壽者相(수자상)’이란 범어 ‘jiva-samj˜nā’의 번역어로서 ‘생명’, ‘목숨 가진 존재’, ‘불멸의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인식하거나 고집하는 것이다.

‘壽者(수자)’란 범어 ‘jiva’의 번역이다. ‘jiva’는 ‘존재하는’, ‘살아있는’ 등의 뜻이 있고, 명사적 의미로는 ‘생명의 본원’, ‘영혼’이라는 뜻으로, ‘命(명)’, ‘命者(명자)’, ‘存命(존명)’, ‘活命(활명)’, ‘壽(수)’, ‘壽者(수자)’, ‘壽命(수명)’, ‘活物(활물)’, ‘生物(생물)’, ‘生命(생명)’, ‘存在(존재)’ 등으로 한역돼 있다. 이 ‘壽者(수자)’의 원어 ‘jiva’에도 ‘我(아)’나 ‘중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생명’, ‘존재’, ‘영혼’, ‘생물’이라는 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을 봐도 我(아), 人(인), 衆生(중생), 壽者(수자)는 유사하거나 동일한 의미의 단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산스크리트어 원어의 뜻을 통하여 사상(四相)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혹자는 “이것도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니냐?”고 말할런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 비약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잡아함경 570경>의 내용이 그 사실을 입증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잡아함 제570경 부분) 

 

  “세속의 온갖 견해들은 <‘내’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중생이다>고 말하기도 하며, <수명(壽命)이다>고 말하기도 하고, <세속의 길흉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존자님들이여, 어떻습니까? 세속의 이 모든 견해들은 무엇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무엇이 원인이며, 어디서 생긴 것이고, 무엇이 변한 것입니까?”

그에 대해 존자 이시닷타[梨犀達多]가 답했다. “<‘내’가 있다>고 말하는 것, <중생이다>고 말하는 것, <수명이다>고 말하는 것, <세속 길흉이다>고 말하는 것 등 이 모든 세속의 견해는 다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身見]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원인으로 하며,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에서 생겨났고,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가 변한 것입니다.

“존자이시여, 그럼 어떤 것이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입니까?”

“장자여, 어리석고 들은 것이 없는 범부들은 <육신[色]이 곧 ‘나’다>거나 <육신은 ‘나’와 다르다>, <육신 안에 ‘내’가 있다>, <‘내’ 안에 육신이 있다>고 보고, <느낌[受], 인식[想], 지음[行], 의식[識]이 곧 ‘나’다>고 보거나 <의식은 ‘나’와 다르다>, <‘내’ 안에 의식이 있다>, <의식 안에 ‘내’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것들을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라고 합니다.”

“존자이시여, 그럼 어떤 것을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가 없는 것이라고 합니까?” “장자여, 이른바 많이 아는 성스러운 제자는 <육신[色]이 곧 ‘나’다>고 보지 않고, <육신은 ‘나’와 다르다>고 보지 않으며, <‘내’ 안에 육신이 있다>거나 <육신 안에 ‘내’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느낌, 인식, 지음, 의식이 곧 ‘나’다>고 보지 않고, <의식은 ‘나’와 다르다>고도 보지 않으며, <‘내’ 안에 의식이 있다>거나 <의식 안에 ‘내’가 있다>고도 보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의 밑줄 부분에서 말하는 내용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모두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다르게 표현해놓은 것들이라는 말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 같거나 비슷한 뜻의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썼을까? 그것은 같게나 비슷한 의미의 단어들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그 뜻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라는 생각, ‘사람’이라는 생각, ‘생명체’라는 생각, ‘영혼을 가진 존재’라는 생각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은 ‘부처님의 무아설(無我說)’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무아설과 인도 전통 사상과의 관계에 대해 조금 알고 넘어가자.

 

  불교 이전의 인도 전통사상에 의하면 ‘아트만(ātman)’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원래 ‘호흡’이라는 뜻이었는데, 그것이 점차 철학적인 개념으로 바뀌어, ‘생명(生命)’, ‘나[我]’, ‘자아(自我)’, ‘자신(自身)’, ‘개인아(個人我)’, ‘생명활동의 중심체인 영혼’, 나아가 ‘본질’, ‘본성(本性)’, ‘自性(자성)’, ‘만물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 등을 의미하는 것이 돼버렸다. 앞의 ‘아상’에서 말했듯이 이 아트만은 불경에서 한문으로 번역될 때 ‘我(아)’, ‘我者(아자)’, ‘自(자)’, ‘己(기)’, ‘性(성)’, ‘自性(자성)’, ‘身(신)’, ‘自身(자신)’, ‘體(체)’, ‘體性(체성)’, ‘自體(자체)’, ‘神(신)’, ‘神識(신식)’ 등으로 옮겨졌다.

  인도 철학자들은 이 아트만을 둘러싸고 많은 학설을 전개했다. 바라문교의 연원이었던 우파니샤드나 베단타학파에서는 아트만을 ‘만물에 내재하는 실체(實體)’로 여겨, 우주 근본인 브라만[梵]과 같은 존재로 보았다. 이것이 이른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으로, 우파니샤드 철학의 중심을 이룬다. 바라문교에서는 ‘나[我]’라고 하는 개아(個我)가 선정(禪定)과 고행을 통하여 브라만과 하나가 됨으로써 최고의 진리를 깨달아, 죽은 뒤 윤회에서 벗어나, 상주불멸(常住不滅)의 범계(梵界)에 머무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정불변의 존재로서의 ‘나[我]’, 즉 ‘아트만’, ‘자성(自性)’을 부정했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붓다의 무아설(無我說)이다. 인연화합에 의해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 이 몸과 마음, 그리고 그 작용인 업(業)이 있을 뿐, 거기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석가의 가르침에 의하면 영원불멸하는 영혼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무명업장과 그 무명으로 인한 집착, 집착의 결과물로서의 몸과 마음, 몸과 마음의 작용, 그 작용의 결과로서의 업, 업의 결과로서의 윤회가 있을 뿐, ‘나’라고 할 만한 존재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의 연기설(緣起說)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설은 대승불교가 나오면서 일부 대승불교도들에 의해 부정당하거나 그 의미가 달라진다. 대승불교경전에서는 ‘무아’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그 반대 개념인 불생불멸의 자성(自性)을 노래한다. 그 한 예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의 첫 머리를 보자.

 

  “여기 한 물건이 있다. 그것은 본래부터 더 없이 밝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생기지도 않았고 없어지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모습을 볼 수도 없다.” “이 한 물건이 무엇인가?” 옛 사람은 이렇게 읊었다. “옛 부처가 태어나기 전에 의연한 모습의 동그라미 하나가 있었네. 석가도 그것을 몰랐거늘 가섭이 어찌 전하랴!”고 했다.

 

  위의 내용을 유심히 보면 ‘한 물건’이라고 표현돼 있는 ‘아트만’이 있다. 그것은 석가의 법에는 없는 것이다. 석가도 그것, 즉 자성(自性), 아트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가섭이 전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이런 말은 석가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것으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뒤엎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교묘한 거짓말이다. 대승경전 안에 석가의 교설을 부정하는 내용을 많이 넣어 놓았다. 다행히 순수대승경인 금강경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불순대승경인 법화경은 주로 그런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불교의 탈을 쓴 바라문교도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짜 불경을 만든 것이다. 불교수행이 엉망이 돼버린 것은 대승불교도들의 이런 교묘한 술책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부터라도 불교의 정법을 접해야 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바른 수행법을 확립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붓다의 제자가 아니라 사기꾼의 제자밖에 되지 못한다. 과거에는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사기꾼들에게 속았고, 거짓말인 줄도 모르고 가르쳤다. 안타까운 불교의 역사였다. 그렇다고 모든 대승불교가 다 잘 못된 것은 아니다. 금강경과 같은 비교적 순수한 대승경전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강경도 번역과정에서 원래의 의미가 전달되지 못 하도록 고의적으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으로 어렵게 번역하여, 다른 의미로 전해지게 만들었다. 이런 사례를 보면, 대승불교라는 탈을 쓴 바라문교도의 기만적인 술책이 얼마나 교묘했는지 알 수 있고, 또 우리가 그 동안 가짜 경전인 대승경전에 나오는 바라문외도들의 짝퉁 부처에게 속아, 진짜 부처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얼마나 외롭게 만들었는지도 알 수 있다.

 

    구마라습은 왜 我想이 아니라 我相으로 번역했는가?

   

  이 주제는 대단히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문제다. 구마라습은 금강경을 최초로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我想’으로 번역해야 할 것을 ‘我相’으로 번역했다. 여기서 我相을 我想으로 해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육조 혜능대사는 아상에 대해 “어리석은 사람이 재산과 학문, 가문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무시하는 것을 ‘아상(我相)’이라 한다”고 해설했고, 그는 또 수행자의 아상에 대해서는 “마음에 ‘나[能]’, ‘너[所]’라는 의식이 있어서 중생들을 업신여기고 교만한 것”이라고 해설해 놓았다. 이 해석에는 아상의 반대개념인 無我思想(무아사상)은 찾아볼 수가 없고, 아상을 단지 교만심의 의미로 해석해 놓았다. 아상이 원래의 뜻과 다르게 해석되고 있는데, 그것은 구마라습이 ‘我想’으로 번역해야 할 것을 ‘我相’으로 번역해 놓은 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 구마라습은 왜 이와 같이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 하게 번역해 놓았을까? 금강경의 의미를 왜곡시켜, 본인 소속 종파의 교의로 이끌고 가기위해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구마라습은 불순 대승주의자이자, 바라문철학의 有我思想(유아사상)을 펴는 인물로서, 좌선삼매경과 같은 위경을 만들어 낸 인물로 의심되는 자이다. 그는 무아사상인 사상론(四相論)이 본래의 의미대로 전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까닭에 我想을 我相으로 번역하여, 원래의 의미가 전달되지 못 하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마라습은 <성실론>을 번역한 인물이고, 그 논의 6권에 상론(想論)이 있다. 거기에 “無我中我想顚倒(무아중아상전도)”라는 말이 나온다.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가운데 ‘나’라는 생각은 전도몽상”이라는 뜻이다. 한 문장 안에 無我(무아)도 있고, 我想(아상)도 있다. 구마라습은 아상, 즉 ‘나라는 생각’은 무아의 반대개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我想을 我相으로 번역한 것은 무아사상을 없애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그랬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이 글은 <위빠사나금정선원> 조성래 원장의 글입니다. 이 글을 카톡으로 주변의 귀한 분들께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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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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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6.03 조성래 20만원 가까이 듭니다. 피해야할 것은 최근에 개인이 여러 권으로 번역해낸 아함경입니다. 3 종류가 있는데, 가장 최근에 나온 것은 어느 스님이 번역해설해 놓은 것인데, 제가 서점에서 이곳 저곳을 읽어봤는데,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놓은 것이 많고, 오역도 너무 많아 비싸기만 비쌋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책으로 보였습니다. 홍사성의 책은 번역은 괜찮은데, 번역이 잘 안되는 어렵고 중요한 내용은 피해갔다는 점이 흠입니다. 그러니 이 카페의 아함경 제1권에 실린 저의 번역이 현재까지는 가장 잘 된 번역이고, 가장 중요한 내용들을 다룬 것일 겁니다. 그것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입하셔도 번역이 시원찮
  • 답댓글 작성자대전사람 | 작성시간 15.06.03 조성래 이렇게 신경 써주셔서 다시한번 감사인사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성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6.03 조성래 으면 읽어지지가 않습니다.
  • 작성자일로평안 | 작성시간 15.10.25 아전인수...아상 설명은 흡사하나 아상을 벗지는 못햇네. 그게 서로상과 생각상의 차이.
  • 답댓글 작성자일로평안 | 작성시간 15.10.25 잡아함경으로 금강경을 설명하는 건 배가 배꼽에 붙는 격입니다.
    따라서 이 해석은 한걸음 퇴보한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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