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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2.04.05 <윌리암 M 새커리>
동인도회사 관리자였던 리치먼드 새커리의 외아들로 태어나 1815년 아버지가 죽자 1816년 영국 으로 오게 되었다. 어머니는 1817년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부터 사랑했던 기술관과 재혼한 뒤 1820년 새커리와 함께 살았다. 그는 그래머 스쿨을 몇 군데 다닌 뒤 1822년 런던의 사립학교인 차터하우스에 들어가 그곳에서 외롭고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1828~30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다니는 동안은 이전보다 훨씬 잘 지냈지만, 학위를 받지 못한 채 1830년에 중퇴하고 1831~33년에는 런던의 미들템플 법학원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뒤 직업화가가 되려고도 했는데, 그의 예술적인 재능은 익살스럽고 활기찬 삽화가 붙은 편지나 초기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1832년에 성년이 되면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2만 파운드 유산으로 어설픈 예술가 행세를 했다. 그러나 도박과 투기로 곧 돈을 모두 잃었다. 1836년 파리에서 그림공부를 하던 중 무일푼의 아일랜드 처녀와 결혼했는데, 그의 계부가 한 신문사를 인수해 그를 파리 통신원으로 눌러앉을 수 있게 해주었다. 1837년 신문사가 망한 뒤 아내와 런던의 블룸즈버리로 돌아와 직 -
작성자 이동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2.04.05 새커리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1명은 어릴 때 죽었다(1839). 새커리 부인은 막내딸을 낳은 뒤 1840년에 정신이상이 되어 회복하지 못한 채 시골에서 친구들과 함께 지냈는데, 남편보다 더 오래 살았다. 홀아비나 다름없게 된 새커리는 사교모임에 자주 나갔고, 딸들에게 점점 정을 쏟아 1846년에는 그들을 위해 런던에 집을 장만했다. 1847~48년에 〈허영의 시장〉을 연재물로 출판하면서 명성과 재산을 얻고 그때부터 소설가로 기반을 굳혔다.
그는 말년에 제인 브룩필드라는 여자에게 진지하고 낭만적인 연정을 느꼈는데, 이 일은 그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녀는 그가 케임브리지 시절 사귄 친구의 아내였으며, 새커리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했던 '홀아비 시절'에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었다. 1851년 헨리 브룩필드가 자기 아내와 새커리 사이의 열렬한 정신적 교제를 끝내라고 주장했을 때 새커리는 아내가 정신이상이 된 이후 가장 큰 슬픔을 느꼈다. -
작성자 이동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2.04.05 미국에서 〈18세기 영국의 유머 작가에 대한 강연을 하면서 여행으로 마음을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1856년 이후에는 런던에 정착했다. 1857년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이전에 친하게 지내던 경쟁자 디킨스와 소위 '개릭클럽 사건'(1858)으로 싸웠으며, 1860년에는 〈콘힐 매거진 The Cornhill Magazine〉을 창간하여 직접 편집을 맡았다. 1863년에 그가 죽은 뒤 기념동상이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세워졌다.
그는 디킨스와 함께 19세기 영국의 대표적 소설가이나, 디킨스와는 달리 상류, 중류 계급의 허영에 찬 생활을 상세히 또는 풍자적으로 묘사하였는데, 인간의 약점에 대해서는 지극히 동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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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2.04.05 소설의 사회적 배경)
19세기 영국에 불어 닥친 산업혁명은 영국사회를 온통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 새로운 공장과 기업이 불쑥불쑥 솟아오르고 하룻밤만 지나면 백만장자가 부지기수로 나타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은 장시간의 노동에 지쳐 죽기도 했다. 인생의 의미라던가, 삶의 진정한 가치 같은 것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그저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기 위해 그저 앞을 향해 달려야만 했던 시기였다.
노동자 문제, 실업자 문제 등이 발생했지만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성인들의 힘은 너무나 무력했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노력 때문에 자연히 인간성은 메마르게 되었다. 세상은 공생관계가 아니라 토마스 홉스의 지적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관계였다.
기독교의 붕괴도 사회를 혼란으로 몰아 넣은 한 가지 요인이었다. 기독교는 1000년 이상 서양인들의 정신적 모태였으며 도덕과 윤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 왔다. 따라서 기독교의 붕괴는 자연이 도덕과 윤리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지구상의 생물이 성경의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수십억 년에 이르는 진화의 결과라는 연구가 속속 나오면서 기독교의 교리가 더 이상 사람들을 붙들어 매 -
작성자 이동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2.04.05 뿐만이 아니다. 불변의 영원한 진리로 여겼던 성경 내용에 대한 고증학적 분석도 활발히 진행되면서 많은 부분이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는 내용도 속속 밝혀졌다. 뿐만이 아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 연구한 데이비드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Das Leben Gesu>와 같은 저서도 나왔다. 독일의 루트비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본질 The Essence of Christianity>에서 기독교를 절대적,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의 종교적 욕구에서 나타나는 지구 상의 여러 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았다. 사회생활의 구심점이 되었던 기독교의 영향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인간성은 메말라 갔고 사람들은 경쟁에 이기기 위한 기계와 로봇이 되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옛날 교회가 담당했던 인간교화를 통한 공동체 의식의 환기를 주제로 한 소설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군사독재시절 작가들이 생명을 걸고 독재를 고발하는 글을 썼듯이 19세기 중엽 영국 소설가들도 사회의 부조리와 악을 고발하면서 제도와 의식의 개혁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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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2.04.05 윌리엄 새커리(William M. Thackeray 1811~1863)= 20세기 중엽까지 영국의 소설문학을 대표하는두 사람의 대가는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와 색커리다. 작가로서의 대중적 인기는 디킨스가 단연 높았다. 새커리는 좀 대조적인 작가로 존경을 받았다.
<허영의 시장 Vanity Fair 1848>으로 불멸의 전당에 등재된 새커리는 당시 권위 있는 문예사상 잡지의 편집장으로 문단에 막중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속악한 대중을 경멸 혐오했으며 풍자적인 묘사에 능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 인간이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며 서로를 이용하고 배신하는 모습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며 인간의 속물근성에 대한 역겨움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새커리의 <허영의 시장>이 바로 그런 작품이다. -
작성자 이동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2.04.06 스노비즘은 대커리의 풍자소설에서 이 세상의 속물의 전형을 교묘하게 잘 표현했다.
대커리는 주로 사회 중, 상류층을 대상으로 다루었다. 스노브란 말은 일종의 속어로서 시골인, 또는 신분이 낮은 사람이란 뜻으로, ‘야비한 것을 비속하게 칭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커리의 가장 유명한 소설은 ‘허영의 시장’이다. 부르주아지 계급을 가장 잘 파악하고 쓴 소설이라는 평을 듣는다.
탐욕스럽고, 호색적이고, 우둔한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인간희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