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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작성자서영화 (멍석)|작성시간26.06.21|조회수27 목록 댓글 1

 

 

 

                                       수덕여관(修德旅館)

  

                                                                                                                       서영화

  나혜석의 발자취를 좇아 예산 수덕사를 세 번이나 찾았다. 올봄에는 그녀가 어릴 적에 자주 놀려갔던 수원 서호지를 거닐기도 하였다. 이번 예산행은 조금 더 깊이 그곳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수덕사에 도착했을 때는 한낮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주변 식당 주인이 추천한 산나물 비빔밥을 먹은 뒤 수덕사를 향해 걸었다. 햇빛이 땅바닥을 달구고 있었으나 하늘을 찌를 듯한 초록빛 나뭇잎 그늘이 더위를 식혀 주었다.

  십 분쯤 갔을까, 왼쪽 작은 교량을 건너자 듬직한 초가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간판에는 검은 글자로 수덕여관이라 적혀있었다. 절간에 웬 여관인가 싶었다. 갈 길이 바빠 나중에 보기로 하고 안내판을 따라 산길로 올라갔다.

  경내에 들어서니 덕숭산의 장엄한 자락이 병풍처럼 펼쳐졌다. 먼발치에서 대웅전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가사도 온전히 모르면서 수덕사를 배경으로 한 노래 수덕사의 여승을 흥얼거렸다. 맑은 하늘 아래 사찰 곳곳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햇빛이 엷어졌다. 해거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하늘이 어스레해졌다. 금세 비가 쏟아질 듯하였다.

  그때 문득 수덕여관이 떠올랐다. 아직 둘러보지 못한 곳이 남아 있었지만 발길을 돌렸다. 내려오는 길에 바람이 거세게 불고 는개가 잠시 스쳤으나 이내 하늘은 다시 맑아졌다. 산길에 핀 작은 꽃들은 다음에 또 오라는 듯 바람결에 흔들렸다.

  수덕여관에 닿아 돌계단을 올랐다. 넓은 마당에는 이응로 화백이 암각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도 한참 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다. 이름으로만 알던 화가의 작품을 깊은 산중에서 만난다는 것이 신기하였다.

  여관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연장들이 어지럽게 놓여있었고, 인부들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다. 네 개의 방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방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작은 장롱과 경대, 앉은뱅이책상이 남아 있었다. 대문 가까운 큰 방 앞에 서니 나혜석이 이곳에서 지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이응로 화백은 젊은 시절 수덕여관을 찾아와 나혜석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훗날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화가가 된 그에게 그녀의 영향은 적지 않았고, 그가 파리에 가게 된 연유도 그녀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나혜석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화가이자 문필가였다.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여성의 권리와 자아를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며 시대를 앞섰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그녀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혼 이후 그녀를 향한 세상의 시선은 더 차가워졌다.

  그 무렵 그녀는 수덕사를 자주 찾았다. 수덕사에는 일본 유학 중 친하게 지낸 일엽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공 선사에게 비구니가 되기를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수덕여관을 인수해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그림을 그리며 지난날을 잊으려 했을까. 아니면 세상의 냉대를 견디며 홀로 자신을 다독였을까. 이야기 나눌 사람이 그리우면 견성암의 일엽 스님을 찾아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때론 어린 자식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도 많았을 것이다. 풍문에 따르면, 늦은 밤에는 마루에 앉아 자식 있는 쪽 하늘 보며 반달을 몇 번이고 불렀다고 한다.

  구미 여행 시절,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맛깔스러운 식사를 하고 스케치북을 들고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미술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때가 한없이 그리웠을 것이다. 그 시절은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귀국한 뒤에도 자나 깨나 파리에 가고 싶어 애를 태웠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참 동안 방 안을 둘러보다가 여관을 나섰다. 얼마쯤 걷다가 등을 스치는 산들바람에 뒤돌아보았다. 수덕여관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지만, 나혜석의 쓸쓸한 뒷모습은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가슴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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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서영화 (멍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22 오래전부터 윤심덕과 이난영을 공부하다
    1896년생인 나혜석, 김일엽, 김영순이
    일본 유학했고, 귀국후에도 여성 선구자로
    활동한 것을 알았습니다.
    젊은 나이에 타계한 김영순을 제하고윤심덕과 김일엽에 관한 자료를 모아 공부하였습니다.
    글중에 나혜석이가 자식이 그리워서
    밤마다 <반달>를 불렸습니다.
    김일엽의 아들 김태산 (김천 직지사 주지 역임)의 자서전에서 엄마 친구인 나혜석을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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