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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

작성자이미환|작성시간26.06.20|조회수126 목록 댓글 5

우리 산(2026.6.15.)

 

  이미환

 

내가 태어나 뛰어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산골 마을,

엄마의 울음과 웃음을 가리지 않고 지금껏 받아주고 있는 내 고향 산천,

아버지가 엄마를 만나 터를 잡으시고, 한평생 사시다 돌아가시고 묻히신 땅,

막내 남동생이 객지 생활을 마감하고 재로 돌아와 흩뿌려진 산릉,

그곳에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빙 둘러싸고 앉아, 천둥 번개도 어쩌지 못하도록 우리를 지켜주는 산들이 있다. 그 산들중에 우리 부모님의 땀이 곳곳에 베어 있는, 우리 가족을 품어 주는 산이 하나 있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통에 큰 아들을 빼앗기고, 일찌기 청년 아버지께 집안의 전권을 이양하시고 자진하여 뒷방으로 물러나 앉으셨다. 스물도 되기 전 미혼인 채로 청년 아버지는 강제로 가장이 되어야만 했다. 청년의 눈엔 가족이 제때 끼니를 이어가는데 정미소 만한게 없겠다고 생각하셨다. 동업자를 구해 기계 한대를 마련하여 정미소를 시작하셨다. 청년의 생각대로 일이 풀리면서 동업자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고, 어려운 형편이지만 26세의 나이에 아버지 보다 6살 어린 엄마를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질 높은 비료와 농약의 보급으로 보리와 벼의 수확량이 해마다 늘어났고, 이고울 저고을에서 소달구지 가득 실려 온 도정을 기다리는 보리와 벼, 밀가마니들이 공장 한켠에 쌓여갔다. 정미소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탕탕 소리를 내며 쉴새 없이 돌아가는 날이 많아졌다. 그 세월 동안 자식은 5명으로 불어났고. 자식들의 교육을 고민하던 끝에 대구에 허름한 집 한채를 구입하여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나라에서 보리와 벼를 비축미로 쓰기 위하여 공공수매를 시작하면서 정미소의 일감은 줄어 들어가고, 설상가상으로 보리와 밀을 심는 집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구책으로 마을을 둘러싼 여러 산들 중에서 개간이 가능한 넒은 구릉을 가진 산을 매입했다. 새벽이면 곡괭이와 톱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 하루 한 뼘 구릉 땅 개간을 시작하셨고, 매일 아침 산에서 내려오시는 아버지의 바지개엔 잘린 나무며 파낸 나무 뿌리가 그득 실려 있었다. 그렇게 서서히 정미소 공장주에서 땅을 일구는 농꾼으로의 변화를 준비하셨다. 그렇게 일구어낸 밭의 넓이는 족히 4,000평도 더 될만큼 넓어 졌고, 그 밭에 특용작물인 담배 농사를 시작하시면서 정미소를 접으셨다. 밭 한켠에 담배 잎을 말리는 굴도 함께 지으셔서 노동의 효율성을 도모하셨다. 덕분에 우리 5남매는 크게 굴곡 없이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마을 들판으로 이어진 산 구릉에 일구어진 밭에 들어서면 시야가 탁 트이고 마을 앞산이 막힘없이 눈앞으로 내달아 올듯하다. 산의 경사가 이어져 내려오는 밭의 상부, 밭을 휘 둘러볼 수 있는 햇빛 잘 드는 높은 곳에 아버지의 묘를 세웠다. 아버지 묘지 둘레 펼쳐진 잔디밭에 자리 깔고 앉아, 푸른 하늘을 등지고 히염없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살랑이는 바람이 아버지의 손길처럼 내 피부를 건드리며 지나가곤 한다. 엄마께 배속의 내 존재를 듣고 들뜬 그 새신랑은 재 너머 하루길 걸려 바다 가까운 장에서  미역을 사다두곤 내가 하루빨리 세상밖으로 나오길 기다리셨다고 한다. 어릴때 나는 내 이름에 남자처럼 환()자가 들어 있어서 싫어했다. 그런데 그 환()자가 남자들에게만 주로 붙여주는 돌림자라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게 격식을 갖추어 술을 따라 주시면서 주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고, 내가 주변의 권유로 상고를 지원했을때 아버지는 아쉬워 했으며, 다니던 직장을 상의 한번 없이 그만두고 대학에 들어가기로한 나의 결정을 흐뭇하게 지켜봐 주셨다. 폐암 판정을 받고 약 6개월, 입퇴원을 반복해야 했으며, 내가 병상을 지키던 시간에 난 아버지와 평생 나눈 이야기보다 더 많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꼭꼭 가슴 깊이 묻어 두셨던 애틋한 첫사랑 이야기까지 풀어놓으셨고, 그 여인도 몇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하시며 멀리 눈길을 던지셨다.

  잔디에 앉아 있노라면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모든 날들이 아름답게 각색되곤 한다. 그때는 아팠는데, 그때는 슬펐는데, 그때는 원망스러웠던 일들도 모두 아름다운 그리움으로 물드며. 지금 내 앞의 걱정거리들과 내 불안을 다독여 준다. , 여름, 가을, 겨울 사철 언제든지 편하게 찾아갈 수 있는 내가 좋아하는 장소 중 한곳이 되었다.

 

엄마는 산 이곳 저곳을 손금보듯 훤히 뚫고 계신다. 이른 봄, 나무에 물이 오를 시점이면 산속 고로쇠 나무에서 물을 채취하셨고, 각종 종류별 산나물들이 어느 장소에 언제 올라오는지 알고 계셨고, 고사리가 한창 돋아날 때면 하루가 멀다하고 산을 찾으시곤 하셨다. 봄이면 밭 둘레 산비탈에 들어선 두룹나무 순 따기, 가을이면 산 한켠에 무리지어 있는 밤나무 아래서 알밤 줍는 일은, 매년 내가 놓치지 않고 산속에서 산으로부터 산이 주는 풍요로움을 즐기는 시간이다.

 

  산 꼭대기 능선 한자리는 막내 남동생의 숨결과 삶의 애환이 서려 있다.

남동생은 2년 전에 추석을 쇠러 고향에 잠시 들렀다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노모는 애달파 하면서도 뭔가 짐을 내려놓은 듯 시원하다고 하셨다. 그 동생은 나보다 10살 어리며. 국민학교 5학년이 되면서 엄마를 떠나 누나인 나를 엄마처럼 생각하며 자라야 했다. 채워지지 못한 많은 결핍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했고. 정신병원을 들락거렸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남동생 뒷바라지가 우리 다른 형제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이 되지 않도록 조치를 해 놓으셨지만, 수시로 행방을 감추는 남동생의 뒷치닥거리에 가족 모두들 지쳐가고 있었다. 2년전 무언가를 예견한 듯 엄마를 찾았다가 갑자기 세상밖으로 사라졌다. 엄마는 그런 남동생이라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길 바란다며 산꼭대기에 한줌 재로 남은 동생을 뿌리길 원하셨다.

 

  아버지와 남동생의 삶의 궤적은 참으로 많이 달랐지만 이젠 함께 우리 산의 품안에서 쉬고 있다, 언젠가는 엄마가 돌아갈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있는 산, 지금껏 내가 가장 많이 찾았고, 앞으로도 즐겨 찾아 갈 산, 거기 우리 가족의 역사를 안고 있는 산이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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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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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양홍철 | 작성시간 26.06.20 글 제목이 '우리 산' 이기에 먼가 공적인 의미를 가진 계몽적인 글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글을 읽었습니다.
    한번 읽고 가슴이 먹먹해 졌습니다. 연거푸 3번을 읽었습니다.

    가족들의 애환과 추억, 성취와 눈물, 그리고 사랑이 녹아있는 그야말로 '우리 산'이었습니다.
    '우리 산'은 도화지 이고 그 위에 아버지, 어머니, 동생, 이선생님, 그리고 다른 식구들까지 각자가 자기 구역에 삶의 수채화를 그려서 그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한장의 가족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이미지가 떠 올랐습니다.
    그 그림은 후손들의 마음의 액자에 담겨서 다음 세대에게도 전달될 것입니다.

    "새벽이면 곡괭이와 톱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 하루 한 뼘 구릉 땅 개간을 시작하셨고, 매일 아침 산에서 내려오시는 아버지의 바지개엔 잘린 나무며 파낸 나무 뿌리가 그득 실려 있었다."
    아버지의 성실함의 이미지를 잘 묘사하신것 같습니다, 짝짝짝!!!
  • 작성자황보0락 | 작성시간 26.06.20 우리 마을에도 예전에는 산비탈에 밭이 많이 있어습니다. 소가 쟁기를 끌고 밭을 갈아엎는 곳이었죠.
    지난 시간의 울림이 오는 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박승숙 | 작성시간 26.06.20 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가족의 서사가 대하드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 작성자박춘희 | 작성시간 26.06.20 산같이 묵묵하게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신 아버님과 가족의 역사를 잘 표현하셔서 감동깊게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김대희 | 작성시간 26.06.21 부모님의 땀이 베어있는 가족을 품어주는 산에 아버지를 모시고 그때처럼 도란도란 야기하며 가족의 역사를 안고 있는 산의 글 가슴 뭉클 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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