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검색 펌
이 작품은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될 당시 엄청난 파격을 몰고 왔으며,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인해 결국 조기 종연된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오감도>
조감도(鳥瞰圖)에서 오감도(烏瞰圖)로
보통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도면을 새 조(鳥) 자를 써서 '조감도'라고 하지만, 이상은 이를 까마귀 오(烏) 자로 바꾸었습니다. 까마귀는 전통적으로 불길함이나 죽음을 상징하는 새입니다. 즉, 이 세계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결코 희망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고, 불안과 공포, 죽음의 징후로 가득 차 있음을 암시합니다.
*'문화포털' 펌
오감도(烏瞰圖) 시 제1호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참고: <이상문학전집: 시>,
1989<오감도>는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이상의 시 작품들로 연재 도중 독자들의 비난이 빗발쳐 중단되었다. 이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긴장, 불안, 갈등, 싸움, 공포, 죽음, 반전 등 자의식 과잉에 의한 현실의 해체를 그 기본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 중 대표작으로 알려진 <오감도 시 제1호>는 사람들이 서로를 두려워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역전(逆轉)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13’이라는 숫자의 반복적 사용, 반전에 의한 부정, 신조어 사용 등으로 이루어진 이 시의 표면적 의미는 매우 단순하다.
①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한다, ②13인의 아해가 모두 무섭다고 한다, ③그 중의 어느 아해가 무서운 아해이든 상관없다, ④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이 시는 ①과 ④, ②와 ③이 각각 대응을 이루고 있는데, ①의 내용을 ④에서, ②의 내용을 ③에서 뒤집고 있다. 길은 막다른 골목이라도 적당하지만, 뚫린 골목이라 하여도 무방하고, 13인의 아해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으나 질주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다. 이런 뜻에서 13은 13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 시는 처음부터 비구상(非具象)의 언어, 곧 현실없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시 작품 안에는 반논리(反論理)가 구축한 반현실(反現實)의 현실이 있을 뿐이다. 결국 이 시는 13인의 아해의 정체나, 질주의 의미, 질주의 방향 등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13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이며 동시에 무서워하는 아해라는 사실, 곧 공포라는 주제를 강조한다. 대상이 분명치 않은 공포의 세계는 이른바 불안의 세계로 해석되며, 따라서 이 시는 일제강점기, 나아가 현대인들이 체험하는 불안을 반어의 기법으로 노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참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권영민 편, 서울대출판부, 2004 <국어국문학자료사전>, 국어국문학편찬위원회 편, 한국사전연구사, 1995(……)
<조선중앙일보>의 학예·문예부장이던 이태준의 발탁으로 활자세례를 받은 <오감도> 연작은 예정된 30회의 반밖에 싣지 못하고 15회 만에 중단되고 만다. <오감도>가 나가는 동안 안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니던 이태준은 이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상의 <오감도>는 처음부터 말썽이었어. 원고가 공장으로 내려가자 문선부에서 ‘오감도(烏瞰圖)’가 ‘조감도(鳥瞰圖)’의 오자가 아니냐고 물어왔어. 오감도란 말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듣도 보도 못한 글자라는 것이야. 겨우 설득해서 조판을 교정부로 넘겼더니, 또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 나중에 편집국장에게까지 진정이 들어갔지만 결국 시는 나갔어. (……) ‘무슨 미친 놈의 잠꼬대냐’ ‘무슨 개수작이냐’ (……) 신문사에 격렬한 독자투고와 항의들이 빗발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지.” 당대를 훨씬 앞지른 ‘첨단’, 이 도저한 정신분열적 언어의 파행에 독자들은 이토록 거부감을 나타낸다.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정서로는 수용 불가능했던 시 <오감도>. 그러나 당대 사람들에게 모독당한 그의 시는 뒷날 구태의 한국문학과는 차별화된 새로운 모더니즘 문학의 진경을 펼쳐보인 ‘앞서간 문학’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불멸의 자리에 각인되며, 후학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다. (……)
1910년대 중반 스위스·독일·프랑스에서 일체의 전통과 기성가치를 부정·파괴하고자 한 다다이즘(Dadaism), 이어서 1920년대 중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브르통(Breton)에 의해 시도된 기성윤리와 역사 및 현실통념을 거부하고 주관적 내면세계를 심리적으로 분석하는 기법을 차용한 초현실주의(Surrealism). 이 두 가지는 일본에서 나온 이론을 1924년 고한용이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일본에서조차 불온시된 탓으로 우리나라에 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다가 1930년대에 들어 건축기사 출신의 한 젊은이에 의해 본격적으로 시도된 것이다. 이상의 시는 현대인의 절망과 불안심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찬사도 받지만, 기존 언어체계와 질서에 익숙하던 일부 문인과 일반독자에게는 문학에 대한 커다란 모독처럼 여겨진 것 또한 사실이다.
<오감도 시 제1호>에 나오는 ‘13인의 아해’는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의 13제자를 상징한다는 풀이를 비롯해 현실의 불안·공포·부조리·혼란·모순을 나타낸 것이라는 등 숱한 견해를 낳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주 들추는 하나의 보기일 뿐, 이상의 거의 모든 작품이 이처럼 고정관념과 보편성을 무시한 파격으로 치닫는 까닭에 뒷날 끊임없이 비평가들의 다각적인 연구대상에 오르게 된다. (……) - ‘모독당한 최초의 모더니스트’, 장석주, <이상 전집>, 가람기획, 2004(……)
설명시의 경우 문맥을 살피기 위한 기본전제는 주어와 서술어를 찾는 일로 요약된다. 이때 주어는 화자가 설명하려는 대상을, 서술어는 그 대상에 대한 화자의 의견, 주장을 의미한다. 이 시의 경우 주어는 ‘13인의 아해’이며, 서술어는 1) ‘도로로 질주한다’, 2) ‘도로로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3)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로 이루어진다’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집약되는 서술어는 좀더 찬찬히 읽을 때 1), 2)보다는 3)이 한결 타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왜냐하면 1), 2)를 한데 묶어 서술어의 형식으로 만들 때, 이 시의 문맥은 결국 ‘13인의 아해는 도로로 질주하든 질주하지 않든 상관없다’는 것이 되며, (……) 문맥에 따를 때 그것은 자연스럽게 3)의 형식이 더욱 중요함을 알려준다. 이 시의 문맥을 검토함에 있어서 기본전제는 그렇기 때문에 ‘13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는 다시 누가 무서운 아해이고 누가 무서워하는 아해인가하는 문제를 낳는다. 그렇지만 13인의 아해 가운데 누가 무서운 아해이고, 누가 무서워하는 아해인가라는 분별 역시 중요치 않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18·19·20·21행이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의 문맥은, 다시 말해서 문맥적 의미는 13인의 아해가 무서움을 표상하고, 동시에 무서움에 시달리는 존재를 표상한다는 결론을 낳는다. 그러나 문맥에 따를 때 이 무서움의 내용, 조건, 이유 등은 찾을 방법이 없다. 따라서 이 무서움은 어떤 객관적 이유가 없는, 다시 말하면 대상이 분명치 않은 무서움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 이유가 없거나 대상이 분명치 않은 무서움의 세계는 공포가 아니라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가 드러내는 문맥적 의미는 결국 13인의 아해가 불안을 표상하며 동시에 시달린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어떤 삶이 불안 자체이면서 동시에 불안에 시달린다는 것은 하이데거 식으로는 무를 체험하는 영역, 곧 실존적 투기가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해석된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시의 공간, 사건, 대상, 인물 등을 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결국 현대인이 실존을 체험하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화자는 그러한 불안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스로를 풍자한다. (……)- <이상 시 연구>, 이승훈, 고려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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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혜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7 이 詩를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그릴까 어젯밤 뜬금없이 생각을 했다.
1.13차선 도로에서
13명의 아이들이
달리는 모습
2.몽골 길이 없는 그 황량한 곳을 질주하는 13명의 아이들
3.우주 그 깜깜한 곳에서 태양을 향해 달리는 13명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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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혜경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7 요즘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고민하다 이상의 이 詩가 눈에 들어왔다.
늘 뻔한 사진, 그림,글은 싫음에도 정작 어떤게 뻔한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글을 왜 쓰냐는 원론적 질문의 답은 매일 바뀐다.
하지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야지 하는 생각은 변함없다.
그 글이 다른이들에게 공감지수가 높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아직 나는 유명한 작가도 책을 낸 작가도 아니다. 문장력은 미숙하고 어휘력은 부족하다. 작가라는걸 내이름 앞에 두는게 어색하고 부끄럽다.
요즘 습작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완성과 발표에 목적을 둔 글이 아닌 나의 지금 생각을 표현하는 글. 때로는 비틀어보고 파격적이어도 시도는 해보자. 버려지든, 묻혀지든 ... 일단 써보고 생각하자.
발표작에 염두를 두고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 요즘 깨닫는다.글에 완성이 없음도 알았다. 이상의 오감도는 이상의 수많은 연습작과 버려지고 찢겨진 원고지에서 탄생한 것이겠다. 속도보다는 방향만 잃지말자. 심지어 그 방향에 대해서도 늘 고민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