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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삼국사기 三國有名未詳地分은 조선이 조작 추정.

작성자心濟|작성시간15.02.07|조회수414 목록 댓글 7

 

삼국사기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地理四 百濟

 

三國有名未詳地分

 

調駿郷 柛鶴村 翔鸞村 對仙宫 鳳庭村 飛龍村 飼龍郷 接仙郷 敬仁郷 好禮郷 積善郷 守義郷 斷金郷 海豊郷 北溟郷 麗金成 接靈郷 河清郷 江寧郷 咸寧郷 馴雉郷 建節郷 救民郷 鐡山郷 金川郷 睦仁郷 靈池郷 永安郷 武安郷 冨平郷 糓成郷 密雲郷 冝禄郷 利人郷 賞仁郷 封徳郷 歸徳郷 永豊郷 律㓛郷 龍橋郷 臨川郷 海洲成 江陵郷 鐡求郷 江南郷 河東郷 激瀾郷 露均成 永壽成 寳劒成 岳陽成 萬壽成 濯錦成 河曲成 岳南成 推畔成 進錦成 澗水成 傍海成 萬年郷 飮仁郷 通路郷 懷信郷 江西郷 利上郷 抱忠郷 連嘉郷 天露郷 漢寧成 㑹昌宫 邀仙宫 北海通 鹽池通 東海通 海南通 北傜通 末康成 脣氣成 奉天成 安定成 萊遠城 萊津成 乹門驛 坤門驛 坎門驛 艮門驛 兊門驛 大岵城 岱山郡 枯彌縣 北隈郡 非惱城 瓢川縣 皐夷㠀 泉州 冷井縣 慰禮城 比只國 南新縣 腰車城 沙道城 骨火國 馬頭柵 槐谷城 長峯鎮 獨山城 活開城 芼老城 廣石城 坐羅城 狐鳴城 刀耶城 狐山城 臨海鎮 長嶺鎮 牛山城 汲里彌城 實珍城 德骨城 大林城 伐音城 株山城 多伐國 近嵒城 靳城 椵岑城 党項城 石吐城 富山城 阿旦城 缶羅城 耳山城 甘勿城 桐岑城 骨平城 一云骨爭 逹咸城 西谷城 勿伐城 小陁城畏 石城 泉山城 雍岑城 獨毋城 缶谷城 西單城 獼猴城 櫻岑城 岐岑城 旗懸城 冗柵城 蛙山城 濕水 龍馬 猪岳 甁山 直朋 逹伐 𣏏山 木岀島 狗壤 大丘 沙峴 熊谷 風㠀 斧峴 狼山 叢山 安北河 泊灼城 蓋馬國 句茶國 華麗城 藻那國 赤鎮 檀廬城 加尸城 石城 水口城 卑倉城 蓋牟城 沙卑城 牛山城 道薩城 白嵒城 津安城 蒼嵒城 辱夷城 松讓國 荇人國 横山 白水山 迦葉原 東牟河 優滶水 淹淲水 或云蓋斯水 沸流水 薩水 毛屯谷 鶻嶺 龍山 鶻川 涼谷 箕山 長屋澤 易山 礪津 尉中林烏骨 沙勿澤 貴湍水 安地 薩賀水 矛川 馬嶺 鶴盤嶺 馬邑山 王骨嶺 豆谷 骨句川 理勿林 車迴谷 曷思水 椽耶部 北溟山 閔中原 慕夲 罽山 倭山 蚕支落 平儒原 狗山瀬 坐𠩤 質山 故國谷 左勿村 故國𠩤 裴嶺 酒桶村 巨谷 青木谷 杜訥河 柴𠩤 箕丘 中川 海谷 西川 鵠林烏川 水室村 思收村 烽山 候山 羙川 斷熊谷 馬首山 長城 磨米山 銀山 後黄 嬰留山 小獸林秃山 武厲邏 大斧峴 馬首城 瓶山柵 普述水 烽峴 秃山柵 狗川柵 走壤城 石頭城 髙木城 圎山城 錦峴城 大豆山城 牛谷城 橫岳 犬牙城 赤峴城 沙道城 德安城 寒泉 釡山 石川 狗原 八𡊠城 關彌城 石峴城 雙峴城 沙口城 斗谷 耳山城 牛鳴谷 沙井城 馬浦村 長嶺城 加弗城 葦川 狐山 穴城 獨山城 金峴城 角山城 松山城 赤嵒城 生草原 馬川城 沉峴 眞都城 髙鬱府 葛嶺 支羅城 或云 周留城 大山柵 郁里阿 崇山 張吐野 絶影山 清津 遺鳳㠀 大阹 汧隴 鳧栖㠀 鳳澤 龍丘 連城原 浮雲㠀 天馬山 海濵㠀 壑中㠀 玉塞 連峯 叢林 升天㠀 乗黄㠀 八駿山 絶羣山 求麟㠀 負圖㠀 吐景山 河精島 遊氣山 平原 大澤 騏驎澤 躡景山 金穴 蘭池 西極山 浦陽丘 鐡伽山 桃林 石礫山 瑞驎苑 麓苑 沙苑 風逹郡 日上郡(이상)

 

요녕성 西京에서 일어난 <묘청의 난>을 평정하고 한반도 개성과 요녕을 일괄했던 고려의 문신이자 학자가 요녕지방, 한반도 지명을 모른다 ?

 

고려초기와 그 이전 삼국이 쟁패하던 산서 하북의 대륙지명이 무수히 많은데 12세기 고려사람 김부식은 11세기 현종 이후 이미 요녕지방으로 넘어온 2차 수도와 개경을 오가며 삼국사기를 저술했을것인바 이미 300여년 지난 삼국 당시 대륙지명을 모를수 있으나 그의 주변에 있던 요녕과 한반도 지명을 모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서 말하는 김부식의 사대사상을 비난하기보다는 조선초기 고려사를 많이 손댔다는 의구심이 강하다.

고려는 국초부터 정치적 환경에 따라 事大를 하는 척 했지 진심으로 꺾인적이 드물었다. 송과 거란에게도 그랬고 심지어 원나라의 기록에도 "고려를 다루기가 애를 먹는다"고 쿠빌라이조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했던 고려가 어느 순간 스스로 불충하다고 자각하며 고려왕조실록을 전부 개찬했다는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원나라 그 자체도 夷族으로 중화 왕조라는 宋을 없앤 나라 아니였던가?  

 

조선에 들어서 중종 년간(1512)에 고려사(정덕본)를 다시 완판본하면서 여러 기록에 근거하면 조선초 잃어버린 압록강 이북지방의 지명을 고려사 편찬자 김부식의 이름을 빌어 모른다고 한것으로 본다.우리나라에13세기 판본(국보)이 소수 남아있다고 하니 정덕본과 비교해보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부터 900년전 先人 김부식도 모른다던 지척에 있던 당시의 지명들을 현대의 이병도가 척척 그 지명을 『삼국사기역주,1966년판』에 대입하고 그 후학들은 척척 그 성 위치(붉은색 지명들)를 요녕성에 있음을 찾아낸다.

 

2000년전 지명 위치가 현재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기준으로 논문 발표하는 사람들의 지명 위치가 정말 맞을까?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심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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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한 눌 | 작성시간 15.02.09 조선 이전 역사는 타국의 역사였음이다. 동족 계념에서 크게 벗어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역성의 당위성이다. 대륙을 지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여기에 대 집단의 사대부들이 부화뇌동했다. 역사서는 불태워도 역사는 태울 수 없음이다. 아, 김부식 그를 위한 변명의 조의제문이라도 써야 하지 않을까.
  • 작성자史穿(청송) | 작성시간 15.02.09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오직 明에 사대하고 尊周하였을 뿐
    이전의 우리 역사의 계통을 계승한다는 인식이 없었으니...즉, 완전히 새로이 작출한 初有의 新生國家이었으니...
    지금의 우리가 이 李朝의 自請屬國 역사를 계승한다면, 李朝 이전의 역사는 오롯이 우리 것이 아니게 되어 심히 괴롭다.
    이 질곡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고...또한 오롯이 우리 옛 역사 계통을 온전히 계승할 방안이 무엇이겠는가?
  • 답댓글 작성자history author | 작성시간 15.04.13 쩝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계시군요 소서행장의 부장이 임란이후 쓴 책을 보니 선조임금의 복장이 황제의 복장과 관(통천관)을 쓰고 있었습니다. 왕건의 관과 동일한 것이지요. 세조의 어진중에 통천관을 쓴것도 본적이 있습니다. 먼가 이상하지 않나요? 그 장수의 글을 보니 조선수도를 가리켜 황성이라 하고 조선임금을 천자라고 했습니다....조선의 궁궐이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로는 황제의 궁으로 9개의 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선조이전 조선과 명은 형제지국으로 보입니다..신하국이 아니란 거죠. 거란과 고려는 형제지국인데 송나라는 고려를 깍아내리려고 신하국이다라고 했죠.. 태조와 태종이 명을 침공하려고 준비한 기록도 있고..
  • 답댓글 작성자history author | 작성시간 15.04.13 선조때 임진왜란에서 명나라가 군량과 병력을 빌려준건 사실이죠.그래서 임란이후에는 선조가 명에게 굴종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당시까지 대부분의 남자들은 귀고리를 하였는데 (쥬신족의 특징이죠)선조이후 금지했죠..
    선조와 인조가 조선역사를 말아먹었지만 선조이전 임금들은 적어도 황제국을 계승하고 만리의 땅에 40만이 넘는 병력을 유지한 강력한 국가였습니다. 스스로 제역사를 깍아먹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 작성자心濟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2.09 전공분야에 많은 의견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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