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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

태조왕건,본명은 왕봉규(王逢規)?.

작성자石柱齋|작성시간15.06.20|조회수804 목록 댓글 5

 

운영자는 고려 태조왕건의 이름과 정체에 대한 의문이 있어 왔다.

이름이 상당히 작위적이었던  것이다. 왜 王建 일까 그리고 그는 누구인가 ?

 

그런데

 

<삼국사기> 경명왕,경순왕조를 보면 931,934,937년에 왕봉규(王逢規)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상 왕봉규는 신라왕과 대등한 위치의 신하로서 천주절도사의 직책을 가졌고 당시 후당에 사신을 보낼 정도였다. 

 

왕봉규는 <오대사> 後唐과 後晉에도 등장한다.

 

왕건립은 10세기초 鎭州節度使, 靑州節度使라는 직함으로 後唐에서 활동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고려사>태조조에는 後晉에 머무르고 있는 고려인 인질 왕인적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내용과 <오대사>後晉朝에는 靑州節度使  왕건립이 왕에게 고려질자 왕인적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결국 청주절도사 왕건립과 태조왕건은 동일 인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같은시기에 [삼국사기]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왕봉규는 泉州節度使라는 직함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후당에 방물을 보내고 있다 .

 

 

황조일통여지전도(1865)

 

천주는 현 복건성의 천주를 말한다. 

 

[삼국사기] 신라 경명왕

年春正月 泉州節度使 王逢規 亦遣使貢方物 (924)

1월 천주절도사 왕봉규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다.

 

[新五代史]5 唐本紀5 章宗

同光二年(924) 春正月,, 新羅國王 金朴英及其泉州節度使王逢規皆遣使者來.

신라국왕 김박영과 그 천주절도사 왕봉규가 모두 사신을 보내왔다.

 

오대사는 복건성 泉州가 신라 영토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오대사에는 926,927년 후당에 조공하러간 사신중에 張彬如가 아닌 張芬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운영자는 이들이 같은  인물로 본다. 

 

결국 삼국사기,고려사,오대사를 분석하면 같은 시기에 동일 인물이 왕건립(오대사), 왕봉규(삼국사,오대사),왕건(삼국사,고려사)으로 활동하고 고려를 건국한 開祖인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중국사가들이 논문으로 발표한 왕건이 淮水지역의 토호라는 것이 사실로 증명되고 있으며 그간 중국의 역사서술과 달리 후당에서는 고려인 왕봉규에게 작위를 주고 국가의 중요사를 운영하였던 것이다.  

즉 [오대사] 역시 왕건이 활동하던 하북,산동,강소,절강,복건등 신라영토를 후당의 영토로 서술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복건성 泉州에는 배추가 고려채(高麗菜)로 전해지고 있고 복건성에 고려 長樂王墓가 발굴되었다는 2005년 기사(중공 당국에서 숨김)가 있었다.

 

신라때 부터 한민족이 살던곳이며 고려 왕건의 절도사 부임지였던 천주에 고려가와 고려채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일것이다. 

 

 

중국인은 원나라때 고려 사람들이 천주에 이주해와 살았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복건성 천주의 채소상인의 말이다.

 

고려사에는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이 신하로 있었던 後周의 시영은 훌륭한 군주로 기술하고,왕건이 활동했던 後唐의 이존욱은  빼어버린채 갑자기 궁예의 폭정을 거론하지만 궁예는 중국사서에도 없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후당 명종의 정체는 무엇일까?  

 

심제 글.

 

왕건 관련 중국사학계에 반론(?)하는 논문 (사학계)  첨부파일 ‘王建의_중국_출신설’에_대한_비판적_검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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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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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한 눌 작성시간 15.06.23 고려사가 왜곡되어 나오기까지 78년 만인 1469년,
    王씨 족보인 고려성원록이 햇살을 받은 것이 1798년으로 406년.
    의미는 다르나 인고의 세월을 견디었다.
    숱한 수정과 삭제과정을 거친 희안한 명작들이다.
    그 안에 皇名 하나 숨기고 삭제하는 일, 그 명철함이 경이롭다.

    수고하셨습니다.
  • 작성자한 눌 작성시간 15.06.23 신라 통일 후 모든 물건 앞에 나(羅)를 붙이기(명물기략 편)를 강요했다.
    野菜, 우리는 '나물'이라 부른다.
    또 '침반'에 '나'가 붙어 '나침반'이라 했던가.
    '고려채'라, 고려만의 자주적 명칭이 새롭다.
  • 답댓글 작성자심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6.23 또 그러한 역사가 있었군요. 잘 보았습니다.
  • 작성자史穿(청송) 작성시간 15.06.24 첨부물은
    長江과 淮河지역이 오랫동안 新羅와 高麗의 疆域이었음믈 전혀 感도 잡지 못한 半島史觀에 쩔은 이의 反論이었네요...
  • 답댓글 작성자심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6.25 나 바보요~라고 하는 知的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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