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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문화

추사 세한도

작성자芝山|작성시간18.01.06|조회수244 목록 댓글 2

    추사 세한도(歲寒圖)       

                                                         


박용구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매서운 찬바람에 얼어붙은 온 산천, 눈이라도 내려 쌓이면 독야청청 고고한 소나무가 한결 돋보이는 계절이다.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사철 변하지 않은 소나무의 기상을 예찬해 왔다. 우리나라의 살아있는 소나무 중에 이름이 나있는 것은 속리산 정이품소나무나 세금을 낸다는 예천의 석송령을 꼽을 수 있을 것이나 소나무 그림으로는 조선의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사직송도(社稷松圖)나 노송영지도(老松靈芝圖) 등도 유명하지만 문인화로는 추사의 세한도를 뻬놓을 수가 없다.   


추사의 집안은 고조부가 영조때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이며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가 되어 충남 예산 오석산 근처에 사패지(賜牌地)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그 아버지 김노경은 승지, 판서 등 고직을 두루 지낸 금수저 집안이다. 추사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든 박제가에게 북학을 배웠으며 중국에서도 그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의 글씨는 추사체로 명성이 높았으며 금석학의 대가로 추앙를 받았고 벼슬이 대사성, 병조참판까지 올랐다.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 바다 건너 그 먼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8년이라는 유배생활 하였다니 그의 죄명이 무엇이란 말인가?


순조30년(1830) 윤상도(尹尙度)라는 하급 관리가 탐관오리인 호조판서 박종훈, 어영대장 유상량 등을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는데 죄를 지었다는 놈들을 잡이들이지 않고 양심선언을 한 윤상도를 군신 간 의리를 끊어 놓은 죄가 크다고 하여 추자도로 유배를 시켰다. 그 뒤 현종 6년(1840년) 윤상도를 아들과 함께 다시 불러 취조하여 능지처참을 시켰는데 이때 이들 부자의 상소문 초안을 추사가 잡아주었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사실을 사실대로 쓰도록 지도해주었다고 하여 수천리 제주도까지 위리안치 유배란 가당치나 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실은 경주 김씨인 추사집안이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외척간 싸움에 완전히 밀리는 형국이 되어 벌어진 일이다.


추사에게 있어서 제주도의 유배기간은 너무나 슬프고도 고독한 긴 세월이었다. 높은 관직에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바람만 부는 텅빈 유배지에 오는 이도 드물었을 터 항상 고독을 씹으면서 살았다. 이때 동갑내기 초의에게 차를 보내 달라고 편지를 쓰며 혼자 있는 자기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여 초의가 6개월 간 이나 제주도에 가서 같이 지낸 적도 있었다. 추사가 죽은 후 초의는 세상과 문을 닫고 살았다고 하니 두 사람의 우정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 되고 있다.


유배 온지 4년째인 1844년 추사의 제자격인 역관 이상적(李尙迪)이 벼슬에 올라 중국을 다녀오면서 가져온 값비싼 책을 제주도까지 보내와 추사는 기쁜 마음에 그해 여름, 세한도를 그려 주었다.


그림 1. 세한도(歲寒圖). 화제(畫題), 논어 제9장 자한(子罕)편 27절 子曰, 歲寒然後에 知松栢之後凋也(공자 말하시길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알 수 있다).


그림 속에 있는 늙은 소나무는 추사, 나이가 어린 것은 제자 이상적(1804~1865)을,  잣나무는 친구 초의선사(1786~1866)와 궁중 화가인 제자 소치 허련(1809~1892)을 나타내고 있다. 이상하게 보이는 집은 추사의 텅 빈 가슴을 상징하며 나머지 빈 여백은 눈(雪)을 나타낸 것이다. 이 세한도는 내용과 정신을 중요시하는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로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른쪽에 세한도라 적고 그 옆에 우선시상(蕅船是賞)이라 적었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다. 그 아래에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이란 인장이 찍혀있다. 왼쪽에는 이 그림의 감회를 적은 289자에 달한 글이 적혀있다.


이 글은 이상적이 잊지 않고 책을 보내준 것에 감사하고 논어 지송백(知松柏)으로 그를 칭송하고 끝으로 사마천의 사기를 인용하여 한나라 때 적공(翟公)이 높은 벼슬에 있을 때 문전성시를 이루던 사람들이 벼슬이 떨어지자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다시 벼슬을 받자 밀물처럼 몰려오는 것을 보고 자기 집 대문에 써 부쳤다는 방 “一死一生卽知交情(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곧 사귐의 정을 알고), 一貧一富卽知交態(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곧 사귐의 태도를 알며), 一貴一賤卽見交情(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곧 사귐의 정이 나타나네)“ 을 떠올리며  자기의 쓸쓸한 처지에 비유하고 글을 마쳤다.


세한도는 이상적이 중국에 가져가 16명의 문인들로부터 추사의 딱한 처지를 동정하며 이 그림을 칭찬하는 상찬기를 받았다. 이 그림이 평양감사 민영휘(휘문학교 설립자)에게서 그 아들에게 전해졌으나 결국 일제 강점기 추사연구가 후지스카(䕨塚, 당시 경성제대 교수)에게 팔아넘겨지고 말았다.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후지스카에게 팔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1944년 추사관련 작품을 모두 일본으로 반출하여 돌아가자 손재형은 동경까지 찾아가 세한도 반환을 계속 요구하였다. 와병중인 그에게 2개월 동안 쉬지 않고 문안 인사를 올리니 후지스카는 손재형의 심성에 감동하여 그림을 그냥 넘겨받았다.


소전은 이 그림을 가지고 정부를 설득하여 한국미술대전에 서예부문도 들어가게 되었다.  붓글씨의 원조인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유독 서예(書藝)라고 하며 예술성을 평가를 하고 있어 다른 나라와 많이 다르다.

그 뒤 세한도는 위창 오세창, 위당 정인보, 부통령 성재 이시형 등이 배관기를 기록하였으며 그 후 손재형이 국회위원 출마하면서 이 그림을 전당포에 잡혀 개인 소유가 된 것을 국립박물관에서 구입하여 국보 제 180호로 소장하게 되었다.


한 겨울에 하얀 눈에 소복이 덮인 소나무는 따뜻하고 정겨운 감을 주지만, 세한도의 소나무는 차갑고 외롭고 쓸쓸하고 그기에 더욱 울분을 느끼는 추사의 마음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럽다. 잘못한 자를 고발한 사람, 시체 말로 내부고발자에게 상을 주고  죄지은 자를 처벌하는 그런 단순하면서도 평범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왜 그렇게 어려운지 모를 일이다.


산산산 나무나무나무 2018.1. vol.403: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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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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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沙月 | 작성시간 18.01.06 세한도의 배경에 대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芝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1.07 잘못된 오자를 정정하였습니다. 백자는 측백으로 하거나 잣나무로 하거나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으나 시를 쓴 환경에 따라 다르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한도 하면 이미 소나무와 잣나무로 알려져 있고 그림의 모양도 잣나무 모양이지요. 松茂柏悅도 측백나무보다 잣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생태적의미로도 더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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