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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의 꿈

6월, 가슴 떨리는 사람(4)

작성자gionex(12윤선호)|작성시간17.06.24|조회수59 목록 댓글 6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아래를 보니 집 앞으로 어떤 아저씨와 아줌마가 서로 소리를 지르며 지나갔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집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모두 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다른 표정으로 다가왔다가 또 멀어져갔다.

저 사람들은 저 표정 속에 무슨 사연을 담고 있는 것일까.

슬픔과 분노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고 기쁨과 행복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사연을 내 멋대로 짐작해봤다.

저 사람은 결혼 안 한 청년 같은데 왜 저렇게 싱글벙글일까.

아마 오늘이 연인의 생일이나 뭐 그런 날은 아닐까,

그래서 연인을 기쁘게 해줄 어떤 선물을 준비하느라 저렇게 기분이 좋은 건 아닐까.

근데 저기 저 사람은 옷차림도 이상한데다 왜 저렇게 표정이 어두울까.

혹시 집안에 누군가가 크게 다쳐서 지금 병원으로 급히 가느라 정신없이 집에서 나온 건 아닐까.


참으로 신기한 것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만큼이나 나의 상상도 다양했다는 것이다.

나의 상상은 끝이 없이 이어졌다.

사람을 구경한다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었다.

나는 아예 음악도 끄고 책도 덮어 옆으로 치워버린 채

옥상 난간에 턱을 괴고 앉아 본격적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림자의 방향이 처음 옥상에 올라왔을 때와는 거의 반대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배도 많이 고팠다. 나는 주섬주섬 책과 카세트라디오를 챙겨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니, 영빈이 너 집에 있었던 거야?”

아주머니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네, 옥상에서 책 보고 있었어요.”

“그럼 아침부터 여태까지? 어머나 세상에, 지금 시간이 몇 신데 배고프지도 않았니? 점심시간 지난 지도 한참인데.......”


아주머니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씀하시고는 급히 내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식탁에 앉아 시계를 보았다.

3시 40분.

맙소사, 거의 여섯 시간을 사람 구경하느라 써버린 것이었다.

나 스스로 생각해보아도 황당한 일이었지만

진희에게 해줄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진희 씨.

6월의 마지막 일요일 밤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교회 모임은 잘 마치셨는지요?

저는 오늘 하루도 참으로 평안하고 행복하게 잘 보냈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옥상에 올라가 음악을 들으며 공부를 했습니다.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 산들거리는 바람이 어디 남국에라도 와 있는 것처럼 마음을 여유롭고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루 종일 햇빛 아래에 있었지만 덥다거나 지치지도 않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늘 들은 음악 중에 윤형주와 박인희가 부른 ‘사랑의 찬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제 내린 비’라는 영화에 들어있는 노래인데, 가사가 좋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습니다.

윤형주는 송창식, 이장희, 김세환, 김정호 등과 함께 그가 부른 노래의 거의 전곡을 녹음해서 들을 정도로 제가 좋아하는 가수입니다. 그리고 박인희는 여자 가수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목소리를 가진 가수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꼭 그들의 노래를 녹음해서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보석같은 노래가 있는데, 도나 서머의 ‘MacArthur Park’라는 노래입니다.

도나 서머가 요즈음 ‘Hot Stuff’라는 노래로 빌보드 차트 1위를 하기도 했고 또 디스코의 여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도나 서머 최고의 노래는 이 ‘MacArthur Park’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노래는 작년 말에 나온 것인데, 빌보드 차트에서 1위도 했던 곡입니다.

저는 이 노래를 빌보드 차트에서 보고 도나 서머의 노래란 것 때문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는데

우연히 AFKN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 바로 반해서 녹음을 해왔습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미국 LA의 맥아더 공원의 벤치에 제가 앉아,

공원에 어둠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꼭 한 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봅니다.

제가 이 노래의 가사를 구하게 되면 녹음한 테이프와 함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들어보시면 정말 좋은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되실 겁니다.


사실은 옥상에 오래 있기는 했지만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지는 못했습니다.

공부를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에 집 앞의 길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 시작했는데,

무려 6시간 가까이 사람 구경만 하다가 내려왔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표정을 보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는 일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제가 길에서 타인들과 같은 눈높이에 있을 때에는 함부로 남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볼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보면 틀림없이 시비가 붙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옥상에서 내려다보니 그들과 시선이 마주칠 일이 없어 마음 놓고 편하게 그들의 표정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사람들의 표정이 그렇게 다양한 줄을 처음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한 표정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세계 40억의 인구가 다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겠지요.

참 궁금합니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들의 꿈은 무엇인지, 또 그들은 무슨 일을 하면서 사는지.......

그 40억 중의 하나인 저는 또 무슨 생각을 하며, 무슨 꿈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일까요.

진희 씨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무슨 꿈을 꾸면서 살고 있을까요?

진희 씨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참, 사람들의 기쁜 표정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혼자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는 사람,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속으로만 기쁨을 되새김질하는 사람,

연신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이 중얼거리는 사람,

껑충껑충 뛰면서 춤추듯이 걷는 사람...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저는 그들의 기쁨의 원천이 무엇일지 상상도 해보고 그들의 기쁨을 같이 느껴보려고 해보았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참 신기하게도 행복한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제가 행복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희 씨.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습니다.

창문을 경계로 저의 작은 공간이 어둠에서 분리되어 파리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창문에는 책상에 앉은 제 모습이 비쳐 보입니다.

창문 모서리에 작은 날벌레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날갯짓을 하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낮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낮에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립니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런 밤이면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참, 말씀드렸던가요?

저는 진희 씨 학교의 여학생들과 함께 하는 ‘돝섬’이라는 문학 서클에 가입해 있습니다.

시를 쓰고 싶어 가입했지만 아직까지 제대로 된 시를 한 편도 써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이제는 3학년이라 마음의 부담 때문에 더 시를 쓸 수가 없어졌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한 편이라도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만약 진희 씨가 기다려만 준다면, 언젠가는 꼭 제가 쓴 시를 직접 진희 씨 앞에서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오늘은 이만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주절주절 제 넋두리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오늘 밤도 잘 주무시고, 행복한 꿈 여행하시기를 빌겠습니다.


1979년 6월 24일 늦은 밤

박영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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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마리사(7회 왕혜경) | 작성시간 17.06.27 열심히 읽고 있어요. 열심히 써 주세요.
  • 작성자gionex(12윤선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06.27 넵!
    감사합니다.
    박영빈군에게 계속 관심 가져주십시오.
    열심히 쓰겠습니다.
  • 작성자최기석 | 작성시간 17.06.27 선호님,
    그 시절을 회상하게 하는 순수한 발자국 들입니다.
    저도 '그 시절, 그 아이들' 이라는 수필을 써본 적이 있지요.
    돝섬이라는 인연을 새삼 떠 올립니다.
    엊그제 산방에서 돝섬사람 몇 명과 차 한잔 했습니다.
    선호씨 처럼 지난 옛 이야기도 좀 하고요.
    글 잘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다(13변해숙) | 작성시간 17.06.29 회장님~ 달재산방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 산방에서 선배님의 '그 시절, 그 아이들'의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 작성자바다(13변해숙) | 작성시간 17.06.29 박영빈,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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