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벚꽃과 함께 시작되었다.
학교 담을 빙 둘러가며 서 있는 벚나무들이 어느샌가 연보랏빛이기도 하고 연분홍빛이기도 한 꽃망울을 터뜨렸다.
우리 학교 벚꽃은 인근에서 아주 유명했다.
서울 사람들은 벚꽃을 보러 진해에 가지만 진해 사람들은 우리 학교에 와서 벚꽃놀이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실제로 휴일이면 가족 단위로 소풍을 와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야, 부럽다. 우리는 언제 장가가서 자식들 데리고 저렇게 소풍 와보냐?”
공부에, 성적에 시달리며 일 일이 여삼추 같은 우리에게 그런 날은 결코 오지 않을 멀고도 먼 남의 나라 이야기 같았다.
우리는 잠시 그 단란한 가족들을 흘깃거린 후 다시 책에 머리를 박고 공부라는 놈과 겨루어야만 했다.
우리 학교는 휴일에도 교실을 개방해서 학생들이 와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집에서는 공부가 잘 안 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리였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피곤하고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위해 학교로 갔다.
하지만 평일과 달리 선생님도 없고 규제도 없이 친구들끼리 모여 있는데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몇몇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열심히, 주변 상황에 상관없이 공부를 했지만
또 다른 몇몇은 운동장에 나와 땀을 흘리거나 벤치에 앉아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보내기 일쑤였다.
나는 휴일에 학교에 가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에 6일을 학교에서 사는 것만 해도 지긋지긋한데, 그 남은 하루마저 학교에서 보내다니.
게다가 나는 집에 있어도 누구 하나 공부를 방해하거나 내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3월에는 휴일날 한 번도 학교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정호가 휴일에도 학교엘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학교에 가는 날은 나름대로 공부와 휴식의 시간을 정해놓고 지키려고 애썼다.
벚꽃이 피는 4월 초에는 휴식 시간이면 교실을 빠져나와 벚나무 아래 벤치에 팔베개를 해서 눕곤 했다.
바람이 이리저리 몰려다닐 때마다 작은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꽃잎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심호흡을 하면 청량한 4월의 공기가 폐 속 깊숙이 들어왔다 나갔다.
이렇게 좋은 날에, 이렇게 좋은 날에 그 님이 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3)
하지만 나에게는 좋은 날도 아니었고 기다리는 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신경성 위염을 앓고 있었고 공부는 그저 건성으로만 하고 있었다.
시험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분노와 슬픔, 그리고 자괴감 때문에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지만
공부를 하려고 앉으면 답답하기만 할뿐,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공부를 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시간들을 음악이나 공부와 상관없는 책들에 빠져 살았다.
벤치에 누워 있는 내 얼굴 위로 벚꽃 잎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입으로 ‘후-’ 불어 꽃잎을 날려버렸다.
그 순간, 갑자기 시를 쓰고 싶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교실로 뛰어 들어갔다.
아무 공책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꺼내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두서없이 써내려갔다.
나는 당시 ‘돝섬’이라는 문학 서클의 회원이었다.
우리 학교와 이웃 여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그 서클은
매월 만나 자작시를 발표하고 그것들을 모아 문집을 만드는 등 제법 활발하게 활동했었다.
게다가 매년 연말에는 선후배들이 모두 모여 ‘문학의 밤’을 개최했었다.
하지만 그 활동도 대부분 2학년까지이고 3학년들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거의 활동을 하지 않았다.
나도 3학년이 되면서 매월 만나서 시를 발표하는 활동은 중단했지만 습작까지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내 시에는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선배들에게 항상 혼이 나곤 했지만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글을 쓸 때는 다른 아무 걱정거리도 생각나지 않았고 글 속에 빠져 마냥 즐겁고 행복하기만 했다.
특히 늦은 밤 집에서 홀로 깨어 헤드폰을 머리에 쓰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쓸 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그럴 때면 나는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웠다.
어두운 밤하늘로 퍼져나가다 사라져버리는 담배 연기 또한 잠시나마 나를 이 고단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뭔가 벚꽃에 대한 근사한 시가 나올 것 같아 시작을 했는데
몇날 며칠을 끙끙거리며 썼다 고치기를 반복해도 써놓고 나면 어딘가 부족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시를 완성해가는 시간은 공부를 할 때보다 훨씬 즐거웠다.
공부를 할 때는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내가 뭔가를 만들고 이루어간다는 느낌이
내 몸의 모든 세포를 살아있게 만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뭔가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완성시키지 못한 시를 서랍 속에 그대로 처박아 넣어버렸다.
***
같은 반이 된 지 한 달여가 지나니 제법 끼리끼리 죽이 맞는 친구들이 있어 늘 같이 어울려 지내게 되었다.
내가 정호와 친하고 정호가 남수와 친하고 남수는 호진이와 친했었는데 서로 자주 보다 보니 모두들 같이 친해진 것이었다.
남수와 호진이는 모두 마산 출신으로 하숙하는 정호를 무척 부러워했다.
남수는 정호와 1, 2학년 때 같은 반을 했었고, 덩치와 키는 우리보다 작았지만
자칭 ‘깡다구’ 하나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남수의 새까만 얼굴과 찢어진 눈매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호진이는 우리들 중에서 키가 제일 컸는데 남수와 같은 중학교 출신이었다.
정호와 나는 처음 그 둘을 보며 ‘꺼꾸리와 장다리’라고 놀렸는데
발끈하는 남수에 반해 호진이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같이 재밌어했다.
우리는 점심을 같이 먹고 저녁도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같이 먹고 정호네 하숙방에서 담배도 같이 피웠다.
휴일에도 모두 학교에 나와서 같이 공부하고 같이 놀았다.
우리 학교는 교문 옆으로 약 100미터 이상의 기다란 담장이 있었는데
축대 위에 쌓은 담장이라 학교 안에서의 높이는 우리 어깨 정도였지만 밖에서 보면 3미터 이상으로 아주 높았다.
그 담장 아래로는 왕복 2차선 정도의 길이 있었고 그 건너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우리는 그 담장에 기대어 밖으로 지나다니는 여학생들을 향해 휘파람을 불거나 함성을 지르곤 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들이 와서 우리를 혼내며 이렇게 말했다.
“야, 이놈들아. 너희들 상대는 저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아니라 저 길 건너에 있는 국민학교 학생들이야.
어디서 형수님들께 못된 짓을 하고 그래?”
우리는 선생님께 혼이 나면서도 낄낄거리곤 했다.
(3)꽃밭에서 - 정훈희(1979)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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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gionex(12윤선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4.01 어느덧 4월이 되었습니다.
오늘 뉴스에서 진해에 만개한 벚꽃을 보여주더군요.
우리 학교 벚꽃도 그에 못지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들, 후배님들, 벚꽃과 함께 멋진 4월 시작하십시오.^^ -
작성자바다(13변해숙) 작성시간 17.04.02 드뎌 돝섬이야기가 ...
정말 4월이네요
며칠전 아버지 기일이었는데 10여년전 진해 천자봉 공원묘지 가는길이 말그대로 꽃길이었습니다
이맘때면 그때 그벚꽃길이 눈에 선하네요 눈물에 아른거리던 그 벚꽃잎들요... -
작성자마리사(7회 왕혜경) 작성시간 17.04.03 벌써 4월, 벌써 2일.
올해가 윤동주 탄생 100주년.
어제 밀양 연극촌에서 <동주-점점 사라지는 사나이> 연극을 보고 왔습니다.
윤동주의 시에 곡을 붙여 작곡가가 직접 반주를 하고
대본은 이윤택씨 딸이 썼다고 하더군요.
윤동주가 생체실험을 당했다는 사실은 몰랐는데
링거로 몸속에 바닷물을 주입하는 실험을 당하던 중 사망했다는..,
피 대신 바닷물을 피로 대체할 수 있나를 실험했다니.
미친 일본놈들. 미쳐도 이만 저만 미친게 아닌.
곡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영화 <동주>를 인상적으로 봤던 터라
윤동주를 다양하게 조명하는 작업 만큼은 의미있다 싶었습니다.
본격적으로 돝섬이 등장하는 이야기, 궁금증과 기대감 상승... -
작성자고명심(6회 조제순) 작성시간 17.04.06 어제, 오늘은 비님이 내려 천지가 꽃비로 가득했네요.
벌써 져버린 게 반, 지지 않은 게 반, 하지만 아직도 나는 그 꽃진 자리를 밟지 못하고 서성인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