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등사(三燈寺)가는 길 / 김별
물 맑고 객도 없는 천등산 깊은 골짜기
화전도 못 일구는 하늘 아래 피난 곳
송이 따고 두릅 따고 고사리 꺾어
질화로 토장국에 옥수수밥을 먹으며
세상의 법도 나라님 말씀도 상관없이
반은 신선을 닮고 반은 산을 닮은
산수유꽃 토종꿀 같은 사람들 살았네
골이 깊을수록 해는 일찍 떨어져
동솟재 메밀밭보다 댓 뼘쯤은 큰 하늘밭에 별이 총총 박히고
산초씨보다 까만 밤은 한잠을 자고 나도 그대로인데
콩기름 접싯불 밑에
산 같은 남정네와 박꽃 같은 아낙이
칡넝쿨 같이 엉켜 한 세월 잊고 사는 토막집에도
꼭 하나 근심이 있어
상투머리 흰 터럭이 성성하도록 자식을 보지 못한
말 못 할 금실이었네
굴뚝새 우는 간장빛보다 진한 밤
문풍지에 어리는 달빛은 부러울 게 없는데
산짐승도 깨어나는 첫새벽까지 헛기침으로 지새우는 밤은 늘어
박우물의 감로수를 떠놓고 빈 치성에도
정성이 부족인지 정이 부족인지
해마다 개복숭아 신살구만 지천이고
기다리는 소식은 재 너머 뻐꾸기울음보다 아득히 멀어
범바우 지나 삼등사 가는 길
돌탑은 무너지고 산딸기만 붉었다 혼자 지던 윤유월
솜씨 맵시 맘씨 어느 것 하나
버릴 것도 보탤 것도 없었건만
너럭바위 같은 품으로 업어주고 안아주고 얼러주는
님 같은 서방을 바라볼 면목도 염치도 없어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한 죄인으로 살아야 했던
크나 큰 죄업의 용서를 비는 마음과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오누이처럼 살으리라는
비수처럼 독하고 햇솜보다 따듯한 품으로
한 달에 한 번 혹은 보름에 한 번 가는 한나절 길 장터에서
오갈 데 없는 비렁뱅이 여자를 데려다 손수 씻기고
며느리 맞듯 딸 보내듯 일월성신 치성으로
은비녀에 쪽 찐 머리 올려주어 씨받이로 들였는데
여인은 심성이 곱고 얼굴이 곱고 태도 고와
이태 안 가 낳은 옥동자는 다섯 살에 천자문을 뗀 신동으로
학문은 성현이요 인품은 성인군자 선비로
천지신명 칠성님 삼신할미 부처님 점지해 준 복덩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건만 그 어미 그만
몸 푼 이듬해 복사꽃 피던 날에
유정히 흐르는 계곡물에 뜬 꽃잎처럼
황천길 떠나고 말았네
으름 다래에 도토리술이 익어가고
캐지 못한 더덕이며 산삼 송이 능이 석이가 그대로인데
전쟁보다 무서운 것이 세상사일까
박달나무 같이 야문 사람들도 하나 둘 봇짐을 쌌고
환갑 다 되어 본 아이도 공부 길을 도회지로 떠나
내외도 묻힐 자리 버려두고
놋숟가락이며 옻칠그릇 이불보퉁이를 지고 이고 따라 떠난
다시는 못 올 길
남겨진 빈집은 몇 해 안 가 쑥풀이 우거지고
돌담도 하르르 하르르 무너져 내린 세월 그 너머
세상 안을 밝히는 등이 하나
세상 밖을 밝히는 등이 하나
그 속에 백 팔 번뇌로 살아가는
결 고운 마음을 밝히는 등이 또 하나
싸리꽃 흐드러진 삼등사 가는 길
약초꾼도 길을 잃고
해종일 산꿩만 울어 지쳐
이제는 잊혀 진 옛이야기 전설이 되었네
아기 울음을 우는 살쾡이가 새끼 치고
반딧불 잡고 놀던 꿈같은 이야기가 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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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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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김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3.20 석포님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는 것 같습니다. 반갑습니다.
비가 조금 내리는 날의 아침이네요. 행복하세요 -
답댓글 작성자석포 작성시간 14.03.20 님 저는 님의글에 몇번 리플을
단 기억이 납니다.
편안한밤 되세요.. -
답댓글 작성자김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3.21
^^* 네 고맙습니다.
말이 헛나왔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촌녀 작성시간 14.04.15 우리네 어머니 아니
우리네 삶이었던 시절
씨받이 여인을 두었지요
귀한글 잘 보았읍니다
언제나 존경합니다^_* -
답댓글 작성자김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04.15 촌녀님은 그 시절을 이해하시네요.
그런 삶을 지나 오늘에 이른 거지요.
씨받이로 살았던 여인, 그렇게밖에 살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요즘도 현대판 씨받이는 있다고 하지요.^^*
언제나 존경한다는 말씀에 부끄럽습니다.^^* 저도 님의 시 좋아합니다.
아주 깊은 심성을 가지셨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