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와 양무제의 대화
달마와 양무제의 유명한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달마는 남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불교에 귀의했다. 달마대사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로 들어가 처음으로 무제(武帝)를 만난다. 양무제가 달마에게 묻는다.
“짐이 즉위 한 뒤로 수많은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스님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달마 대사가 대답한다.
“조금도 공덕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분별심을 가진 세속의 복이며, 쓰면 없어지는 공덕일 뿐입니다.”
“불법의 첫째가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몇 마디 주고받다가 무제가 물었다.
“나와 이야기하는 당신은 무엇입니까?”
“모르겠습니다.”
양무제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자 달마는 아직 불법을 펼칠 때가 아님을 알고, 하남성 숭산 소림사로 들어가 9년 동안 면벽 수도한 끝에 깨침을 얻어 혜가를 만나 법을 전했다는 일화가 있다.
성철 스님은 8년 장좌불와 면벽 수행을 통해 큰 스님의 이름을 떨쳤다. 9년 동안 면벽 수도한 끝에 깨침을 얻어 혜가를 만나 법을 전했다는 달마의 후예들은 오늘도 다투어 면벽 수행을 통해 큰 깨우침을 얻으려 한다.
오늘날 면벽수행의 전통이 과연 달마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까? 혹시 무슨 오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양나라 무제와의 만남에서 달마는 이미 하나의 세계를 뛰어 넘고 있다. 양무제는 달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숭산의 골짜기에 들어가기 전에 달마는 이미 벽을 만난 것이다. 넘을 수 없는 벽, 마음의 벽, 곧 양무제였다. 달마는 그의 깨달음을 전할 방법이 없었고, 양무제는 자신의 불심과 공덕만을 주장하고 있다. 사방이 막혀 있는 벽을 만난 것이다. 그것은 이미 면벽아래 놓인 셈이다. 따라서 9년의 면벽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는 건 엉터리 해석이고 주장이다. 도리어 9년간 도처에 양무제와 같은 사람들만 있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9년만에야 법을 전수할 수 있는 사람, 비로소 벽이 허물어지고 소통이 가능한 혜가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도리어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진의이다.
깨달음은 면벽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 찾아오면 그 깨달음을 갖고 소통할 수 없고, 비록 무수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더라도 전해지지 않는다. 상대의 견고한 세계관은 벽일 수밖에 없으니 면벽에 들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준다. 사방을 둘러보지만 제대로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일러준다. 하여 인생은 그 때부터 어쩔 수 없는 면벽에 처하게 된다. 끊임없이 벽을 만날 수밖에 없더라도, 마침내 혜가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이야기이다. 9년 만에 겨우 한 사람을 만난다는 달마의 이야기. 그 만남을 통해 선의 불꽃은 활활 타오른다.
너도 나도 경전을 들어 말하고 경전을 해석한다.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수행하지 않더라도 인생은 여기까지 왔다.
어떤 이에겐 분명히 알 수 없는 절망감으로 무엇엔가 이끌려 종교에 귀의하기도 하고, 신앙생활이라는 걸 하게 된다. 무슨 수행을 해서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지 않았더라도 시시 때때로 찾아오는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몸짓을 하게 되더란 이야기다. 각종 종교를 순례하기도 하고, 금식을 하기도 하고, 면벽 수행을 해보기도 하고 ...
그러던 중, 어떤 빛이 찾아온다.
그걸 깨달음이라 해도 좋고, 구원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견성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무슨 이름을 달고 있더라도, 인생의 길을 새롭게 보게 되는 계기가 찾아온다.
수행과 용맹정진을 통해서는 도무지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주어진다.
큰 의문이 풀리고, 환한 빛이 찾아오는 것이다.
수많은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을 쓰고, 스님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라고 묻는 양무제의 이야기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도 알게 된다. 그것이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것을 이유를 들어 설명하지 않더라도 알게 되는 것이다. 달마와 양무제의 대화에서 보듯 서로 건널 수 없는 세계의 강과 벽이 면벽수행이다.
면벽수행은 그것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수행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도 따라서 적절치 않다. 도리어 면벽에 처하게 될 뿐이다. 도처에 이미 벽이 있는데, 새삼 사방을 벽으로 막아놓고 면벽수행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이야기란 말인가? 면벽 수행에 대한 화려한 수사는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사방을 벽으로 막아놓고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을 직시하여 청정 구경각에 이르고자 한다는 것이다.
효험이 있을 것이다. 효험이란, 9년 면벽 수행이, 혹은 그 어떤 면벽수행도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는 게 면벽 수행의 유일한 효험이다. 기독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40일 금식기도의 효험 역시, 그것 해봐야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는 게 40일 금식기도의 유일한 효험이다. 그 밖의 것들은, 혹세무민하는 것에나 쓰이는 천하를 꾀고 미혹하는 것들만 낳는다. 하여 도마호음에서는 금식기도와 자선을 일컬어 거짓말하는 것이며, 해로운 것이라고 일갈한다.
모든 명상이 이와 유사하다. 절제와 가지런함의 모양새는 잠시 갖춰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는 새로운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다.
인생은 의문이다. 의문이 찾아오고, 그 의문에 충실한 것만이 도리어 참 명상이다. 의문을 의문하지 않으면 답도 없다. 적당히 찾아오는 답은 답이 아니다. 양무제의 답, 그래서 불사를 하고, 탑을 쌓고, 경전을 편찬해 보급하고, 스님을 돕는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답으로 여기는 것, 그것은 정답이 아니다. 근기가 약한 이들은 그 같은 종류를 모범답안으로 삼고자 한다.
많은 사람들이 면벽수행자를 큰 스승으로 삼고, 거기에 기대어 자신의 질문을 덮어두려 한다. 다시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공덕이란 말이지? 하고 말이다. 잠시 묻어둘 수 있지만, 물음을 끝까지 묻는 것, 그 누구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묻고 또 묻는 것만이 명상이고 답을 얻는 지름길이다. 선사들의 공안을 통한 화두도 좋고, 무엇이어도 상관없다. 다만, 자기 자신에게 찾아오는 질문이어야 한다. 질문하기 위한 질문은 별 의미가 없다. 자신에게 찾아드는 의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을 다른 이를 통해서 얻는 것은 힌트일 뿐, 자신의 참된 답이 아니다.
하나의 의문이 풀리면 또 다시 새로운 물음이 찾아오게 마련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다. 물음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대로 두면 된다. 좀 더 지내고 있노라면 물음은 또 찾아오게 되어 있다. 찾아온 물음을 무시하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묻는 사람이라면 그러하다.
달마의 면벽 일화가 불교에 끼친 망상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물론, 그 참뜻을 곡해한데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지만 지금도 도처에서 그 같은 곡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전히 달마는 벽속에 갇혀서 지금도 면벽 중에 있는 셈이다. 이제는 벽을 거두어 내야하는 일이 있을 따름이다.
면벽수행을 하지 않아도
아, 나는 이미 숨 막히는 벽속에 갇혀 있구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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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드름 작성시간 10.04.27 정말 제대로 건너 온 자라면 자연스레 그리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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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좋은 땅 작성시간 10.04.27 정말 제대로 건너 온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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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싱그러운 작성시간 10.04.27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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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휘오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04.26 아직도 갈길은 멀기만 합니다. 말과 언어, 개념에만 잡히지 않는다면, 좀더 넓혀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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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초가집1 작성시간 10.04.27 강을 건너간자들은 새방언이 주어져 서로 소통과 공명이 있지만 저쪽 방언을 하는자라도 헤가 같은자(들을 귀을 가진자)를 만난다면 면벽은 자연적으로 제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