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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표성

희문이

작성자강표성|작성시간15.01.29|조회수30 목록 댓글 8

희문이

 

강표성

 

 

  "괜찮혀. 일루 와 먹어."

  방축 아재가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겸상을 하자는데 그는 먼산바라기다. 집에 오자마자 마당을 쓸기 시작하더니 툇마루에 앉아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의 집에 와서 아침 끼니를 해결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소싯적에는 얼마나 호강하며 컸는데, 쯧쯧."

 

  방축아재는 그를 볼 때마다 짠한 눈빛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업어서 키웠는지라 속이 상하는 모양이었다. 비가 오면 비에 젖을까봐 눈이 오면 미끄러질까봐 학교 앞까지 마중 나가던 도련님이었는데 지금은 지붕 위의 들풀 같으니 어찌 안 그러겠는가

 

  그의 이름은 희문이. 근동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었다. 희멀건한 얼굴로 들판을 쏘다니는 사람,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며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사람, 그래도 입성은 깨끗했다. 누가 뒤를 봐주는지 머리카락도 짧고 옷차림도 단정했다.

 

  동네에는 또 하나 떠돌이 사내가 있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인데 허름한 잠뱅이는 허리춤에서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드러내고, 행색은 꾀죄죄하여 진창에 빠진 신발 같았다. 본래 이름이 양 머시기였던 그는 먹을 것만 준다 하면 사추리고 뭐고 상관없이 내보이던 진짜 반푼이였다. 동네 개구쟁이들은 그런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봄날 짚벼늘 아래서 낮잠이라도 즐길라치면 악동들이 몰려들어 이상한 주문을 해댔다. 어른들이 혼쭐을 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희문이를 만났다. 그날도 그는 신작로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언제나 하는 대로 혼자 웃고 혼자 글을 쓰고.

 

   "내 이름 한문으로 쓸 수 있어?"

 

  다짜고짜 던진 반말투에 내 이름을 한자로 썼다. 방축아재 말마따나 그의 작대기 필법이 예사롭지 않았다. 영어도 가능하냐는 내 주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어 글자가 신작로에 누워 있었다. 아이들이 자기 이름을 공깃돌 던지듯 그 앞으로 던지면 멋모르는 영어 이름들이 줄줄이 누워 있었다. 영순, 금자, 성숙이도 땅바닥에 누운 영어 이름들을 보고 신기해했다. 거침없는 그의 실력에 나도 놀랐다. 영어를 쓸 수 있는 이는 아버지 말고는 근동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내친 김에 그의 집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동네로부터 떨어진 곳에 정씨 문중의 제각이 있는데 그는 거기서 살았다. 커다란 제각의 쪽방은 회색 벽지로 가득했다. 벽마다 겹겹이 도배해놓은 글들과 살다니, 그것도 한자투성이라니, 정말 돌아버린 모양이었다

 

  예전에 희문이네집 작은 머슴이었다던 방축 아재의 말이 떠올랐다. 희문이는 한 때 인근에서 촉망받는 수재였다고 한다. 인물 좋지 집안 좋지 나무랄 데 없는 청년은 서울 유학생이 되어 고시공부에 매달렸다. 몇번의 도전이 이어졌고,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이상한 사람이 되어 낙향하게 된다. 정신줄을 놓아버린 아들 때문에 부모님은 울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잘난 형제들도 미친 형이 부끄러워 대처로 도망치듯 떠나고 말았다는데. 그 놈의 공부가 뭐라고, 사람 팔자 모른다고, 한숨짓던 방축아재였다.

 

  그의 방을 본 후, 희문이가 다시 보였다. 어쩌다  마주쳐도 호들갑을 떨며 도망치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져서 먹다 남은 튀밥이나 오이 등을 건네주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스치는 것처럼, 벼락 맞은 홰나무를 지나가는 것처럼 그냥 지나쳤다. 그는 그대로 웅얼웅얼 거리거나, 나는 나대로 해찰을 하며 길을 가곤 했다.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고향길을 생각하면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많은 동창들의 얼굴은 까마득한데도 희문의 창백한 낯빛이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 뛰어난 수재에서 정신줄을 놓아버린 이로 전락한 슬픈 전설 때문일까, 출구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 탓일까, 아니면  그를 세상사에 초연한 자유인으로 본 것일까.

 

  지금도 그가 고향길을 걷고 있을 것만 같다. 휘적휘적, 출렁이는 벼들 사이로 때로는 붉은 노을 속으로 걸어가지 싶다.  삶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그만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미친 듯 살아가는 세상에서 길 밖의 길을 걸어가며 또 다른 자유인이 된 듯 혼자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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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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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강표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1.29 지금쯤 먼 길로 떠났을텐데 그가 고향길에 있을 것 같아요. 조금 비틀리고 구부러진 사람들도 품어주던 고향에 대한 믿음 때문인가봐요^^*
  • 작성자육상구 | 작성시간 15.01.30 세밀한 묘사를 통해서 희문이가 눈앞에 얼신 거리고 있네요. 희문이는 강선생님을 통해서 영원히 살고 있네요. 희문이를 통해서 맨 정신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게 해주신 강선생님께 감사^^
  • 답댓글 작성자강표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1.30 그는 나름대로 격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그를 희문아, 하지 않고 희문이 하고 불러줄 만큼요.
    그를 볼 때마다 수재가 아니라서 다행이라 여겼어요^^*
  • 작성자생각의숲 | 작성시간 15.11.20 '출구를 잃어비린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을 오래도록 가슴에 여미고 계신 강작가님의 감성이 아름답습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자유인' 희문이 대한 애잔함이 오래 남아 있을 듯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강표성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12.03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의 얼굴은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선합니다. 긴 연민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선생님 시는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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