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추와 김유신의 동행(1부) / 김성문
신라의 태종무열대왕 김춘추와 흥무대왕 김유신. 그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군신君臣을 넘어 혈연과 정, 그리고 역사의 굴곡 속에서 깊이 얽혀 있다. 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삼국통일은 두 사람 중 어느 한 사람만으로는 불가능했음을 깨닫게 된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자 진평왕의 외손이다. 그의 첫 부인은 보라궁주로, 딸 고타소를 낳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그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와 혼인하여 문명왕후로 삼고, 7남 1녀를 두었다. 김법민, 김인문을 비롯해 장차 왕이 될 자손들을 낳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김춘추의 딸 김지소가 외삼촌인 김유신에게 시집갔다는 점이다. 이로써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일 뿐 아니라 혈연으로도 굳게 얽혔다. 김유신의 첫째 여동생 보희 또한 김춘추의 후궁이 되어 두 아들을 두었다. 김지원과 김개지문이다. 이처럼 두 가문은 혼인을 통해 정치와 군사를 하나의 혈연으로 묶었고, 그 결속은 신라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왕실과 장군 가문이 이해관계가 아닌 가족으로 이어졌을 때, 그 동맹은 흔들리지 않는 힘을 얻는다.
김춘추는 젊은 시절 풍월주를 희망했지만, 보종과 염장에게 부제 자리를 양보하고 뒤늦게 풍월주가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라를 걱정했으며 넓은 시야와 신중한 판단으로 정세를 꿰뚫었다.
백제가 대야성을 침공했을 때, 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이 대야성에서 함께 목숨을 잃었다. 김춘추는 그 충격으로 기둥에 몸을 기댄 채 하루 종일 말도, 눈동자도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시대를 막론하고 깊은 고통으로 남는다.
그 일로 김춘추는 고구려를 찾아가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보장왕은 그것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를 위협했다. 결국 그는 감금되었으며 그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김유신에게 군사 만 명을 이끌고 구출을 명했다. 김유신이 고구려 남쪽 경계를 넘어 들자, 보장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그 사건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든 전환점이 되었다.
김유신은 그 후 압량주 군주로 임명되어 군사력을 키워, 648년 백제에 빼앗긴 대야성을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백제군 어느 장수에게 제안한다.
“죽은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돌려준다면, 우리에게 잡힌 부장수副將帥 8명의 목숨을 살려주겠다.”
의자왕은 그것을 받아들였고, 김유신은 그 약속대로 8명의 생명을 살려 보내면서 말했다.
“잎 한 장 떨어진들 수풀이 그윽함을 잃겠는가. 티끌 하나 보탠들 태산이 더해지겠는가.”
김유신의 이 말은 그의 기개와 인품을 오롯이 드러낸다.
<2부에서 계속>
고구려에 감금되었던 김춘추가 풀려난 뒤, 김유신과 다시 만나는 장면(AI 제작)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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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만취 작성시간 26.06.22 태종무열대왕과 흥무대왕믜 동행 잘읽었습니다. 태종무열대왕의 셋째 아드님이신 문왕의 후손으로 신라 36대 선덕왕때 시중과 병부령을 지내고 왕이 후사없이 붕어하자 화백회의에세 차기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장마로 인해 왕위에 오르지 못한 명주군왕 김주원공이 우리 강릉김문의 시조로 소생이 40대 손입니다.
한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오늘 새로은 지식을 많이 인지하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성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4 new
우리의 역사에 관심 가지신 분을 존경합니다. 태종무열대왕과 문명왕후(문희) 사이에 왕자 7명과 공주 1명이 있다고 전합니다. 공주 1명이 '지소'로 김유신 장군과 혼인했습니다. 강릉김씨의 김주원 시조께서는 장마가 미래를 바꾼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