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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빨랫줄과 바지랑대)

작성자덕혜-김민주|작성시간13.01.02|조회수145 목록 댓글 3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빨랫줄과 바지랑대
이두래
기사입력 : 2013-01-02    페이스북   트위터   미투데이



따사로운 봄볕이 청마루에 성큼 다가들 때쯤, 빨래를 끝낸 어머니는 청마루에 걸터앉아 나를 불렀다. 머리를 감고 옷도 말끔하게 갈아입은 나를 무릎에 뉘고 귀를 후벼주셨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개 삼고 누운 내 동공으로 물기 걷혀가는 빨래들이 꽉 차게 들어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빨랫줄이 길게 걸쳐져 있었다. 할머니의 흰 고의적삼, 아버지의 푸르죽죽한 바지, 어머니의 얼룩덜룩 일 바지, 우리들의 푸르뎅뎅한 옷들과 발꿈치를 기운 양말, 그리고 가슴이 볼록해진 언니들의 속옷을 감춘 옷들 위에 봄볕이 걸렸다. 봄볕은 색고운 꽃들을 피워내고서도 우리 집 빨랫줄에 걸린 옷들의 때깔만은 어쩌지 못하는지 그저 그런 색 바랜 옷들뿐이었다.

옆으로 드러누운 놈, 철봉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놈, 무릎이 꺾여 널린 아버지의 바지, 허수아비처럼 헤벌쭉 걸린 놈, 마악 철봉이라도 넘을 듯 짧게 걸린 동생들의 바지 등 하여튼 제 깜냥대로 빨랫줄이 축 늘어지게 걸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마당가 나뭇가리 위에 세상은 나 몰라라 번듯이 드러누운 빨래도 있었다.

우리 집 빨랫줄은 다른 집들보다 길었다. 식구가 많은 탓도 있었을 게다. 여름엔 마른빨래와 젖은 빨래가 시나브로 걷히고 내걸렸으며 겨울이면 옷들마다 고드름을 매단 채 굽힐 줄 모르는 뻣뻣한 자존심처럼 며칠이고 걸려 있었다. 비오는 날을 빼고는 빈 빨랫줄을 보는 날이 드물었다. 비가 오면 빨랫줄에 앉아 놀던 제비들이 처마 밑 제집을 찾아들 듯 빨래들도 처마 밑에 걸린 간이 빨랫줄에 빼곡하게 피신을 했다. 하지만 마당의 빨랫줄은 바람 비 눈서리를 일 년 내내 맞으며 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빨랫줄은 아버지를 닮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빨랫줄에 걸려 나부끼는 옷들이었다. 아버지의 어깨와 팔에 매달려 그네를 뛰고 철봉을 넘고 드러누워 뒹굴며 놀았다. 옷들의 무게에 빨랫줄이 자꾸 늘어져 가면 어머니는 바지랑대를 다시 높이 곧추세우셨다. 지게 위에 얹힌 짐이 무거워올수록 다시 고의춤을 추스르고 지게 끈을 고쳐 메고 지게 작대기를 바투 거머쥐듯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안간힘에도 바지랑대는 번번이 휘청거렸다.

아버지는 고만고만한 조무래기들이 어깨와 팔에 오종종 매달려 놀 때는 흐뭇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빨랫줄에 걸린 옷들이 많아지고 바지 길이가 길어질수록 위태위태한 바지랑대는 쉬이 휘청거리고 어머니는 고임돌까지 받쳐 바지랑대의 힘을 덜어보려 애썼다. 그래도 바지랑대가 바들바들 떨리면 힘겨운 짐을 나누어 짊어지듯 어머니는 바지랑대 하나를 더 세웠다. 아버지의 어깨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처럼 안타까워 보였을까. 또 하나의 바지랑대는 어머니가 이룩하는 다릿발, 손을 맞잡고 험한 바다를 건너기 위한 다리 하나가 놓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어머니는 난생처음 나에게 새 옷을 사주셨다. 빨간 스웨터에 초록색 나팔바지였던 새 옷의 그 환상적인(?) 색상의 조화가 나를 마냥 들뜨게 했다. 영락없는 한 송이 꽃이 아닌가. 나는 언제나 그 새 옷 한 벌만 입고 다녔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옷을 갈아입었다. 어머니가 깨끗하게 빨래를 해서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마루에 걸터앉아 다리를 달랑거리며 봄바람에 나붓나붓 흔들리는 옷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새 옷이 마르면 빨리 갈아입을 요량으로. 그 이후로 어머니가 새 옷을 사주었던 기억이 내겐 없다. 언니들에게 물려 입어 언제나 색 바랜 옷들 사이에 눈부시게 환한 한 벌의 새 옷은 지금도 잊히지 않고 강렬한 색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나는 어려서 빨랫줄에 빨강, 파랑, 노랑의 새 옷들이 화려하게 내걸릴수록 아버지의 바지랑대는 더 힘들게 휘청댄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철들 무렵의 어느 날, 세찬 바람이 불고 바지랑대는 심하게 흔들렸다. 아버지는 몹시 취해 집으로 돌아와서는 핏줄 도두라진 붉은 얼굴로 온몸의 기운을 가슴에 모아 토악질을 하셨다. 무엇이 아버지의 가슴을 저리 쥐어짜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들의 지주였고 지축이었던 아버지가 ‘쿨렁쿨렁’ 토악질을 할 때는 우주의 지각변동이 시작된 듯 세상이 요동쳤다. 그 반동은 우리들을 어지럽게 흔들어댔고 천방지축이던 우리들에게 물기 걷혀가는 빨래들처럼 철이 들게 했다. 아버지의 처진 어깨, 휜 등을 바라보며 스스로 가벼워져야 함을 깨달아 갔다. 흙에 패대기쳐지지 않고 스스로 사뿐히 내려서는 날까지 아버지의 어깨는 간간이 전해지던 흔들림조차 유희에 지나지 않는 무풍지대였다.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꽃같이 빨갛고 푸른빛, 색을 잃어버린 무채색 영상들이 섞여들며 내 머리통은 봄볕 아래 졸고 있는 노란 병아리처럼 자꾸 봄 속으로 잠겨들고 있었다. 봄볕에 가랑가랑 말라가는 빨래들처럼 나는 나른한 꿈길에서 나부끼고 마당엔 빨랫줄이, 속이 텅 비어 버린 대나무 바지랑대가 십자가처럼 서 있었다.

남편이 평소보다 술을 과하게 마시고 현관을 들어서면 가슴에 한 줄기 찬바람이 싸하고 지나간다. ‘아버지의 술잔은 반이 눈물’ 이라는 말을 알고부터다. 어릴 적 아버지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남편의 대취(大醉)에 잦아드는 가슴은 그를 붙들어 세운다. 안색을 살피며 바라본 그의 어깨에도 여지없이 삶의 무게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말없는 토로(吐露), 그의 휘청거림을 바라보면서 선뜻 짐을 나누어 짊어지기에 나는 많은 주저와 입술을 깨무는 용기가 필요했다.

몇 년 전, 십오 년 전업주부를 탈출했다. 유년의 외적 허기를 채워주기에 안성맞춤인 현대인의 소비 천국이라 할 수 있는 백화점이 나의 일터가 되었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날렵하고 맵시 있는 옷들, 물감을 어떻게 버무리면 저렇게 곱디고운 색채가 나올까 싶은 옷이며 온갖 명품과 보석들이 눈만 돌리면 유혹의 눈길을 보낸다.

그뿐이랴. 여자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면 명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하고 모피코트를 떨쳐입고 연말 모임에 참석해야 격이 산다는 둥 카드 할부로 장만하라는 둥 유혹의 말들도 난무한다. 장만이란 내 집 마련이나 가전제품을 들일 때나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몸치장에 장만씩이나 해야 한다니 난 여자가 아닐까. 그 어느 것 하나도 갖지 않았다. 갖지 못한 겐가. 어느 쪽이든 내가 그들의 유혹에 초연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가진다고 행복할까 싶은 내 마음이다. 그것은 잠깐의 만족일 뿐 행복이 아님을 나는 안다.

유년의 나의 집 빨랫줄을 떠올린다. 남편의 가뿐한 모습이 좋다. 어머니가 그랬듯 난 남편 곁에 나란히 선 바지랑대가 되고 싶다. 우리의 빨랫줄에 명품이 내걸리고 비싼 옷이 나부낀다면 우리 집 경제의 축이 기우뚱할 것은 예나 지금이나 자명한 사실이다. 남편의 등이 휘지나 않았는지 가만히 쓸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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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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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정화 | 작성시간 13.01.03 이 글을 쓴 두래씨는 저와 함께 <부산남구신문> 기자로 활동합니다. 오늘 점심 때 신춘턱 낸다고 해서 곧 축하해주러 나갑니다^^
  • 작성자박동조 | 작성시간 13.01.03 축하드려요.
  • 작성자박승기 | 작성시간 13.01.03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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