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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3.01.30|조회수94 목록 댓글 4

배꼽 / 이방헌

 

 

퇴근길이라 지하철이 몹시 북적거린다. 휴대폰에 대고 끝없이 조잘대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싶은데, 한 쪽에서 또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경쾌한 은악이 아닌 괴상한 신호음이라 마치 외계에서 보내오는 소리 같다. 게다가 엄마와 통화를 하는 건지, 친구와 통화하는 건지 말투도 헷갈려 듣기에 민망하다. 괜히 허튼 자존심 지키려고 안간힘 쓰지 말고 양보해 주던 노약자석에 그냥 앉을 걸 그랬나보다.

그런데 나를 더 황당하게 만든 것은 정차했던 차가 다시 출발할 눈앞에 여인의 배꼽이 다가 온 것이다. 피할 수 없는,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반질하고 부드러운 곡선. 감정을 속이는 것도 죄악일 것이다. 눈이 더욱 빛을 발한다. 동공의 초점이 자동으로 그 곳에 맞추어졌다.

배꼽노리가 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염증이 생기기 쉽다고 배꼽 때를 씻어내지 못하게 했는데 어른 말을 잘 듣지 않는 요즘 애들이라 오히려 다행이다. 의사의 예리한 관찰력이 발동하려 하지만 그렇다고 새삼 염치 좋게 안경을 꺼내 쓸 수도 없으니 못내 서운하다고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같이 움직이는 배꼽을 보고 있으려니 배꼽춤이 떠오른다. 흐르는 듯 매끄럽고 육중하면서도 감각적으로 배를 돌리는 솜씨는 가히 마술적이었다. 인간의 영속성을 위해 다산의식(多産儀式)으로 시작된 춤이지만 이제는 구경꺼리로서의 세속적인 예로 춤으로 변해 버렸으니, 동전이나 지폐를 배 위에 던져주고 싶은 장난기를 나무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배꼽춤이 뱃살이 넉넉히 있는 여성에 알맞다면 이 여인도 배꼽춤을 배웠으면 좋겠다.

언젠가 광고 책자에서 배꼽 피어싱을 한 여인을 보고 눈살을 찌푸린 적이 있다. 배꼽에 구멍을 내려면 얼마나 아팠을까. 성형이 유행이라지만 옷과 허리 띠 속에 감추어진 배꼽, 삶의 증거요, 생명의 표시인 거룩한 배꼽에까지 돈 들여가며 칼을 들이 댈 줄이야 누가 감히 짐작이나 했을까. 그러나 이는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욕망의 산물이라 차라리 애교스럽다. 하지만 음팔레가 먹칠 해 놓은 배꼽의 명예는 어디서 되찾을꼬? 지아비를 잃은 음팔레 여왕은 얼마나 음란했던가. 자기의 궁전에서 헤라크레스와 해괴한 짓을 벌리며 애욕의 불꽃을 태웠던 배꼽이란 이름의 이 여왕. 배꼽은 지울 수 없는 과거도 안고 산다. 배꼽을 응시하던 나의 시선은 꼬불꼬불한 탯줄을 타고 상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어디서 왔을까. 나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모체와 이어졌던 근원에 대한 신비감과 호기심에 이끌려 있었던 나. 그때가 아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으리라. 고달픔도, 외로움도, 방황도 없던 시절. 세상에 나와 5분이 지나니 탯줄의 멱박은 스스로 멈추고 탯줄이 잘리는 순간, 하나의 독립된 존재가 되었다. 모체와의 절연. 미지의 세계로 떨어져 나와야 하는 운명이지만 그리도 떨어져 나오고 싶었을까.

태반처럼 부드러우나 쪼그라진 어머니의 얼굴. “애야, 집 나가면 고생. 몸고생, 마음고생이란다. 조심하거라.” 언젠가 들려주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오는 듯했다.

지하철이 몹시 흔들린다. 우주를 유영하다가 갑자기 탯줄이 끊어져 버린 꿈을 꾼 것이었을까. 살아 있는 배꼽이 가쁜 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했는데 눈앞이 허전하다. 전화를 걸던 여인들도, 배꼽 티를 입은 여인도 어디로 가버리고 없다. 내가 미아가 된 듯한 기분이다. 기계 돌아가는 덜커덩거리는 소리만 시끄럽게 들린다. 적막감. 갑자기 삶의 맛도, 멋도, 사라져버린 것 같다. 말투와 행동이 다르고, 치장도 다르지만 그들이 있었을 때 지하도의 노숙자들, 돌계단에 엎드려 두 손을 벌리고 있는 노인, 찬송가를 부르며 승객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소년과 맹인의 얼굴이 투영된다.

탯줄을 붙잡고 싶다. 어머니의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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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애선 | 작성시간 13.01.30 복잡한 인파 속에서 낯선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배꼽은 세상에서 이별을 가장 먼저 맛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1.30 맞어요,
    배꼽은 세상에 나와 가장 먼저 이별을 경험하고 만남도 가지지요.
    오늘은 눈 영양제를 안 먹었더니 눈이 너무 아프네요. ㅎㅎ
  • 작성자윤남석 | 작성시간 13.01.30 참으로 재밌는 글입니다만, "감정을 속이는 것도 죄악일" 터이고, "의사의 예리한 관찰력"을 "발동"시키는 모양새도 좀 그렇긴 합니다. 요즘 저렇게 들이대놓고 관찰하다간, 한마디로 난리(?)가 날 텐데 말입니다. ^^
  • 작성자엄옥례 | 작성시간 13.01.31 재미있는 글이면서도 울림이 있는 글이네요.
    좋은 글 나누는 맘 감사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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