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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4회 경북문화체험수필대전 금상- 문(門)에서 문(問)으로/ 이혜경

작성자박동조|작성시간13.09.17|조회수186 목록 댓글 6

문(門)에서 문(問)으로  /이혜경

 

 

 첫 인상부터 범상치 않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비쭉 솟은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마주하자 절로 주눅이 든다. 먹색 기왓장으로 갓을 만들어 쓰고 화려한 단청으로 비단 도포까지 걸친 직지사 산문 앞에 섰다. ‘동국제일가람황악산문 東國第一伽濫黃嶽山門’ 이라는 현판의 웅장한 모습에 잠시 걸음이 멈칫한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이 감히 들어가도 되는 문일까?

 문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무성한 나무들이 초록빛 파라솔로 그늘을 드리워 놓았다. 그 사이로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쓸어준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사금파리 같은 햇살 조각들이 흩날리는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다. 빌딩숲에서 지내며 무채색으로 가득 찼던 가슴이 숲길을 걷는 동안 온통 갈맷빛으로 물든다.

 그런데 다른 절에 비해 일주문까지 가는 길이 멀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속세로 돌아갈 사람은 어서 발걸음을 돌리라는 무언의 메시지 같다. 이 정도에 포기할 것이라면 애초에 산문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의 나이테가 늘어날수록 머릿속에 선명해진 것은 땀 흘리지 않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법이다. 키다리 나무들이 수런대는 초록빛 속삭임에 취해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겠다.

 만세교를 건너 일주문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선다. 완만하게 부풀어 있는 오르막을 지나 일주문이 보인다. 아까 보았던 산문과 대조적으로 요란한 장식 없이 두 다리로만 꼿꼿이 선 단정한 자태이다. 땀이 나도록 부지런히 걸어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는 곳에 일주문을 세운 것은 무슨 뜻일까?

 어렸을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때는 하루가 왜 그리 긴지 실컷 놀고 나도 등에 해가 남아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오빠가 늘 부럽기만 했는데 막상 학교에 들어가니 숨이 찼다. 뒤처지지 않게 발을 맞춰 뛰느라 온몸에 땀이 났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익숙해지긴커녕 숨이 가빠 헐떡였다. 성적순으로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 앞에서 실망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크고 작은 여러 개의 문을 지난 후에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었다. 어른의 세계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시험만 없으면 살 것 같았는데 난이도가 더 높은 시험을 날마다 치러야 했다. 갈수록 커지는 욕심과 따라주지 않는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무엇이 정답일까 고민하고 갈등했다. 의욕과 욕심의 경계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호하기만 하다. 속계(俗界)와 진계(眞界)를 구분해 주는 일주문 앞에 서니 진계로 접어들만 한 마음 준비가 됐는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일주문 앞에 눈길을 잡아끄는 늙은 감나무가 있다. 구부정하게 허리가 휜 나무는 두터운 이끼로 몸을 휘감고도 한기가 드는지 허옇게 부르튼 몸으로 떨고 있다. 직지사의 오랜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 쇠잔한 몸으로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선 모습이 깊은 울림을 준다. 쓰러져가는 고목에게도 보드라운 새순을 틔우던 파릇파릇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세월을 막을 수는 없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잎이 무성하건 적건 간에 결국 고목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을 왜 그렇게 남들보다 더 많은 잎을 만들려고 안달했을까? 미래의 시간 상자를 열어 훗날의 내 모습을 미리 본 것 같아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일주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대양문(大陽問)이 기다리고 있다. 글자 그대로라면 큰 빛으로 들어가라는 뜻이지만 여기서의 빛은 세상의 진리를 모두 담는다는 넓은 의미이다. 이 문으로 들어서는 순간 미혹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따끔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네 번째 문은 금강문이다. 벽 왼쪽에는 밀적금강이,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이 그려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다르게 벌린 둘의 입모양이다.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벌려“아”소리를 내고 밀적금강은 입을 오므려“훔”소리를 내는데 ‘아’와 ‘훔’은 범어의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라고 한다. 그래서 금강역사의 입 모양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함을 상징한다. 삭은 고무줄처럼 한순간에 툭 끊어지고 마는 나의 다짐들을 떠올리면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금강역사의 입이 특별해 보인다.

 다섯 번째 문인 천왕문은 금강문과 총총히 붙어 있다. 불법을 지키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사방에 모셔져 있어 사천왕문으로도 불린다.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사천왕의 기세에 눌려 어깨가 움츠러든다. 선악을 심판하는 동방 지국천왕의 칼 옆을 지날 때는 괜히 뜨끔하다.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불이(不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숨을 고른 후 문을 통과한다.

 드디어 만세루 앞이다. 피안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마지막 절차가 남아 있다. 황악산 자락에서 내려온 맑은 물줄기에 몸을 씻어 속세에서 묻혀 온 욕심찌꺼기들을 흘려보내야 한다.

 바가지에 담긴 찰랑거리는 물을 보며 머릿속에 작은 파문이 인다. 도대체 여섯 개나 되는 문을 만들어 놓은 까닭이 무엇일까? 일주문을 지나서 멋진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걷기만 해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길에 이름도 모양도 제각각인 문을 세워 놓은 이유를 헤아려 본다. 새로운 문이 나타날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 나를 돌아보라는 뜻일까.

 인생길에서 만나는 수많은 문들을 떠올리면 직지사의 문 여섯 개 쯤이야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겨우 반환점이 보일까 말까한 짧은 여정을 지나오는 동안에도 무수한 문을 거쳐 왔다. 빨리 가고 싶어 턱 아래까지 숨이 차도록 뛰어가 겨우 문을 열면 더 높은 문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던 문이 오히려 쉽게 열리는가 하면 만만하게 보았던 낮은 문턱에 발이 걸려 넘어질 때도 있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처음의 마음과 다짐을 잃지 않는다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넘을 수 없는 문이란 없으리라 믿기에 묵묵히 앞을 향해 걷는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만세루 앞으로 간다. 마지막 문은 두 층으로 나누어져 있어 유난히 천장이 낮다. 고개를 낮추고 겸손해져야 부처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계단을 한 칸씩 오를 때마다 물욕을 하나씩 내려놓는다.

 대웅전 문 앞에서 가지런히 손을 모은다. 고개를 들자 어느새 부처의 품 안에 안긴 내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다.

                                                                                                  (원고지 16.3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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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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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손훈영 | 작성시간 13.09.17 좋은 수필이란 그것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수필을 쓰고 싶도록 만드는 것.
    이혜경님의 글은 나로 하여금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의욕을 불러일으켜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문을 지나갔었지만 소재를 보는 이혜경님만의 눈이 이런 글을 일구어냈군요.
    그 눈. 소재를 훑어내는 매눈. 길이 갈고 닦아 금강석처럼 빛나는 그 날을 이루십시요.
  • 작성자김경순 | 작성시간 13.09.17 제목이 시선을 잡아 끌었기에 어떤 내용인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역시나 칭찬이 자자한 분의 작품답네요.
    한 수 배우겠습니다.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 작성자이혜경 | 작성시간 13.09.18 제 글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과분한 칭찬에 부끄럽습니다.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 작성자서소희 | 작성시간 13.09.22 축하드립니다. 수상소식이 있어 더 즐거운추석이 되었겠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보여 주세요.^^
  • 답댓글 작성자이혜경 | 작성시간 13.09.23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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