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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미소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1.09.22|조회수120 목록 댓글 15

천년의 미소/김희자

 

 

                                   

 국립경주박물관 미술 전시관에 가면 천년의 미소를 만날 수 있다는 친구의 귀띔에 객기가 났다. 점심시간을 넉넉히 얻어 가을 길을 한달음에 달려왔다. 박물관 나들이를 온 아이들이 웃는 기와 앞에 우르르 몰려든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수막새를 들여다보는 개구쟁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그 미소들 틈새에 나도 슬며시 끼어든다. 투명한 유리 안에서 손바닥만 한 수막새가 소리 없이 웃고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조잘대며 메모를 하는 아이들이 대견해서 내 얼굴도 환해진다.

 웃는 기와라고 불리는 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는 작고 볼품없지만 살짝 웃는 모습을 조각한 보기 드문 수막새이다. 지붕에서 떨어져 얼굴 한 면이 손상을 입었지만 기와 파편에 새겨진 미소는 일체의 꾸밈이나 과장이 없어 보인다. 눈과 코, 뺨과 입 등이 있는 그대로 묘사되었으며 미소를 머금어 위로 올라간 입술과 약간 아래로 처진 눈꺼풀이 일품이다. 신라의 문화가 번성하던 시절, 황룡사를 건설하던 도공들이 종교적 신심과 고된 노역을 승화시켜 새긴 부드러운 미소이다. 집에 두고 온 처자식과의 즐거운 한 때를 생각하며 새긴 미소라 도공들의 넉넉한 혼이 배어난다. 

 신라 천년의 미소로도 널리 알려진 웃는 기와는 경주를 상징하는 문화재이다. 천 수백 년을 건너온 표정을 통해 신라인들의 삶을 그려본다. 지붕의 수막새를 웃는 모습으로 장식한 것을 보면 신라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쌈박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전시관으로 들어온 아이들이 가장 먼저 웃는 기와 앞으로 모여든 연유를 알게 된 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손바닥만 한 기와에 새겨진 미소가 아이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대던 아이들은 깨알이 쏟아지듯 잰걸음으로 전시관을 빠져나갔다.

 천년의 미소를 본 아이들의 가슴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전시관에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웃는 기와 앞에 바투 다가섰다. 얼굴무늬수막새는 사소할 수 있는 부분을 빙긋이 웃는 모습으로 장식했다는데 그 의미가 깊다. 여느 수막새들처럼 아무 모양이 없는 수막새로 장식할 수도 있고, 동물 모양이나 꽃무늬로 넣을 수도 있었지만 사람의 웃는 모습을 넣음으로서 신라 사람들의 여유와 재치를 드러내었다. 고된 노역과 그리움 속에서도 옛 사람들은 여유를 잃지 않고 미적 아름다움을 그려 내었던 것이다.

 전시관의 안내원이 홀로 남은 내게 다가와 말을 건다. 웃는 기와가 하마터면 우리나라에서 사라질 뻔했다고 한다. 이 얼굴무늬수막새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삼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한 개인의 숨은 노력으로 되찾게 되었단다. 잃어버릴 뻔했던 웃는 기와는 본국으로 돌아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신라의 미소로 남아 있다. 우리 것, 옛 것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이렇게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를 만날 수 있을까. 

 웃는 기와의 한 면이 깨어지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남았다면 천년의 미소로 부족할지 모른다. 처마에서 떨어져 한쪽 면상에 손상을 입었지만 웃음은 깨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다. 깨어진 수막새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기에 더 큰 의미로 다가서는 지도 모른다. 완벽하고 온전한 것보다 미완성과 모자람 속에서 보여 지는 미적 아름다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웃는 기와로 이은 집에서 산 사람들은 절로 웃음이 배어나와 웃음 그칠 날 없이 행복했을 터이다. 웃음으로 평온함과 화목함을 추구했던 신라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것 같아 살며시 웃는다.

 작은 수막새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마주친듯한 친근한 얼굴이다. 지그시 내려 뜬 두 눈과 둥글게 올라간 입술이 오 씨의 웃는 모습을 꼭 닮았다. 오 씨를 처음 만난 것은 좋은 생각 모임에서였다. 순수한 정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쌓여온 세월만큼이나 웬만한 가족사는 알고 지낸다. 성품과 미소를 논함에 있어 어찌 첫인상으로 단정할 수 있을까 마는 그는 너그럽고 평안해 보였다. 그가 자아내는 미소는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내가 만난 미소 중에 가장 멋졌고 오래 남아 있다. 얼굴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웃는 것이 아니라 얼굴빛을 부드럽게 해서 웃는 파안미소였다. 그의 미소에 반한 사람들은 백만 불짜리 미소라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그 파안미소 뒤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살아야 하는 아픔이 있었다. 그의 아내는 수 년 전 위암 판정을 받고 병마와 싸우며 젊은 날을 보냈다. 그는 아내를 간호하며 호전되어가는 소식을 가끔 전해왔고 헌신적인 마음을 드러내기도 하여 뭇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로 머리칼이 빠지고 손톱과 발톱이 부스러지는 아내를 돌보면서도 꿋꿋했다. 완치되었다던 병이 이태 전 전이되어 또다시 병마와 싸우고 있지만 그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픔을 삭이고 다독이며 정성어린 간호를 한다.

 그도 사람이거늘 어찌 찡그리지 않고 사는 날이 없을까.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로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 눈물이 흐른다고 했고 비어져 가는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 쓴 아내를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희망적인 삶을 버리지 않는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넉넉하고 평온한 신라인들의 웃는 모습이 그려진다. 소박하고 희망적인 삶을 그렸던 신라인들처럼 얼굴을 찡그리지 않는다. 마치 진리를 깨친 사람처럼 파안미소를 짓는다. 진정한 사랑에서 배어나는 미소는 남다르다. 온갖 풍상과 아픔을 견디며 완성된 미소라 언제보아도 여유롭고 안정감이 느껴진다. 

 얼굴은 지나온 삶의 표정이다. 나의 표정은 어떠할까? 나는 가끔 홀로 조용히 웃는 연습을 한다. 웃는 기와의 미소처럼 천 년토록 남지는 않더라도 만나는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기억되는 얼굴이고 싶다. 편안하고 환한 미소는 보는 이를 기쁘게 할 뿐 아니라, 그 미소를 짓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미소를 짓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요즘 사람들은 미소에 인색해서 안타깝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미소를 선물하며 살아가면 어떨까. 지친 사람에게는 편안함을 주고, 힘겨운 사람에게는 희망을 선물해주는 그런 미소를 지어보자. 백 마디의 말보다 그저 조용히 웃어주는 미소만으로도 다른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 힘든 세상의 뒤안길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희망을 품고 산다면 결코 인생은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다. 재잘대며 사라진 아이들의 발자국을 따라 전시관을 나선다. 쪽빛 가을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다. 거울 같이 티 없는 하늘을 보며 나는 웃는 기와 흉내를 살짝 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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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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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길영 | 작성시간 11.09.23 김희자님 힘찬 박수를 보내며 축하드립니다.
  • 작성자김잠복 | 작성시간 11.09.23 김희자 선생님~ 진심어린 박수를 보냅니다~ 훌륭한 수필 감명깊게 읽고 갑니다~
  • 작성자김영희 | 작성시간 11.09.23 김작가님 다시 한 번 축하드려요. 남다른 열정이 오늘을 있게했네요.
  • 작성자김경순 | 작성시간 11.09.23 수필가로서의 선배님 모습을 본받고 싶네요. 다시한번 축하드립니다.^^
  • 작성자엄옥례 | 작성시간 11.09.24 작가님, 거듭 축하드립니다. 수막새의 모습에 작가님의 얼굴이 겹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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