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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의 봄/김애자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2.02.26|조회수39 목록 댓글 3

산촌의 봄/김애자

 

 

동쪽 창 옆에서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가 한결 가까워졌다. 겨우내 두껍게 쓰고 있던 얼음장이 걷히고, 골짜기에 남아 있던 잔설이 녹아 물줄기가 불어난 탓이다. 게다가 내가 쓰고 있는 서재에서 개울과의 거리가 불과 30미터 정도여서 창문만 열면 물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책을 보다가 가끔 개울로 나가 물 속을 들여다보면 눈챙이(송사리)들이 꼬리를 흔들며 노는 것을 보게 된다. 눈이 머리만큼 커서 눈챙이란 별명을 달고 있는 녀석들이 어떤 때는 아주 날쌔게 가로지르며 떼지어 다니는데 그럴 때 돌이라도 하나 던지면 삽시에 흩어져 돌틈으로 숨는다.

신생하는 봄은 언제나 아름답다. 마른풀 뿌리에서 태동하던 어린잎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더니 어느새 민들레가 피고 앵초도 꽃다지도 피었다. 고렇게 앙증맞은 것도 꽃이 라고 한낮에는 벌들이 나와 꿀을 물어 가는 것인지 꽃가루를 구해 가는 것인지 날갯짓이 부산하다. 벌은 꽃에게서 꿀과 꽃가루를 얻고, 꽃은 벌들을 통해 씨를 맺는다. 서로가 어울려 공생하는 섭리는 암만 생각해 봐도 ‘경이로움’자체다.

어제는 마당가 장작더미에 올라앉아 있는 다람쥐의 귀여운 눈과 마주치는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볕바른 장독대에 놓여 있는 배불뚝이 항아리 앞에서 표독하고도 깜찍한 고양이가 새끼 밴 몸을 힘겹게 특고 앉아 자울자울 졸고 있는 모습은 가슴 저렸다. 암탉이 낳은 피묻은 알을 둥지에서 꺼내 들고나올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번식을 책임지고 있는 암컷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을 양수로 채워진 자궁에 생명을 품어 본 내가 어찌 안쓰러움과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은 점심 설거지를 끝내고 은옥이네 비닐하우스에 들렀다. 봄 날씨가 아무리 변덕을 떨어도 비닐하우스 안의 온도는 20도를 웃돈다. 흙내와 두엄내가 코를 찌르고 씨를 받기 위해 심어 놓은 배추와 무가 이제는 뱀골밭으로 시집을 보내도 좋을 만치 컸다. 그토록 연약하여 간드랑거리던 줄기가 단단해지고 잎이 도타워졌다. 종자를 받기 위해 심어 놓은 무와 배추는 다른 식물과 다르게 부계(父係)와 모계(母係)의 구분이 분명하고 파종의 시기도 차이를 둔다. 부계는 한 보름 늦게 파종해도 성장이 빨라 꽃피는 시기는 모계와 같다. 좋은 품종을 만들려면 암수의 수정이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되므로 시기를 적절하게 맞추어야 한다.

4월이 오면 저 어린 싹이 장다리가 되어 노란 꽃을 피운다. 뱀골을 온통 노란빛으로 일렁이게 하는 장다리꽃이 외화를 벌어들인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꽃이 곱다고 꽃밭에 들어가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만든다. 종자의 소중함을 알지도 못하면서 배추로 만든 김치를 먹고 무국을 끓인다.

현대인들은 새로운 변화의 다원성에 적응하는 데는 천재들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매일 먹고 있는 음식의 재료에 대해선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죽하면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애기똥풀도 모르고 살아왔던 시인은 “저기 애기똥풀도 모르는 것이 걸아간다고 / 저런 것이 인간의 마을에서 시를 쓴다고”「애기똥풀」이란 시를 다 썼을까.

비닐하우스 안을 한바퀴 돌아보고는 모판에 쓰고 남은 두엄더미를 막대기로 살살 헤쳐 보니 지렁이가 득실거린다. 온실 안의 온도와 습도가 미물들이 살기에 적당하여 지렁이는 물론 개미들도 줄지어 먹이를 물어 나른다. 거름더미는 미물들에게 대형 수퍼마켓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지렁이는 비옥한 땅을 만드는데 일등공신이다. 땅속에서 숨어사는 녀석은 유기질을 분해하는 역할을 기막히게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듯 지렁이란 미물조차도 없어선 안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일찍이 춘원 선생은 우덕송(牛德頌)을 통해 “쥐 같은 놈까지도 밤새도록 반자 위에서 바스락거려 바쁘다 하고 교훈을 주는 덕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모름지기 생명 있는 것들은 저마다 존재의 가치가 있고 상호간에 공생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옛 어른들은 뜨거운 개숫물도 함부로 땅에 버리지 않았다. 사람도 자연의 일원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미물들을 긍휼히 여기는 덕성을 지니고 살았던 것이다.

산촌의 봄은 날마다 새롭다. 어제 듣지 못했던 종달새가 우짖는가 하면 겨우내 조신하게 땅에 엎드려 있던 지친개, 쇠서나물, 큰냉이가 봄나물 감으로 손색이 없다. 봄나물이 다붙어 있던 땅에 코를 대면 흙내가 향기롭다.

이 향기로운 흙에 삶의 근원을 내린 산촌 사람들은 벌써부터 고추밭에 거름을 내느라 종일토록 경운기 소리가 통통거린다. 새 천년의 봄이 왔다고 떠들어대도 새로운 진보에 별 관심을 두지 않거니와, 변화의 촉수에 코드를 꽂으려는 호기심조차도 갖지 않는다. 그런 변화와 진보가 자연의 속도에 맞추어 농사를 경영하는데 있어선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경운기로 거름을 내고 다져진 땅을 갈아엎어 흙에 숨통을 터주고, 못자리를 만들고 하우스 안에서 크고 있는 고추모가 병에 걸리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최선이다. 때문에 애기똥풀꽃이 피어도, 쇠종달이가 우짖어도 한눈 팔 겨를이 없는 것이다. 봄만 오면 어김없이 오는 것들이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일터를 잃고 거리를 떠도는 실직자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 무료 급식소에서 밥그릇을 받아 놓은 그 암담한 처지가 가슴 아프고, 그 가슴 아픈 일이 혹여 객지에서 살고 있는 내 자식들에게 떨어지면 어쩌나 싶어 마음을 더 쓰는 것이다.

그래도 살구꽃이 구름처럼 피어오르면 하루 날잡아 관광버스를 대절한다. 동해건, 서해건 돌아오면서 회도 먹고 소주로 신명을 올려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한바탕 몸을 풀고 와야 속이 후련하다. 나도 배꽃이 피면 술상을 차린다. 저고리 앞섶에 은장도를 품은 청상(靑孀)의 비애가 배꽃만 할까. 볼수록 참하고도 볼수록 애처로운 꽃. 그 배꽃을 보며 송강 선생의 「장진주사」라도 한 수 읊어야 섭섭지 않다. 이래서 산촌의 봄은 눈물나게 유정하다.

 

 

 

  Field Of Tears - Chris Sphee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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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2.26 꽃 피는 봄을 기다리며...
  • 작성자미건 이숙희 | 작성시간 12.02.27 글을 읽으니 수렛골의 김애자선생님이 그립군요.
    몇 해 전, 그댁에 들렀었는데 아마 그날도 봄날이었어요
    아주 정갈하게 가꾸신 별장같은 집.
    솟대가 있고 골목에는 연산홍이 가득한 집.
    선생님과 부군선생님께서 정원에서 직접 구워주시던 삼겹살.
    그분의 따스한 정이 그리운 밤입니다.
  • 작성자송재 이미경 | 작성시간 12.02.27 이글을 읽으니 봄이 성큼 온듯합니다. 배경음악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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