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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드기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2.04.23|조회수71 목록 댓글 6

 

호드기/강미나

 

 

하늘이 살짝 내려앉은 아침, 다투어 봄꽃이 피었다. 아침밥과 반찬 두어 가지, 간식이 든 바구니를 들고 할배를 찾아갔다. 대문은 열려있고, 방 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정지문고리에 질러둔 모지랭이 숟가락을 빼고 문을 열었다. 살강 밑 단지에 진달래, 개나리가 꽂혀있다. 정지간이 환하다. 밥상을 차리려다 꺼내던 그릇을 도로 챙겨 넣고 삽짝으로 나가 섰다. 저 동쪽 모롱이에서 땅을 끌면서 노인이 오고 있었다. 몇 발작 달려 나가다 소리에 멈칫 섰다.

 

이태 전, 꽃샘추위에 제비가 얼어 죽었다. 곡기를 끊고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자는 연락을 받았다. 봉사대장 할매랑 찾아갔다. 굴다리 밑에 낡고 기울어진 슬레트집. 작은 문틈으로 찬바람이 비집고 들어선 그 냉 골방. 두서너 평될까 휑한 방에 모로 누워있는 할배를 처음 만났다. 미동도 않고 숨소리도 없이 눈만 깜박이는 할배가 무서워 나는 마당만 쳐다봤다. 창졸간에 한 솥밥 먹던 할멈이 먼저 떠났다. 봉사대장 할멈이 할배를 달래고 얼러서 일으켜 앉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영정사진을 들고는 먼저 간 할매를 봐서라도 이러면 안 된다고 설득했다. 이레 되던 날, 처음으로 멀건 죽을 입술에 축였다.

죽만 끓여 갔다. 화단의 개나리가 노란 입을 벌리고 가지마다 움을 틔운다. 들어서다 흠칫 놀랐다. 조그만 청 끝에 할배가 앉아 있었다. 필_ 늴리리-.

‘욕 보니요’ 낮은 목소리였다. 얼굴에 핏기가 돌아선지 선한 인상에 따뜻함이 전해왔다. 죽 끓여 들고 간 내 손에 호드기 하나를 쥐어 주었다. 할배 옆에는 너 덧 개의 호드기가 있었다. 할배는 불어보라는 시늉을 냈다. 입에 대고 따라 불어도 나는 제 소리를 못 냈다. 삑~,삐~. ‘이건 소리가 안 들었는갑다’ 내가 말하자 ‘인자 밥 먹을라요.’ 할배가 답했다. 대문간의 오얏나무 꽃에서도 달큰한 향기를 마당에 활짝 뿌렸다.

 

대 여섯 묵은 아이가 강둑으로 내달린다. 한참을 가도 비비종 종다리 소리임자는 없고 거기 버들개지 있었다. 아이는 물오른 가지를 잘라 제 손가락 마디만큼 잘랐다. 주머니칼로 금을 내고 살짝 비튼다. 소리 없이 옷을 벗은 포리한 속가지에서 아가 살 내음이 살풋 연한 수박향이 난다. 갈색 대롱 한쪽 끄트머리를 칼로 삐져 다듬고, 앞니로 자근자근 눌러 소리 길을 낸다. 입에 문다. 볼 풍선에 힘을 주고 세게 분다. 삑. 아구도 아프고 볼도 아린다. 거꾸로 물고 숨을 들이키며 다시 후 분다.

용을 쓰고 기를 쓰다 버들개지 용용 혓바닥 간질일 때 사 삐리-리. 아지랑이 먼 길 삐빅 거리며 소리 길 다듬어 달린다. 초가집 앞에까지 왔다. 구박하던 계모 그림자에 놀라 뒤로 돌아 숨었다. 울을 돌아 쪼그려 공처럼 앉았다. 배가 고파 잠이 깨어 살금살금 들어섰다. 털보아비랑 눈칫밥 주던 계모, 풀대죽 끓여주던 어린 누이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입 안에 사르르 녹던 어린 삘기 한 줌, 손 땟자국 멍들어 입에 넣으니 새품이었다.

할배는 노래를 참 잘한다. 하루 두세 번, 온 동네를 돌며 폐지를 수집한다. 정오가 되면 흥얼거리는 소리가 골목을 먼저 찾는다. 수레에 매단 라디오 노래 소리가 신난다. 자신보다 더 큰 수레에 세상이 걸러낸 잡것들이 담겨 달강거린다. 나는 모아둔 폐지와 재활용을 들고 대문간으로 간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예’ 하니 아침 대숲 길 골목에서 쓸 만한 물건을 건졌다며 소리 한번 경쾌하다. 전에 내가 부탁했던 ‘각시가 부탁한 빨래 삶는 솥은 그냥가지시요’ 달달한 커피 한 잔에 선심을 쓰며 또 노래다. ‘어디서 노래가 자꾸 나옵니꺼’ 하니 ’ 아. 내 등에만 달린 소리통이 있거든.‘

젊었을 때 마음을 못 잡고 죽을라고 했지요. 그때 라디오에 나오는 가수를 딱 한번 만나보면 죽어도 원이 없겠더라고요.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갔지요. 방송국에 물어물어 유명한 가수 집 앞을 찾아가 무작정 만나기를 작정했어요. 처음엔 거렁뱅이 취급 하더만요. 그래도 악착시리 기다렸지요. 스무날쯤 죽치고 있으니 하늘도 노랗고 오늘도 못 만나면 콱 죽어 버리야겠다 싶데요. 문 앞을 지킨 끈기에 딱 십 분만 시간 준다 캐요. 노래 한 곡만 불러보라 하더마요. 막상 그 앞에서 노래를 부를라고 하니 제대로 못 불렀지요. 떨리서. 내 손을 잡아 주더니 음색이 갸날파 트롯트가 어울리는데. 소질이 있어 보이지만, 그냥 노래를 즐기면서 살면 좋겠어요‘ 그 말에 이 날까지 목숨 살았지요.

 

큰길 건너 컨테이너 앞에 노인 서넛이 웅크려 소주를 마신다. 웅크린 할배도 있다. 씹어도 씹히지 않는 마른 북어 한 조각에 술이 죽는다. 엿가락 장단을 맞추듯 빈 수레 손잡이를 두들기며 지우뚱 자우뚱 질척거리는 개양 굴다리로 세월처럼 구부러진 길을 건너온다.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 아픈 가락 한 소절을 빈 수레에 얹고 모퉁이를 돈다. 동네 할머니들이 위로도 얹어준다.

그래도 내가 이 세상 살아 이만큼 구경한 게 최고 즐거운 일이요. 내 가장 즐기는 이 놀이도 할마이 가고 없으니 싱겁소 ’구름도 쉬어가는, 쉬어가는 저 산 아래~ ‘ 할배는 구성진 노래에 시름을 털고 다닌다. 폐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 길을 나선다. 앉아서 세상을 터득하지 못하고, 평생 말보다 몸으로 부딪혀 익히고 나눔을 실천하는 곱새 할배. 나는 해 드릴게 없다. 따뜻한 차 한 잔 들고 나간다. ‘참 고맙소 ‘

 

올 춘삼월, 유독 비가 잦다. 봄 하늘이 울고 울다 또 내린다. 장자골 왕 버들 새순이 돋는다. 연둣빛 조막손 터뜨리는 소리. 젖은 어깨 뼛속이 시리고, 부은 발이 신발 속에서 질퍽거린다. 느릿느릿 길을 걷는 등 굽은 할배. 이 비 그치면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겠다.

먼데 갯가 하늘로 하늘로 솟아 외로움 타는 버드나무, 물 떨리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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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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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시산 안량제 | 작성시간 12.04.23 정지문고리에 찔러둔 모지랭이 숟가락, 참오래만에 들어본 소리같네요,
    모지랭이가 아닌 몽당수까락이었으면 정감이 더할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구수한 느낌으로 잘 읽었읍니다.
  • 작성자박명순 | 작성시간 12.04.23 버드나무에 물이 오르면 호드기를 만들어서 불고 다녔지요. 온 동네가 아이들의 호드기 소리로 시끄러웠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이 봄에 잘 어울리는 정감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청산(김성복) | 작성시간 12.04.23 올 춘삼월, 유독 비가 잦다. 봄 하늘이 울고 울다 또 내린다. 장자골 왕 버들 새순이 돋는다. 연둣빛 조막손 터뜨리는 소리. 젖은 어깨 뼛속이 시리고, 부은 발이 신발 속에서 질퍽거린다. 느릿느릿 길을 걷는 등 굽은 할배. 이 비 그치면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겠다
  • 작성자장수영 | 작성시간 12.04.23 난 4월의 어느날 호숫가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호드기를 만들어 불어보았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 작성자송재 이미경 | 작성시간 12.04.25 수필이 미문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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