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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작성자박동조|작성시간12.04.23|조회수47 목록 댓글 7
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시·낭송_ 안현미 - 1972년 강원도 태백 출생. 2001년 계간 《문학동네》로 등단. 시집으로 『곰곰』, 『이별의 재구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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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태준 | 작성시간 12.04.24
    70년대가 저렇게 어둡기만 했을까, 대학을 안 나오고도 은행에 갈 수 있었고, 야간대학도 다닐 수 있었는데,
    그렇게 열심히 힘들게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도 많은데 왜 저렇게 열패자의 모습만으로만 살아야 했을까...
    문학은 '구도의 길' 즉 '자기구원의 길'일 텐데 이 산문시에는 어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들께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무슨 감동을 주겠다는 것인지. 단지 시대고발, 좌절감의 표출만으로는 아쉬운 이유...
  • 답댓글 작성자박동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4.24 72년 출생이니 90년대가 이 시가 탄생한 시기가 아닐까요.
  • 답댓글 작성자최태준 | 작성시간 12.04.26 90년대라면 산업화의 초기인 70년대보다 훨씬 더 기회가 많은 풍요한 시기였습니다.
  • 작성자송재 이미경 | 작성시간 12.04.25 긴 더듬이로도 감지되지 않는 암울한 현실을 고백적으로 표현한 것이 좋네요. 작가에게는 시 짓는 일이 자기구원이 길이 아니었을까요.
  • 작성자정애선 | 작성시간 12.04.25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우우, 우, 우 끝없이 타전하는 시 속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흡사한 거짓말들이 숨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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