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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참외지게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2.06.20|조회수85 목록 댓글 12

 

아버지의 참외지게-중봉조헌 문학상 수상작

 

                                                                                              

                                                                               백두현

 

 

회사 앞에 일궈 놓은 작은 텃밭에서 참외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다. 구내식당을 경영하는 아주머니가 자투리 시간을 이용할 요량으로 참외를 심었는데, 출근길마다 얼마나 컸는지 들춰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보름 전쯤 계란만하게 달린 참외를 보았는데 그새 누런 것이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간다. 어느 날부터인가 바쁜 출근 시간에 이렇게 남의 밭작물을 훔쳐보는 일에 재미가 붙어가고 있었다. 이 작은 일상이 행복하게 와 닿는 것은 아마도 내 어린 날의 향수 탓이리라.  

아버지는 600평 밭에서 얻어지는 참외를 주 소득원으로 다섯 남매를 키우셨다. 그 시절 참외밭에 가면 어린 마음에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가 무던히도 먹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잘 익은 참외를 골라 읍내 과일시장에 내다 팔았기 때문이다. 배꼽이 튀어나온 배꼽참외나, 꼭지부분이 파래서 기형적으로 배만 커진 상품성 떨어지는 참외만이 우리들 차지였다. 그래서 탐스러운 참외를 먹고 싶을 때마다 아버지를 도와드린다는 명목으로 참외 광주리를 나르다가 슬쩍 한두 개 땅바닥에 떨어트려 깨버리곤 했다. 금이 간 참외는 단연 내 차지였다.

 그렇게 키워낸 참외를 팔려면 밭에서 시장까지 20리 길을 날라야 했다. 하루에 여섯 지게 분량의 참외가 수확되었는데 모두 아버지 몫이었다. 읍내까지 가는 길이라는 게 아주 좁은 소로여서 나를 수 있는 수단은 지게가 전부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참외 지게를 지고 온종일 밭에서 읍내 과일시장까지 왔다 갔다 하셨다. 그런데 아무리 부지런히 나른다 해도 하루 네 번 이상은 힘들었다. 생산되는 참외는 여섯 지게인데 운반되는 참외는 네 지게뿐이라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식들이 어려 도와드릴 수도 없었고 품을 사자니 품삯이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각하신 방법은 두 개의 지게를 한꺼번에 나르는 일이었다. 첫 번째 지게를 지고 1km쯤 앞에 내려놓고 돌아와 두 번째 지게를 지고 2km쯤 가서 돌아오며 두 개의 지게를 번갈아 운반하는 것이다. 두개의 지게를 겹치기로 지고 가면 지게를 바꾸기 위해 돌아오는 시간은 맨몸으로 걸어오기 때문에 그 시간을 휴식시간으로 활용하셨지 싶다. 처음부터 하나의 지게로 20리 길을 가더라도 어차피 1km마다 쉬어야 했기 때문에 휴식시간이 아까워 생각해 내신 방법이다. 그 덕에 하루 여섯 지게를 전부 운반하실 수 있었던 것인데, 내 기준으로 생각하면 아버지는 온종일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땀을 자양분으로 이 세상에 뿌리 내려졌다. 20리 길을 쉬지 않고 옮겨졌던 아버지의 눈물겨운 참외지게 덕에 한 인간으로 뿌리 내리고 살아가는 셈이다.

 빈 그릇에 물을 받아놓고 고구마를 키워보면 성장력이 좋은 고구마 싹이 왕성하게 자란다. 그러나 고구마 싹이 몸체에 붙어있는 한, 줄기는 제 어미의 살만 갉아 먹을 뿐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물속에서 빈약한 실뿌리로 허둥대지 않고 흙 속에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야만 모진 바람과 홍수를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줄기가 왕성하고 잎이 무성하다 한들 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다음해를 기약한단 말인가.

 고구마란 존재는 제 몸을 썩혀 줄기에게 영양분을 나눠줄 수야 있겠지만 그것으로 부모의 의무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힘들더라도 제 몸을 잘라내는 고통을 더해야만 잘려나간 줄기가 땅에 묻혀 새 삶을 찾는다. 내게 있어 아버지의 참외 지게는 잘려지는 고구마 줄기의 고통과 같았다. 내가 거실에서 기른 고구마 싹처럼 아버지는 일생동안 자식들이 무성한 잎으로 장식되기를 소망하며 스스로를 희생하다 가신 것이다.

 오늘도 나는 텃밭에 쪼그리고 앉아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힘들고 무거웠던 아버지의 참외 지게를 떠올린다. 그럴수록 힘겨웠을 내 아버지의 다리가 자꾸 눈에 밟혀 가슴이 아리다. 몇 날을 뚫어져라 참외를 바라본다고 무엇이 달라질까만, 자식이란 이렇게 뒤늦게야 철이 들어 부모 그리워하게 되는 어리석은 인간임을 어쩌랴. 아무 걱정 없는 줄기와 잎이 어떻게 썩어가는 고구마의 마음을 온전하게 헤아린단 말인가. 제 몸에서 싹을 틔우고 심장을 나눠줘 봐야 깨우치게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나도 이제 세 아이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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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20 그렇지예. 글이 완벽하지 않아도 원목이 좋으니 평도 잘 받았겠지요.
    이곳에 올리는 글은 얼마든지 스크랩 해 가도 됩니다.
    퍼 가라고 올리는 글입니다.
    혼자 보는 것보다 나누고 싶어서 올리는 글이니까요...
    잠복쌤, 고구마라는 소재로 글을 한번 써보세요! ^^
  • 작성자조현태 | 작성시간 12.06.20 이토록 줄기차게 작품을 올리며 회원들로 하여금 공부하고 쓰게 하는 김희자 선생님이 참외 지게 같다는 생각도 드네예.
    잘 읽었고예 고맙심더.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21 이렇게 답글 달아주시는 조작가님도 엄청 고맙습니다요.
    여름 행사 때는 뵐 수 있겠지예...
    좋은 사람들은 자주 봐야 정이 든다캅디다. ^^
  • 작성자정애선 | 작성시간 12.06.21 아버지의 희생하는 사랑이 고구마로 표현이 되었군요. 잘 보고 갑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21 많이 읽고 많이 쓰며 많이 생각해봅시다.
    어제 지도 받은 작품 퇴근해서 정리했습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걸 보며 '
    역시 스승님은 다르시구나!' 하고 감사히 여깁니다.
    매를 맞아 아파도 이렇게 성숙해진다면 얼마든지 맞어야겠지요.
    힘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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