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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식(進水式)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2.06.29|조회수58 목록 댓글 3

진수식(進水式)/조 숙 /해양문학상

 

 

큰댁에서 분가하면서 받아온 목숨이 이 배 한 척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날이 정월 초아흐레 아버지의 생신날이었답니다. 사람사이에 인연이 몇 억겁의 세월을 건너 만나지는 것이라면 아버지와 우리 배 어승호와 인연은 어떤 세월의 강을 건너서 다다른 것일까요. 어린 싹이 아름드리나무가 되고 그것이 한 척의 배로 건조되어지기까지 시간의 나이테를 되돌려 점 하나로 시작되었을 그날을 떠올리자면 말입니다.

어승호는 아버지의 몸과 같은 생채리듬을 가졌습니다. 아버지는 몸으로 말하지 않아도 배의 휴식 즈음을 아시고 도크에 올립니다. 바다의 이빨에 물린 상처와 격랑을 건너온 관절을 치료하기 위해서입니다. 푸른 힘줄 불끈거리는 아버지의 손 어디에 그 토록 자상한 부드러움이 숨어있었던가! 도크에 올려 진 배에게 아버지는 ‘어디가 아프신가?’ 하고 묻는 듯 천천히 돌아보십니다. 늙은 소의 잔등을 쓰다듬듯 아버지와 배의 교감은 자못 경건합니다. 배와 아버지만의 소통언어 입니다.

바다에서 뭍으로 끌어올려 놓고 보면 배는 바다에 떠 있을 때 보다 훨씬 크게 보입니다. 배가 바다에서 위용을 드러내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미리 깨닫고 자신을 낮춘 것 입니다. 늘 잠겨있던 아랫도리를 내놓는 부끄러움에 배는 긴장하는 듯합니다. 그곳에 기생하여 살던 바닷말과 따개비들도 촉수를 움츠립니다. 팔랑개비처럼 바다를 가르며 포말을 일으키던 배의 꼬리지느러미 격인 스크루가 번쩍거립니다. 낯선 햇살에 눈이 부신 듯합니다. 아니 스크루에 부딪혀 햇살이 조각나 버립니다.

긴 여정을 돌아 온 배는 포경선에 잡혀 올라온 고래 한 마리 같습니다.

축항 한쪽에 고래 고기를 파는 곳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몸집의 서너 배는 족히 되는 고래가 시멘트 바닥에 드러누워 있습니다. 고래 한 마리를 통째로 놓고 미영이 아버지는 장화 신은 발로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고래 고기를 부위별로 잘라 파는 것입니다. 맥없이 누워있는 고래를 보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슬픔이 밀려옵니다. 언젠가 동물원에서 보았던 훈련된 돌고래 쇼를 볼 때도 울컥 솟아오르던 그 느낌입니다. 죽은 고등어 한 토막을 얻어먹기 위해 조련사의 손짓 발짓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묘기를 보이는 돌고래를 보는 일은 젖은 풀섶을 걸을 때 발목에 남는 물기처럼 가슴을 젖게 합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고래 잡는 법을 기억합니다. 바다 잔잔한 날 배에게 말을 걸듯 고래가 다가온다지요. 배의 속도와 보조 맞추듯 천천히 헤엄쳐 오는 고래를 선장은 배에서 떼어 놓으려는 듯 전속력으로 달립니다. 고래도 따라 전속력을 내며 따라옵니다. 배도 고래도 가속이 붙었을 때 갑자기 배의 엔진을 확 끄고 멈추면 고래도 멈추어 서서 배 곁에 나란히 섭니다. 그때 준비해둔 작살을 내리 꽂는다고 합니다.

며칠 동안 엔진을 수리하고, 상처 난 곳을 치료하고 나면 배는 새 옷을 입습니다. 열꽃처럼 피어난 붉은 녹을 털어낸 배는 날아갈 듯 가벼운 차림입니다. 페인트 방울이 뚝뚝 떨어져 무늬를 이룬 작업복 차림의 용이 아재의 도색솜씨입니다. 아랫부분은 물빛을 닮은 청록색을 칠하고 윗부분은 흰 바탕에 검은 띠를 두 줄 둘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어. 승. 호라고 쓰자 마치 방금 화장을 마친 여인처럼 곱습니다.

드디어 진수식( 進水式 )을 합니다.

아버지는 희끗한 머리카락을 까맣게 염색하고 머릿기름을 반지르르 하게 바르셨습니다. 어머니는 아껴 두었던 연두색 저고리를 입고 붉은 팥알이 뚝뚝 떨어지는 떡을 시루 째 이고 오십니다. 빨강 노랑 초록 원색의 깃발을 달은 어승호는 새 각시 같습니다. 키를 잡은 아버지의 손끝이 가늘게 떨립니다. 아버지와 어승호가 합방을 하는 날입니다. 도크에서 미끄러지듯 바다에 첨벙 몸을 담급니다. 축항에 누워있던 고래도 벌떡 일어나 바다로 뛰어드는 환영에 젖습니다. 탕! 탕! 탕! 연기를 뿜어 올리며 엔진이 제 목소리를 내고, 배가 나가는 길을 바다가 옆으로 물러섭니다. 스크루가 힘차게 돌아가며 파도를 잘게 부수어 포말을 뱉어 냅니다.

진수식을 하는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함께 잔치를 합니다. 바다와 배의 안녕을 비는 용왕제를 올립니다. 흰 꽃으로 장식한 띠를 머리에 두르고 고운 갑사 천을 길게 늘어뜨린 무녀가 꽹과리와 장구 징소리에 맞추어 한바탕 굿판을 벌입니다. 어머니 연신 허리를 조아리고 손이 닳도록 빌고 또 빕니다. 날마다 깃발을 달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나무에 높다랗게 달린 청, 홍색 깃발처럼 나풀나풀 날아가는 가뿐한 날들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눈물 많은 어머니와 한숨 쉴 때마다 깊어지는 아버지의 이마고랑도 장대에 매달아 날려버렸으면 좋겠다고 나도 빌었습니다.

배는 언제나 귀를 열고 있습니다. 물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물의 흐름을 듣고 물의 노래를 듣습니다. 물고기들이 지느러미 스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허리를 담그고 작은 물이랑에 귀를 세우면 적요 속에서도 폭풍을 읽습니다. 배의 이마가 닿는 곳마다 길이 열립니다. 길을 찾아내는 것은 떠나는 자의 몫입니다. 항구를 떠나온 곳마다 역사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 배 어승호는 바다의 골목들을 샅샅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부표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찾아내는 것은 아버지 손에 들린 나침판보다 먼저 배가 기억하는 물맛입니다.

배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식하는 것은 평온한 날이 아니라 벼른 칼끝처럼 서슬 퍼런 바다를 일엽편주로 나아갈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승호가 일체를 이루어 순례한 비릿한 세월이 태풍을 건너는 법을 터득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때를 읽을 줄 아는 혜안이 밝아지는 것도 인고의 시간을 보낸 뒤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배도 사람처럼 지천명을 아는가봅니다. 아버지와 어승호가 인연의 끈을 놓을 것을 예견하고 밤새 등대가 우우~~ 우웅~~울어대고 조타실 옆 댓가지에 매달아 놓은 깃발들이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태풍 앞에 우리 배 어승호는 조용히 내려앉았습니다.

낡은 사진 속에서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있는 아버지는 여태 웃고 있습니다.

바다에 발을 딛고 살다간 등 굽은 어부의 반짝이는 하루였습니다. 평생 페인트 방울 무늬 옷을 제복으로 입고 살았던 도색 공 용이아재의 부음을 듣고 달려간 고향! 용이 아재네 대청마루에 걸린 사진틀 속에서 어승호와 아버지가 정지된 시간을 밀치고 걸어 나왔습니다.

아버지와 ‘어승호’가 다시 진수식( 進水式 )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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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한정미 | 작성시간 12.06.29 늘 고맙습니다.
  • 작성자박동조 | 작성시간 12.06.29 조숙님의 글이 다른 곳에서도 당선작으로 뽑힌 적이 있는 걸로 기억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쓰기 어려운 글이군요.
    나중에 다시 꼼꼼히 읽어보겠습니다.
    희자샘! 고마워요.
  • 작성자엄옥례 | 작성시간 12.06.29 진수식이라고 하니 병속에 담긴 편지에 나오는 진수식이 생각납니다.
    육지 사람들은 이런 모습 보기 힘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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