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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황혼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1.01.15|조회수82 목록 댓글 10

어떤 황혼 /장명희

 

 
산자락에 살면서 누리게 되는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언제라도 대문만 나서면 바로 산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앞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아도 발을 헛디딜 염려가 없는 익숙함은 시선을 안으로 모을 수 있어 생각에 잠기기에 좋고, 산속의 고요는 헝클어진 마음을 가다듬거나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도 좋은 것 같다. 해질녘에 걷노라면 해넘이가 만들어 낸 석양이 너무 고와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고, 비 갠 오후에는 골짜기에서 피어오르는 물 안개를 보며 신비한 전설 한 도막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리고 그 길에는 노을보다 더 곱고 포근한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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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를 구울까요, 고등어를 구울까요?"
"아무거나."
"잡숫고 싶은 걸 얘기해요."
"하고 싶은 걸로 해."
"그래도....."
"그럼 두 가지 다 해."
"....... 알았수."

마당에는 청둥오리들이 작은 웅덩이에서 깃털을 다듬으며 저녁 목욕을 하고 있고 닭들은 홰에 오르기 전에 배를 채워 두려는 듯 열심히 모이를 쪼고 있다.
어느새 술이가 구르듯 달려 와 꼬리를 열심히 흔드는 것이 반갑다는 뜻일 게다.
강아지적에 넘어진 술병에서 흘러나온 소주를 핥아먹고는 취해서 비틀거려 술이라 이름 붙여졌다는 누렁이는 잡종이지만 영리해서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머리를 흔들어대면서도 둔한 몸짓으로 서둘러 다가오려고 애를 쓰는 검정개는 차마이다. 어릴 적 홍역에 걸려 앓고 있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동물병원에 입원을 해서 이름이 차마가 되었다. 후유증으로 아직도 머리가 흔들거려서 보는 사람을 안타깝게 하지만 차마 역시 영리하고 사람을 잘 따른다. 술이가 내 손을 핥고 있는 것을 보고는 뒤뚱뒤뚱 다가와 운동화 끈을 물고 흔든다. 상강(霜降)이 지났는데도 아직 맨드라미가 남아 있었는지 차마의 입 언저리에  꽃 조각이 붙어 있다.
눈이 부시도록 깨끗이 닦여져 댓돌 위에 놓인 할아버지의 크고 하얀 고무신은 석양을 받아 색 고무신처럼 주황빛으로 곱게 물들어 있으나 곁에 놓인 할머니의 자그마한 파란색 고무 슬리퍼는 노을 빛을 받으니 외려 우중충해 보인다. 할아버지의 고무신이 발그레한 것은 노을 빛의 작용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많이 낡아 있음에도 할머니의 손에서 소중하게 대접받는 것에 대한 송구함이 내비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해가 있는 내내 볕이 드는 쪽마루에는 곶감이 되라고 깎아 놓은 감이 신문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고, 실에 꿰어져 문설주에 매달려 있기도 하다.  광주리에는 가지, 박, 호박들이 낮 동안 마당에서 볕 바라기를 하다가 방금 들어 온 듯 바삭바삭하게 말라져 있다. 정월 대보름날이면 할머니의 손에서 조물조물 맛나게 무쳐지고 볶여질 오가리들이다. 두 분만의 식탁이면서도 할머니는 언제나 의미 있는 날이면 절기에 맞는 음식을 장만하시곤 했다.
뒤주 위에는 방석만한 호박덩이가 올려져 있고 그 곁에는 너무 깨끗해서 순결해 보이는 햇바가지 네 개가 놓여 있다. 손톱으로 퉁기니 통하고 해맑은 소리를 내더니 그 울림에 저희끼리 부딪쳐서 다그락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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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커다란 몸을 흔들의자에 앉아 흔드시면서 보이지 않는 텔레비젼을 듣고 계신다. 목욕을 하신 듯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회색의 머리칼이 불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인다.
키도 크시지만 몸체도 풍성하신 할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살집이 별로 없고 아담한 체격이신 할머니는 언젠가 당신의 몸무게가 할아버지 체중의 절반이라고 하시며 할아버지를 목욕 시켜드리는 일이 중노동이라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오늘도 할머니는 힘든 일을 하셨던가 보다.

"할머니, 할아버지, 저 왔어요."
"저녁때 어쩐 일이야?"
검은 가닥이라고는 한 올도 없는 은발의 할머니는 갈치와 고등어 도막이 놓인 석쇠를 불에 올려놓고 나물을 무치고 계셨다.
"이거 간 좀 봐. 도무지 요새는 뭐든지 싱겁기만 해. 나이를 먹으니 혓바닥도 늙어서 그런가."
"맛있어요. 간도  알맞은데요."
"그려? 그럼 여기서 밥 먹고 가. 신랑은?"
"아니에요. 집에 가서 먹을게요. 어서 드세요. 오늘 좀 늦을 거래요."
할머니가 진지상을 들이시는 뒤를 숭늉을 들고 따라 들어 갔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수저로 진지를 떠서 입에 넣어 드리고 나물을 집어 드리고는 생선 가시를 발라서 또 넣어 드린다.
제 입에만 맞춰서 짜게 한다느니, 국물이 뜨겁다느니, 체하게 하려고 빨리 먹인다느니 할아버지는 늘 그렇듯이 줄곧 투정만 부리시지만 할머니는 그저 웃으시며 열심히 수저를 움직이신다.
할머니의 식사는 할아버지의 식사가 끝나야 시작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미워지려고 하거나 용서해야 할 일이 있으나 쉽지 않을 때는 이 곳을 찾았다.
오가는 산길에서의 마음 가닥 챙기기도 도움이 되지만 할머니를 뵙는 것이 특효의 처방전이 되곤 했다.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지를 할머니를 뵈며 느끼기 때문이다.
몸이 성하실 때의 할아버지는 가족보다는 친구들을 더 좋아 했고 아내 보다 술을 더 사랑했었으며 집에서 잠든 날보다 밖에서 밤을 지새운 날들이 더 많았다고 했다.
당뇨병이 발병하고서도 술과 친구 밖에 모르셨다는 할아버지는 합병증으로 시력을 잃고서야 집에 정착을 하셨는데 그렇게 살아오는 내내 할머니는 가슴앓이를 하셨고 눈물도 많이 흘렸고 원망도 많이 하셨단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그 때부터 마음이 훤히 열리며 미운 마음이 없어지더라고 했다.
내 맘을 요만큼이라도 커지게 해 준 사람이니 나한테야 고마운 사람이여.
좋아하는 술도 못하고 눈이 안보여 외출도 못하니 가엾지.
여기가 절 집이고 영감이 부처님이거니 생각하고 살어. 역정을 낼 때는 내 맘 공부시켜주려고 그런다 생각하고.
어쩌면 내가 전생에 저 양반에게 신세를 많이 졌는지도 모르고, 아니라면 다음 생에서 내가 어려울 때 저 사람이 도움을 주겠거니 생각하면 맘이 편해.
마주 앉아 푸성귀를 다듬거나 곡식 낟알을 고르면서 듣는 할머니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내게는 가슴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계명이었다.
가시가 있다고, 숭늉이 뜨겁다고 벌컥벌컥 역정을 내시는 할아버지를 마치 억지 투정을 부리는 어린 아이를 보듯이 포근한 미소로 대하시며, 떼라도 쓸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그나마도 기운이 딸려 못하거나 박대한다고 후딱 저승사자라도 따라가 버리면 어떡하느냐고 하시는 할머니는 내 마음속의 옹이를 보시고는 설득을 하시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일이 전생의 빚 갚음이거나 아니면 다음 생을 위한 저축이라고 하시는 할머니의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어떤 현자의 말보다 나를 깨우쳐 주시기 때문이다.
가까운 이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는 일조차도 힘겨운 나로서는 할머니의 큰 마음이 외경스러울 따름이지만 공부란 반복의 효과라고 하니 자꾸 뵙다 보면 나도 언젠가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평면적이지만은 않게 되기를 기대하며 갔던 길을 되짚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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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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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윤희순 | 작성시간 11.01.15 어느 부분은 저의 생활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추운날씨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게 보내세요~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1.15 글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는 좋은 작품들을 읽는 것도 공부입디다. 저는 요즘 쓰는 것보다 읽는 것에 더 치중을 합니다. 봄이 올 때까지 이러지 싶습니다. 화이팅하셔요. ^^
  • 작성자김잠복 | 작성시간 11.01.15 나 혼자 읽기에는 아까워 '에세이 울산'까페에 스크랩 해 갑니당~~ 꾸벅..
  • 작성자정애선 | 작성시간 11.01.19 덕분에 고운 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김영숙 | 작성시간 11.01.20 장명희 언니...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요즘 뭘 하시는지...글 새삼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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