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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 4회 목포문학상 (신인상)

작성자박동조|작성시간12.10.20|조회수125 목록 댓글 3

「밤의 한 가운데서

                                                                       이은옥(충북 청주시)

 

 

모로 누운 허리께가 불편한 느낌이 들어 뒤척이다 눈을 뜬다. 벽에 걸린 시계가 조도 낮은 비상등 속에서 세 시쯤에 머무르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몸을 똑바로 누이고 다시 눈을 감는다. 병원에서의 잠은 지속성이 없다. 겨우 한 시간 남짓 지난 것이다. 벌써 세 번째 뜨는 눈이다. 성인 한 사람이 바로 누워 옴짝달싹 못하는 크기의 직사각형 보호자용 의자는 편치 않다. 아니, 그가 누구이든 입원환자를 곁에 두고 자는 잠이 결코 달지는 않으리라. 의자 탓이겠는가.

가늘게 코고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옆 침대의 50대 여자는 고혈압 환자다. 어떤 때는 문풍지를 펄렁이는 삭풍처럼 고막을 터트릴 듯 코를 고는데 자신만은 잠을 잘 잔다. 게다가 수다도 많아 한번 말을 시작하면 상대가 두통을 일으킬 정도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비교적 포커페이스인 나는 내색 않고 들어준다. 들어주면서 그녀를 미워한다. 그리고 나의 이중성에 냉소를 품으면서도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한다. 반응이라도 보여주면 새로운 소재를 첨가해 말 길이가 더 길어지기 때문이다.

복도로 나와 본다. 환하다. 복도 중앙에 있는 간호사실의 당직 간호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차트정리를 하고 있다. 병실로 들어가 책을 들고 다시 나온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고개를 쳐든 간호사 한 명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띄어준다. 순간, 나의 미소가 사회생활에서 단련된 일종의 기계적인 아첨이라는 것을 느낀다. 사실 나는 무표정하고 싶다. 마음도 몸도 찌뿌듯해서 간단한 근육조차 움직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병원에 있는 동안 간호사는 나의 상대역이다. 간호사는 입 끝만 살짝 움직여 목례를 한다.

바람이 몹시 분다. 매체에선 초대형 태풍 상륙을 예고 중이다. 종합 병원 앞마당에 심어져 있는 붉은 칸나가 꺾어질 듯 둔각으로 왕복하는 메트로놈처럼 휘청거린다. 편하게 수발을 들려고 입고 온 남방의 긴 자락이 펄럭이며 엉덩이와 허벅지에 감긴다. 올려 묶은 머리칼의 남겨진 가닥들이 얼굴을 훑는다. 어두운 허공에서 무형의 어지런 바람이 복수를 작정한 마왕처럼 격렬하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폭풍의 언덕’이 떠오른다. 그들의 격정적이고 어두운 사랑. 그럴 계제도 아닌데 슬며시 감미로운 기분이 든다. 어쩌면 인간의 감정은 완전한 순도로 현재에 몰입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장이 나빠 응급실을 거쳐 온 노모를 병실에 두고 나는 너무도 가까운 곳에서 나만의 은밀한 관능을 느낀다.

새벽 세 시의 지방 도시는 폭풍전야 속에서도 정적에 잠겨있다. 밤을 방해하는 네온사인도 별로 없다. 차량 없는 넓은 도로는 비로소 휴식을 취한다. 멀리 세워놓은 자동차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하루 주차료가 너무 비싸 주변 건물의 이면 도로에 세워 놓은 터다. 아파서 힘든 사람들을 상대로 잇속을 챙긴다고, 입원 환자한테는 적어도 대폭 편리를 봐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고혈압 여인이 한바탕 불만을 터뜨렸다. 아마도 병원 운영 효율을 위해 주차 시스템은 아웃소싱을 해서 그럴 거라고, 말하려다 관뒀다. 사실 나도 영 못마땅했다. 크든 작든 일상의 다반사가 통제 권리를 가진 권력들이 기획한 시스템에 의해 인식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종되고 있다고 친구에게만 열을 올리는 소시민 의식의 발로였다.

카 라디오를 켠다. 언제나 고정돼 있는 클래식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선율이 밤의 색채와 더불어 유현하다. 멀리 어느 방위의 하늘인지 암운 사이로 희미한 별 빛들이 몇 개 존재의 신호를 보낸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성. 젊은이 시든 뒤 어느 자리에서건 내 가 남들보다 이채(異彩)를 띄지 못할 거라는 남모를 공포에 시달려왔다. 내 존재성의 미미함에 대한 지나친 예민함으로 편안하지 않았고, 때론 가슴을 저리는 회한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아마도 젊은 시기에 갖게 되는 세상에 대한 오만과 교만이 세월과 더불어 겸손해지지 않은 탓일 것이다. 찬란한 과거를 잊지 못하는 늙은 여배우의 회억(回憶)처럼 서글픔과 체념도 묻어있었다. 살아온 세월과 살아갈 세월이 비슷해진 나이의 기로에서 그렇게, 오랜 풍상에 마모되다가 주변의 초목마저 닮은 이정표를 하나 발견했었다.

그러나 또다시 새벽을 앞에 두고 의구심이 든다. 단순과 반복이라는 무자극의 삶. 반복은 화젯거리를 낳지 않는다. 항상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수도 줄어든다. 청각이 심하게 퇴화된 노모와의 대화는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 것이지만, 되도록 필요한 말만 하게 된다. 그래서 말수가 적어진다. 이러다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늘 매력 없고 부정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침울하고 강퍅한 노처녀와 완전한 싱크로율을 발휘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처럼 획일적으로, 무감각하게 캐릭터를 반복 재생산하는 작가나 창작자에게 꿈틀거리는 저항감을 느낀다. 정말 그들과 처지가 같다는 듯이.

지병이 많은 노모와 같이 하는 시간은 힘들었다. 자신이 살아온 방법에 대한 집요한 아집,

그 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만화 주인공 ‘니모’처럼 기억을 잃고 반복되는 타박과 잔소리. 그녀 앞에 나는 중년을 넘어가는 딸이 아니라 함부로 부려도 되는 한갓 드난살이 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아닐까 섭섭한 적도 많았다. 먼 거리의 자식들이 찾아와 두어 시간 놀다가는 시간에도 그녀는 찾아와 준 자식들의 피곤함은 안쓰러워하면서, 인생의 시간을 쪼개어 자신 곁에서 노동하는 내게는 변함이 없었다. 찾아온 형제들을 위한 나의 봉사를 당연시하는 태도로 이것저것 주문이 많았다. 그래서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속담은 자식차별을 한 부모들의 불편함이 만들어 낸 알리바이라는 생각을 했다. 대체로 부모가 되고 부모를 모셔 본 주변인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그래서 ‘부모 자식’이라는 견고한 신화에 얽매이지 않기로 한다. 그들도 호불호(好不好)의 감각을 지닌 인간인데 어찌 기계적인 공평함을 바라겠는가. 그저 내가 자식의 마음으로 그들에 대한 성심을 다하면 되는 것이라고, 의도적인 쿨(cool)함으로 무장한다. 하루 세 끼를 꼬박 준비하고 보살피는 행동들의 사이사이로 시간들은 소리 없이 빠져나간다. 며칠을 병원에서 새우고 있는 이 밤들 때문에 내 삶의 그 다음 순서가 정체(停滯)돼 있다. 노모는 그것을 모르고 어쨌든 지금은 곤히 잠들어 있다.

병실로 돌아오니 노모가 일어나 앉아있다. 다리가 저려 파스를 붙이려는데 입구가 너무 꽉 물려 있어 못 열고 있단다. 편리를 위해 고안된 비닐 지퍼마저도 열 힘이 없는 무력한 육체.

손등의 검버섯들이 박명 속에서도 시야에 박힌다. 먼 별빛들의 사라진 존재성을 목격하고 돌아온 망막에 반갑지 않은 침입자들의 존재가 들어차고 있다. 아주 작고 희미한 기미(幾微)가 저토록 커다란 검은 흔적으로 들어찰 때까지 그녀는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내 왔겠지. 아무리 서운한 마음이 구석 자리에 웅크리고 있어도, 사회경제적으로 좀 나은 시대를 살아온 내가 서운함 하나로는 어림하지 못할 파란과 굴곡이 그 반점 속에 옹이 진 것이리라. 파스를 붙여야 하는 지점을 가리키느라 헐렁한 옷소매가 팔 위쪽으로 조금 밀린다. 그녀가 무수히 지나왔을 고단한 길들처럼 툭툭 불거진 혈관 들이 손등과 팔목으로 푸르스름하게 번져있다.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 그녀를 애증하는 나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 할 수 있을까.

창 밖에선 좀 전보다 더한 횡포로 바람이 포효한다. 어떤 일이라도 제발 일어나기만을 바라는 시골 소녀의 동경처럼, 권태로운 결혼 생활 한 가운데서 욕망을 채워줄 일탈을 고대하는 ‘마담 보바리’처럼 폭풍의 전령이 내 마음을 흔든다. 설레게 한다. 무섭지 않다. 땅 위에 박혀 이동하지 못하는 초목들에게 자유의 광포한 즐거움을 알려주겠다는 듯 거침없는 저 바람이, 마초기질을 가진 건장한 사내가 연약한 연인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듯, 가라앉아 있던 내 심장 박동을 부추긴다. 그런데 정작 밤의 한가운데서 회의와 자탄에 빠져 곤두세워졌던 내 촉수들은 다시 부드러워져 유연하게 내려앉는다. 여명이 왔다.

 

 

 

신인 작품 평

신인들의 작품들도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작품마다 특색이 있어 수상작을 고르는 데 고심을 많이 했다. 그러나 접수번호 103번의 「밤의 한가운데서」를 당선작으로 선하였다. 함께 제출한「모서리」도 수준작이다. 먼저 「밤의 한가운데서」의 작품은 몸이 불편한 노모가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병원에서 병수발을 들고 있는 딸 자신의 모습을 심리묘사까지 곁들여 그린 글이다. 문장이 세련되고 병실과 병원 복도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병원 앞마당에서 있었던 일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글이다. 뿐만 아니라 바람이 심하게 불고 방송 매체에서는 초대형 태풍 상륙을 예고하는데 병원 앞마당에 심어져있는 붉은 칸나가 꺾이어 질 듯 둔각으로 왕복하면서 휘청거리는 모습까지 실감나게 묘사 하였다. 그러나 쓰지 않아도 될 외래어를 자주 쓴 것이 옥의 티라 할 것이다.

그녀 앞에 나는 중년을 넘어가는 딸이 아니라 함부로 부려도 되는 한갓 드난살이 하는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아닐까 섭섭한 적도 많았다.” 라든지

“ 먼 별빛들의 사라진 존재성을 목격하고 돌아온 망막에 반갑지 않은 침입자들의 존재가 들어차고 있다. 아주 작고 희미한 기미(幾微)가 저토록 커다란 검은 흔적으로 들어찰 때까지 그녀는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내 왔겠지(중략) 그녀가 무수히 지나왔을 고단한 길들처럼 툭툭 불거진 혈관들이 손등과 팔목으로 푸르스름하게 번져있다. 내 맘을 알아주지 않는 그녀를 애증하는 나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 할 수 있을까.”

라는 구절 등은 읽는 이의 마음에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글이다. 앞으로 노력하면 매우 역량 있는 작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 사료되어 추천한다. 「모서리」의 작품 평을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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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에세이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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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랑 김동수 | 작성시간 12.10.20 외래어가 고유명사면 몰라도
    외래어 남용에 '씽크로율', '쿨함' 같은 외계어까지 생각 없이 쓴 글을 당선작으로 하면 어쩌자는 말인지
    게다가 관념어와 외래어가 뒤섞여 현란한 의식이 흐르는 단편소설 같은데, 수필은 또 어쩌란 말인지.
    언어파괴와 쟝르파괴를 공식 인정한다는 말인지.
    최소한의 질서까지 무너트리는 심사는 또 뭔지.
    수필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기분입니다.
    거참! 입맛이 씁씁.
  • 작성자박동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10.22 네, 외래어 남발은 용서가 안 되지요.
  • 작성자바람소리 김만수 | 작성시간 12.10.21 그래도 읽어는 봐야겠지요? 요리를 배울려면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의 구별을 너무 하면 안될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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